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4화 (4/240)

의사와 간호사들이 떼로 몰려왔다.

피를 뽑고 이런 저런 검사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이상한 병원인가 하는 오해를 잠시 했었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난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다고 한다.

2년하고 6개월.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뒤에 흐른 시간이었다. 지독한 농담이라 생각하며 달력을 뒤지고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흘러간 시간은 너무나 분명했다.

기억나는 마지막 모습은 미스 김을 당기고 난 뒤 달려오는 스포츠카와 맞닥뜨리는 장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용기가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다 늙어서 백마 탄 기사가 될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그렇게 머리가 정리가 되고 나자, 의사가 가족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었다.

주소와 번호 등이 예전 것과는 달라져 있었다.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 입원비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나왔을 터. 그 때문에 집을 옮긴 건가 싶었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매일같이 듣던 목소리다. 2년 6개월 동안이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니 어쩐지 조금은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울컥하며 올라오는 게 있었다. 가장이 갑자기 쓰러졌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여보……나야.”

“네? 누구시죠?”

“나야, 나라고. 준경. 서준경이. 지금 병원에서 전화하는 중이야.”

“……”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흐느끼고 있을까. 괜히 코끝이 찡했다. 침대 맡에 놓인 휴지를 끊어서 눈가를 살짝 닦아냈다.

“……지금 갈게.”

“아, 그리고 미소한테도……”

뚝.

미소 번호는 남아있지 않았기에 연락을 하라고 말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전화가 그대로 끊겼다. 조금은 이상한 느낌.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2년 6개월이나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사람이 깨어났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 때문에 당황했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었다.

피를 빼 가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기는 했지만 일단 이상은 없다고 한다. 식물인간으로 있었던 기간이 길어서 몸이 약해진 점을 제외하고는 완벽히 정상이었다. 사실 사고가 나고 긴 시간동안 누워 있었다는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그냥 요상한 일. 쿤 타이와 관련된 것들만 신경을 거스를 뿐 사고 자체는 그냥 남 일 같았다.

“……”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자 하나 둘 씩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2년 6개월이라. 회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를 친 사람은 잡았을까? 보상은? 그 전에 대출금은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나? 병원비는 장인어른이 도와주신건가?

떠오르기 시작한 의문은 범람한 개울마냥 멈출 줄을 몰랐다.

괜찮은 거지?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2년 6개월이다. 내가 느끼는 건 어제와 같은 선명함이지만 흐른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머리가 하얗고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덜컹—!!

생각이 몸속으로 파고들어 갈 때 쯤, 병실 문이 열렸다.

고급 모피로 몸을 치장한 아내가 그곳에 있었다.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체감이 됐다. 예전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화장도, 표정도. 심지어 몸가짐 까지도.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서 내 앞에 섰다.

“여보……?”

아무런 말이 없다.

이상한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오랫동안 병원에 있던 사람을 만났다면 기본적으로 찾아야 하는 건 반가움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보이는 건 귀찮음과 불편함. 그리고 약간의 동정이었다.

“일어났네.”

그러다가 그녀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너무 무미건조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거 같았다.

“왜 일어났어.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좋잖아.”

“……무슨 소리야? 왜 그런 말을 해?”

“당신은 그 동안 편히 누워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랑 미소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 언저리로 땀이 흘렀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에도 아내에게 당당한 타입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내가 너무 낯설었다. 차라리 타인도 이보다는 나을 거 같았다. 차가운 눈빛과 차가운 말투는 가슴을 시리게 했다.

“후……그래. 그래도 들려는 줘야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간이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는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예전에는 섹시하다고 칭찬을 해 주던 자세다. 하지만 지금은 보기가 싫다. 모르는 여자가 앞에 와서 앉아 있는 거 같았다.

“당신이 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게 2년하고 6개월 전이야. 치료비와 병원비는 그렇다 쳐도, 앞으로 살아 갈 길이 막막했어. 당신이 누워있는 마당에 대출금에 애 학비는 어떻게 하라고? 우리끼리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 그 사람은? 사고를 낸 놈이 있을 거 아니야? 보험금은 안 나왔어?”

“나왔어. 하지만 그걸로 다 해결이 될 거 같아? 소송도 진행을 해야 하고 생활비에 들어갈 돈은 한도끝도 없다고."

“그럼 어떻게 지금까지 있었던 건데? 합의를 한 거야? 이 병원비는 누가 내 주는 거고?”

“당신을 친 남자.”

“……뭐?”

“지금은 미소 남편이야.”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미소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아니, 2년이 넘게 지났으니 스물 한 살이겠지. 그렇게 어린 애가 결혼이라니? 이해를 못한 고개만 비스듬하게 넘어갔다.

“당신 친 남자가 L그룹 사장 아들이었어. 아주 발칵 뒤집어져서는 우리 집에 찾아 왔더라고. 돈으로 입 틀어막겠다는 거였어. 처음에는 나도 거절했지. 자문을 구한 변호사가 소송하면 이길 수 있다더라. 근데 조금 지나니까 사정이 바뀌던데? 술 취한 행인이 도로로 뛰어 든 게 됐어. 소송으로 끌고가면 아주 지저분해 질 거라고 경고하더라."

“그, 그래서! 근데 왜 갑자기 미소 남편이라는 말이 나와!?”

“그쪽에서 제안했어. 망나니 같은 아들놈이 미소한테 반했데. 치료비랑 병원비 전액. 보상금도 지급해 주고, 앞으로 미소 학비와 생활비도 지원을 해 준데. 무조건 다 해 줄 테니까 결혼시키자고 하더라.”

