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3화 (3/240)

쿤 타이는 빗물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진흙과 피딱지가 엉겨 붙어서 잘 되지 않았다. 단검을 뽑아 들어 끝을 잘라내고 나서야 간신히 움직이기 편한 머리가 되었다. 쓴 단검을 잘 닦아 허리춤에 다시 꼽아 두었다.

후둑 후둑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능선을 바라봤다.

‘아직도 인가.’

제국의 추격대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흘린 피 냄새를 사냥개에게 맡게 한 채 하루하고 반나절을 쫓아오고 있다. 천에 몸을 담그고, 소똥을 몸에 발라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체력은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다.

흘린 피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찢겨진 어깨를 헝겊으로 동여매기는 했지만 내리는 빗물에 벌어지는 상처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컹!! 컹컹컹!!!!

능선 위쪽에서 들려오는 사냥개의 울음소리에 쿤 타이가 몸을 숙였다.

차게 식은 몸이 더욱 움츠려 드는 걸 느꼈다. 달갑지 않은 기분이다. 쫒기는 것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의뢰 때문에.’

내용은 간단했다.

편지 하나만 건네면 그만인 일이다. 소인은 한센 상단의 것이었고, 받을 인물도 같은 상단의 늙은이였다. 오래전에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니 안부를 물을 겸 해서 편지를 전한다는 내용. 어디에도 위험성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편지는 반 제국 연합의 밀서였고, 이를 받아야 할 인물은 간부급 인사였다. 포위를 좁혀오던 제국군 감찰대에 덜컥 걸리게 됐다. 늙은이는 자리에서 목이 베였고 쿤은 간신히 몸을 빼 지금까지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재수가 없으려고 작정해도 이렇게 없기는 힘들었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고는 진흙을 얼굴에 발랐다. 제국 사냥개의 후각을 완전히 속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은 벌어 줄 것이다.

컹컹컹!!!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완만히 돌면서 천천히 목표를 조여 오는 방식이다. 도망 갈 작은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밀서 얻고 늙은이 목 베었으면 그냥 갈 것이지. 쿤은 짜증나는 상황에 이를 바득 갈았다.

스……

그때, 뒷목이 서늘해졌다.

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대가 작은 화살이 하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국 정찰대가 사용하는 아기살이다. 작고 빠르게 날아오기 때문에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추가 공격을 예상하고 바닥을 몇 차례 굴렀다.

타다다닥.

연이어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컹컹 거리며 돌던 사냥개와 상관없이 조여오던 정찰대가 그를 발견한 것이다.

“찾았다!!”

“놈을 잡아라!”

능선을 타고 가죽 갑옷에 폭이 좁은 단검을 든 정찰대가 달려왔다. 날렵하기가 이를 대 없는 놈들이다. 평지라면 모를까, 비 오는 산지에서 맞서 싸운다면 악몽과 다를 바 없다. 더군다나 부상당한 몸으로. ‘뒈지겠군.’ 쿤이 잇소리를 내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챙. 가강 가까이 붙은 남자와 쿤의 단검이 충돌했다. 경사를 타고 뛰어 내리듯 돌진한 거라 힘이 대단했다. 전부 이기지 못하고 빗면을 틀어서 상대를 밀쳐냈다.

칙. 그새 다른 놈이 하나 더 다가와 있었다.

허벅지가 길게 베여서 피물을 토해냈다. 내리는 비에 섞여서 뭉클뭉클 흘러내렸다.

“지긋지긋한 것들……!”

쿤이 한 놈을 밀고, 옆으로 접근하는 자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았다.

‘억!’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어째 제국 정찰병 놈들은 다 비슷하게 생긴 거 같다. 목에 깊이 단검을 쑤셔 박은 뒤 옆으로 그었다. 뼈와 울대가 밖으로 드러났다.

“네놈이!!”

동료의 죽음이 분노를 불러왔다.

처음 검을 맞댔던 남자가 풀쩍 뛰며 달려왔다. 비에 젖은 능선을 움직이면서도 기민하기가 마치 표범과 같다. 감히 맞설 생각은 하지 못하고 몸을 뉘이며 능선 경사로 쭉 미끄러졌다. 비가 와서 잘도 미끄러졌다.

“어딜 도망가느냐!!”

이번에는 허벅지를 베었던 놈이다.

비슷하게 능선을 타고 달려와서는 단검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맞으면 그냥 죽겠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멀쩡한 왼손으로 검을 틀어막고는 진흙은 입으로 머금어 뱉어냈다. 걸쭉한 흙탕물이 남자의 얼굴로 쏟아졌다.

‘익!’ 하며 잠시 버둥거렸다.

능숙한 정찰대라도 눈 감고 숲에서 달리라고는 안 할 테지. 냉큼 거리를 좁혀서 낭심을 손으로 후려쳤다. 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중심이 무너졌다. 그걸 맞고 버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무방비로 놓인 목에 단검을 다시 꽂아 넣었다. 그르륵 거리며 쓰러졌다.

“둘이 당했다!!”

“조심해서 접근을 해라!!”

“사냥개를 먼저 풀어!”

저항이 강하자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쿤이 셔츠를 찢어 뻥 뚫린 왼손을 동여매고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뿐이다. 포위망에서 도망 갈 수 있는 찬스라면 상대가 당황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뿐. 이대로 시간을 끌면서 대치해 봐야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

“도망친다!! 잡아!”

