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5화 (5/240)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금세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거울에서 보았던 기묘한 숫자들. 게임과 닮아 있던 표식은 지금의 알람과 바로 매치가 되었다. 복받쳤던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

이름 : 서준경 / 쿤 타이(Lv1)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None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분노

신성 포인트 : 50

***

일전과 같은. 아니, 조금 다른 수치들이 거울에 적혀 있었다.

지난 며칠간 억지로 무시했던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확실히 게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분노."

새로 생긴 것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스킬의 아래쪽. 특기에 분노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었다.

혹시 게임과 같이 추가적인 상태도 확인 할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다 분노라 적힌 부분을 손으로 건드려 보았다.

***

분노(Fury)

소유자가 분노에 휘둘릴수록 능력의 변화가 극심하게 나타난다.

힘, 민첩성, 체력 증가. 지능 하락. 유지 시간은 정신 상태의 변화에 기인하며 등락폭도 감정의 고저에 따른다.

***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창이 넘어갔다.

특기에 대한 추가 설명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다만 능력의 정확한 수치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로 게임의 그것과 같은 방식을 따르는 거라면 이를 만든 이는 꽤나 불편한 시스템을 선호하는 것이 분명했다.

"잠깐만……"

탕. 손으로 거울을 짚었다.

그리고 그곳에 비춰지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서준경. 내 얼굴이다. 초췌해져 있고 다크써클이 짙었지만 분명 마흔 다섯 해 동안 남이라 생각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로 내가 맞을까? 나는 서준경이지만 쿤 타이이기도 하다. 제국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등선으로 몸을 날렸고, 돌산에서 버려진 제단을 찾아 쓰러졌다.

그것 역시 나.

게임의 스텟창과 같이 적혀있는 글귀에서 보듯이 서준경(쿤 타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둘은 다르지만 같은 존재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내가 두 사람의 삶을 다 살았음이 분명하고, 지금 그것이 게임과 같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뒤섞이고 있음도 분명하다.

분노. 욕설. 과감한 움직임.

본래 이것은 나와 거리가 먼 것들이다. 나는 욕을 잘 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는 법도 없었다. 과감하게 무언가를 해 보는 것? 그럴 리 있겠는가. 아내에게 걸릴까 두려워서 비상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나다.

조금 전 보였던 행동은 나. 즉, 서준경과는 상당히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의 성격이 섞였다고……아니, 둘 다 나니까 결국 다 내 성격이라고 봐야겠지. 소심하고 조용한 것도 나. 과감하고 거친 것도 나."

잠시 생각해봤다.

이건 마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한 설명과 같지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단지 그것이 두드러졌을 뿐이다.

"정리하자……"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머리가 깔끔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서준경과 쿤 타이라는 두 인물의 삶을 살았다. 두 삶은 전혀 다르고, 둘은 성격과 가치관. 체격과 생김새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거울에서 보인 게임의 스텟창과 같은 것은 두 사람을 공통적으로 엮어주는 지표와 같다. 분노라는 것이 특기로 생성 되었을 때, 즉시 반영되는 것으로 보아 실시간으로 적용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서준경과 쿤 타이는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창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한 곳에 엮이고 있다. 이는 서로에게 공통된 영향을 미쳤다. 뒤섞인 성격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창에서 나온 육체의 능력 역시 공통되게 작용 할 확률이 높다.

"이 정도인가."

아직은 불명인 것이 많다.

특히 창 말미에 적힌 신성 포인트라는 단어는 매우 의심쩍다. 포인트라는 것은 획득 할 수 있는 점수. 하지만 그 앞에 신성이 붙는다면 조금은 인간의 것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신, 또는 악마. 지금의 상태가 초현실적인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면, 지금의 이 단어 역시 증명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특기 냉정한 사고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때, 또 다시 알림 음이 들려왔다 .

바로 거울을 살폈다. 역시나 예의 글자들 옆으로 '냉정한 사고'라는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확인을 할 겸 손으로 눌렀다.

***

냉정한 사고

다급한 상황에서 냉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지능에 영향을 받으며, 높은 수치를 보유 시 죽음조차 달관하여 사고가 가능하다. 사고 판단과 정보의 조합에도 영향을 준다.