“그걸 받아 들였다고!? 그 놈이 어떤 놈 인줄 알고!? 아니, 사람을 친 놈이잖아! 어떻게 그딴 놈한테 미소를 덜컥 줄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하라고!! 당신은 없고, 우리끼리 버텨야 하는데! 내가 뭘 어쩌기를 원했어? 계속 정의를 주장하면서 버텼어야 한다고 봐!?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건데!?”

입에 아교라도 발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없던 건 나다. 사고를 당한 것도 나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거 같았다.

“후우……어쨌든 그렇게 미소는 그놈이랑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 덕분에 병원비다 뭐다 걱정 할 필요 없었으니 다행이지 뭐.”

“……”

“그런 얼굴하지 마. 미소도 생각해서 결정한 거니까. 결혼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소송이다 뭐다 하며 골치 아팠을 거고, 학교도 휴학해서 아르바이트나 전전했어야 했을 거야. 지금은 제대로 학교도 다니고 있으니까 훨씬 잘 된 일이잖아.”

“그놈은? 그놈은 미소한테 어떻게 하고 있는데?”

“무슨 삼류 드라마 생각하나본데 그런 일 없어. 그놈도 정신 차리고 미소한테 잘 해주고 있어. 남편만 신경 쓰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잘 지낸다고.”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감정적으로 이것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피해자다. 사고를 당한 것뿐이다. 하지만 아내는 나를 마치 가해자처럼 몰아붙이고 있다. 내가 사고를 당한 것 때문에 돈에 시달려야 했고, 미소가 억지 결혼을 해야 했다고 말 하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동시에 슬펐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가 싶었다.

죽어라 고생하며 가족을 부양해 온 결과가.

“하여튼 그렇게 알고 우리한테서 떨어져 있어.”

“……뭐?”

“미소 남편 쪽 가족들이 당신을 불편해 해. 아무래도 당신이 피해자니까, 꺼리는 거겠지. 그러니까 괜히 가족이다 뭐다 하면서 들러붙지 말라고. 전에 쓰던 집이랑 보상금 남은 잔고는 전부 넘겨 줄 테니까, 그냥 그대로 갈 길 가줘.”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딜 가!? 난 당신 남편이야. 미소 아빠라고!”

“알아. 아니까 말 하는 거야. 당신이 곁에 있으면 그쪽 집안이 싫어한다고. 그래서 미소가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정말로 미소를 생각한다면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시간처럼 없는 사람이 되어 줘.”

숨이 턱하고 막혔다.

아내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하고 억척스러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잔정이 있고, 사람 챙길 줄 아는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옷, 화장, 표정, 몸가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대체 누구일까 이 여자는……

“그리고 며칠 내에 이혼서류도 보낼게. 2년 6개월이면 충분해. 이제는 나도 깔끔하게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

“그럼 알아들은 걸로 생각할게. 우리,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 해 줘. 그게 서로한테 좋을 테니까.”

끼익……

아내가 그대로 등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멋들어진 코트와 머플러는 멀어지는 아내의 모습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속이 다시 메스꺼워졌다.

#

며칠 뒤에 퇴원했다.

오랜 병원 생활에도 멀쩡히 움직이는 내 모습에 병원 사람들은 신기해 했지만, 그들을 상대 해 줄 마음은 없었다. 모두 뿌리 친 채 그대로 수속을 밟았다.

작성해야 할 서류는 간단했다.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 동안 알아보니 회사에서는 이미 퇴직 처리 돼 있었다. 퇴직금은 치료비로 다 나간 상황. 그 과정이 너무 짧고 간단해서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름대로 젊음을 다 받친 회사였는데, 남은 건 한 줄의 글귀가 전부였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바닥이 찼다.

사람이 안 산 흔적이 역력했다. 창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청소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미칠 거 같았다.

쓸고 닦고 오래 묶은 때를 벗기고 나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손과 발이 다 후들거렸다. 그대로 거실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벽에는 걸린 가족사진에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표정은 어색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

집이 너무 넓어 보였다.

예전에 세 식구 살 때는 언제 넓은 곳으로 이사 가냐며 타박받기가 일쑤였는데. 오래된 냉장고와 낡은 식탁. 둘러 앉아 밥 먹던 모습도 떠올랐다.

“시팔……”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나는 그저 차에 치였을 뿐이다. 남을 돕다가 그런 게 죄라면 죄인가? 아니면 그대로 죽지 못한 게 잘못인가? 대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저질렀기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납득이 안 갔다.

- 정말로 미소를 생각한다면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시간처럼 없는 사람이 되어 줘.

아내가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없던 사람. 그래, 그녀는 내가 없던 사람이 돼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미소가 행복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자식새끼 키운다고 죽을 똥 살 똥 고생 한 건 나다. 흔한 휴가조차 가지 못하고 야근에 회식에. 아주 찌들어 가면서 살아 온 게 바로 나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그게 왜 미소를 행복하게 하는 걸까?

“좆까 시팔……!”

갑자기 분이 확하고 올라왔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열이 올라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당황과 슬픔. 박탈의 과정이 끝나고 나니 이제야 정상적인 분노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이런 대우를 받아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한 아이의 아빠다.

L그룹? 좆까라 그래. 지들이 뭔데 날 싫어하고 말고야.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어차피 직장에서도 잘린 몸.

이제 와서 무서울 게 뭐 있을까!

[특기 분노(Fury)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때, 이상한 알람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작가의 말

조, 조금 더 올려야겠죠?

그동안 쉰 것도 있고..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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