가장 헐거워 보이는 곳.

망설임 없이 달렸다.

#

“하아……하아.”

쿤이 숨을 헐떡이며 바위틈에 몸을 기댔다.

능선을 타고 내려온 산길 아래쪽에 지형이 험한 협곡지대가 있었다. 마법사들이 싸우기라도 한 건지 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숨기가 어려운 장소겠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것이 나았다. 돌산에서 풍기는 짙은 유황 냄새가 사냥개의 후각을 교란시켜 줄 테니까.

“여기서 뒈지기는 싫은데.”

의식이 당장이라도 나갈 듯 깜빡거렸다.

혼잣말을 해서 간신히 이를 부여잡았다. 불어터진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배어나왔고, 바닥난 체력은 이제 정말로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포위를 벗어난다해도 살아 날 가망성이 없었다.

‘쉴 곳이 필요해.’

따라잡힌다고 해도 이제는 그것이 더욱 우선이었다.

벌벌 떨리는 다리를 밀어 올려 돌산을 타 내려갔다. 유황 냄새가 짙어 질수록 온기가 올라왔다. 어쩌면 아래쪽에 온천이 있는 게 아닐까. 비 맞아 떨어진 체온을 생각하면 그 온기가 너무나 절실했다.

“……동굴?”

그렇게 내려오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뿌연 연기가 흘러나오는 동굴을 하나 발견 할 수 있었다. 온천은 아니었다. 썩은 달걀 냄새가 나는 유부의 구덩이 같은 동굴이었다. 험하게 살아온 쿤 조차 함부로 들어 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음산했다.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쿤이 그대로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마다 유황 냄새가 짙어졌다. 호흡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동굴이라면 몸을 숨기고 휴식을 취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안쪽으로 가스가 닿지 않는 쪽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하지만 동굴 안에서 그가 본 건 오래 된 제단이었다.

반쯤 부서진 동상이 있고 그 앞으로 돌 받침대와 말라붙은 과일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는 누군가 기도를 드리러 왔을지도 모르겠다. 대륙 곳곳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제국의 통일 정책으로 유일신이 자리 잡고 난 뒤로는 박해를 받아 대부분 부서지고 폐쇄됐다. 그나마 이 정도면 온전한 모습이었다.

‘좆같은 제국 놈들 좀 싹 다 죽여 달라고 빌면 됩니까?’

쿤이 제단 앞에 주저앉아서는 입술을 달싹였다.

앞서 바랐던 것과는 달리 제단이 있는 곳도 유황 가스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 이상 갈 힘은 없고 다리가 그대로 풀려버린 것이다.

‘아 썅. 인생 한 번 거지같네.’

그렇게 제단에 기댄 채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

“헉!!!”

쿤. 아니, 나는 숨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렸다.

속이 매스꺼워 뒤집어 지는 거 같았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처음 보는 장소지만 대충 둘러보니 한 군데가 있었다. 곧바로 변기를 열고는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냈다.

“우웨에에엑!!!”

한참동안 토했다.

물이 주르륵 나오고, 노란 위액이 뒤를 따라왔다. 다른 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컥컥 거리며 괴로워했다. 뭐라도 뱉어내야 토한 기분이라도 나는 법이니까.

“하아.”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입을 슥 닦고 화장실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쭉 빠진 볼 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분명 매일같이 면도를 하는데 수염이 웬 말이란 말인가. 게다가 얼굴이 너무 말라 있었다. 좋은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당히 살집은 항상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니, 그 전에.

***

이름 : 서준경 / 쿤 타이(Lv1) 종족 : 인간

힘 : 12 민첩성 : 10

체력 : 15 지능 : 12

스킬 : None

특기 : 하급 생명력, 하급 단검술

신성 포인트 : 50

***

대체 이건 뭐란 말이야.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거울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글자들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의 낙서인가 싶어 손으로 뽀득뽀득 밀어 보았지만 오히려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스텟창. 그것도 꽤 오래전에 하던 고전 알피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요즘은 워낙 특성도 많고 칭호니 아바타니 뭐다 해서 창이 복잡했으니까.

“서준경. 그리고 쿤 타이.”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보았다.

쿤 타이는 조금 전까지 꿈꾸던 인물의 이름이다. 아주 생생하고 선명한 꿈. 하지만 그걸 꿈이라 부를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한 순간, 한 장면으로 쿤 타이라는 인물을 꿈꾸고 온 게 아니니까.

나는 그가 태어난 마을을 알고 있다.

어릴 적 짝사랑하던 로즈 누나의 얼굴도 기억한다. 매일같이 사냥을 가자며 꼬드기던 주근깨 많은 이웃집 파올도 선명하다. 빵 굽던 냄새와 밀알이 바람에 흩날리던 모습. 희게 웃던 아버지와 잔소리 하던 어머니.

모든 것이 생생했다.

나는 쿤 타이의 꿈을 꾼 게 아니다. 나는 쿤 타이었고, 그의 삶은 지금도 내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럼 서준경은?

그가 꿈인가?

복잡했다.

어지러웠다.

다시 속이 매스꺼워졌다.

“헉! 415호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호복을 입은 여자. 그러니까 간호사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뭐가 대체 그렇게 놀라운 것일까.

손을 크게 흔들며 한 쪽을 가리키고 있다.

조금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대충 방향 정도는 읽은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작가의 말

얼마나 올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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