***

이번에도 짤막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깨어난 뒤에 얻은 특기가 둘이다. 분노와 냉정한 사고. 둘 다 현재 상황에 적응하는 도중에 만들어졌다. 즉, 이건 어느 정도 예상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부정과 분노. 납득과 이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

"나쁘지는 않아."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서준경과 쿤타이. 그리고 이 게임과 같은 기묘한 현상. 해석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장 이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지금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건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가져다 준 공백의 괴로움뿐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냉정히 사고 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능력은 나쁘지 않다.

먹먹하던 슬픔이 타버린 재 마냥 가슴 한곳에 쌓여 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당면한 일부터 처리하자.”

생각이 조금 정리되니, 해야 할 것이 정해졌다.

쿤 타이와 게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내 상황에 대한 것부터 처리를 해야 한다.

난 2년 6개월이라는 공백 때문에 가족을 빼앗겼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있고, 딸은 날 쳐버린 놈팡이와 결혼을 했다. 막장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게다가 아내는 내가 딸아이와 떨어져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라 말을 한다. 이유도 웃긴다. 딸이 결혼한 쪽에서 나를 반기지 않을 테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

차로 친 것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다.

"확인해 봐야지. 나를 친 놈이 누구인지,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이지. 그리고 미소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떨어져 있으라고 떨어져 있을 수 있을까?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다. 이대로 멍하니 있을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할 것이다. 그것이 난장판을 만들지라도.

"회사도……알아 봐야겠지."

식물인간으로 있는 상태가 길어졌기 때문에, 회사에서 퇴직 처리를 했다.

법적으로 이게 옳은지도 좀 알아봐야 하고, 다시 취업 할 수 있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예금과 집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게 영원토록 갈리는 없으니까.

"그전에……"

다시 거울을 봤다.

여전히 꼴이 엉망이다. 대충 자른 수염은 철 수세미 같고, 푹 파인 볼은 영안실 시체와 비슷하다. 이런 꼴이라면 있던 희망도 날아갈 판이다.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서 나를 정돈시킬 필요가 있었다.

"핸드폰이랑 여러 가지 증명서들도 필요하고."

죽은 사람처럼 2년 6개월이다.

필요한 것은 굉장히 많았다.

"기죽지 말자."

스스로에게 말을 하며 거울을 툭 쳤다.

기분은 조금 나아져 있었다.

#

덜컹. 덜컹.

오랜만에 지하철에 올랐다.

전에 사용하던 차는 이미 팔고 없었다. 2010년형 SM3. 나름 애착이 가던 놈이었는데, 병원비에 보태지며 떠났다고 한다. 얼마 안 남은 예금과 24평 아파트 하나. 아내가 받고 떨어지라 말 한 것이 정말로 남은 재산의 전부였다.

관공소를 돌며 필요한 것들을 모두 신청해 두었다.

사고 당시 소실된 것들이 워낙 많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새로 발급을 받아야 했다. 주민등록증부터 시작해서 면허증까지.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증명서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핸드폰까지 하나 새로 구입해서 지하철에 오르니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퇴근길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얼마 전. 남들은 2년 6개월이라 말 하겠지만, 나는 고작 며칠 전의 기억이다. 나도 저들과 같았고, 그냥 비슷한 불평에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하지만 지금은 가정이 파탄 나고 딸은 빼앗겼다. 이 짧지만 커다란 간극에 괜히 속이 답답하고 쓰렸다.

"오, 대박! 이번에 또 게이트 발견했나봐."

"어디, 어디? 이번엔 어디에서 나타났는데?"

"와! 근처다! 삼곡아파트 위쪽에서 나왔데! 지금 군대랑 경찰이랑 잔뜩 몰려갔다고 하는데?"

그때, 옆에서 묘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게임인줄 알았는데 삼곡아파트라면 나도 아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조금 위쪽으로 가면 나오는 곳이 삼곡아파트니까.

슬쩍, 애들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훔쳐봤다.

"이번에도 방송팀 대동해서 가려나?"

"저번에도 그랬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아무 말 안 하고 군사작전으로 가면 또 앞에서 사람들 잔뜩 데모 할 거잖아."

"으, 꼰대들. 하여튼 뭐만 하면 데모야."

스마트폰 화면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반원 형태의 석재 구조물이었다.

어릴 적에 보았던 스타게이트라는 영화의 구조물과 흡사했다. 다만, 그것은 원형이었고 이건 반원형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고대 유물이라도 발견한 걸까?

하지만 군과 경찰이 몰려드는 거라면 단순한 고고학적 발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혹시 외계인? 내가 잠들어 있던 2년 반 동안 외계인이 등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곁눈질로 보다, 새로 산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조작이 어려워서 헤매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단어 정도는 찾아서 입력 할 수 있었다. 게이트. 굉장히 긴 학술적 명칭을 줄여서 표현하는 단어였다

구글을 검색해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게이트가 등장한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2년 6개월 전. 정확하게 내가 사고를 당한 시점과 일치했다.

“……”

우연?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정도로 공교로운 시간이 특정하기 어려운 사건에 겹친다는 건 확률적으로도 어렵다.

의혹을 남긴 채로 계속 정보를 살폈다.

게이트는 세계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 특이한 모양과 성질로 금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관련 기사도 수두룩했다.

일간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논문도 발표하여, 학회를 열고 있었다.

너무 많아 전부를 어떻게 보나 했는데 누군가 게이트의 특징을 잘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려 두었다. 각지에서 찍은 게이트의 사진과 설명.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연차순으로 적어 두었다. 보기도 편했고 이해하기에도 좋았다.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몇 가지를 나름대로 정리 할 수 있었다.

1. 게이트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으로 연결된 일종의 문이다.

2. 비 생명체는 자유롭게 게이트를 통과 할 수 있지만, 생명체는 그렇지 못하다. 특별한 소수의 인간만 ‘유체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게이트 너머의 세계로 이동 할 수 있다.

3. 유체화는 본래 인간이 가진 정보를 재해석해서 다른 세계에 걸 맞는 특정 생명체를 창조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 비교하자면 게임의 아바타를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유체화가 가능한 이는 최초 게이트에 접촉 시 상상하던 이미지를 본 따서 유체를 생성 할 수 있고, 이 유체는 다음 접촉 시 다시 활성화 된다.

4. 유체화는 극도로 높은 체력소모를 불러오며, 한 번 유체화를 한 사람은 최소 2주에서 최대 몇 달 까지 휴식을 취해야 한다.

5.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지구와 상당부분이 다르고, 적대적인 생명체도 다수 서식하고 있다. 반면, 고 가치의 물질들도 높은 밀도로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인 공략이 요구된다.

이 외에도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확인된 것들은 이게 전부였다.

특히 눈이 가는 것은 유체화라는 내용이다. 이건 내 상황과도 어느 정도는 연결이 되는 것으로 보였다. 나와 쿤이 개인과 유체의 관계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게이트가 발생하는 순간 최초로 그것에 접촉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체화된 쿤으로 긴 시간을 경험했고, 그것이 2년 6개월의 시간으로 나타난 것. 굳이 해석을 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건 많다.

일단 블로그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부분 중에 게임과 같은 수치를 가졌다는 내용은 없다. 게다가 내가 사고를 당했던 지점에는 게이트의 발생이 보고되지 않았다. 가정이 맞다 아니다 할 정도의 정보 자체가 부족했다.

“와! 서율 누님 이번에도 게이트로 가나?”

“대박! 갔다 온지 한 달도 안 되지 않았어?”

“캬~역시 매스컴이 무섭네. 하도 닦달하니까 우리 서율 누님이 총대 맨 거 아니겠냐? 그래도 이미지가 가장 좋은 게 누님이니까 최대한 돌리는 거지.”

“으……더럽다. 차라리 멍청한 유태혼가 하는 그 새끼나 보내지.”

그때,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게이트를 얘기하던 학생들이다. 인터넷 뉴스의 다른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게이트 발현과 그 대처. 특수부대 ‘김서율’ 투입. 길고 지루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사진……

김서율.

내가 미스 김이라 부르던 여성이 그곳에 떡하니 찍혀 있었다.

※작가의 말

아, 알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여기까지!!

내일 또 찾아올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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