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2화 (2/240)

나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5.25인치 디스켓에 담긴 영문판 삼국지부터 국민적인 게임이 된 스타크레프트까지.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RPG면 RPG. 액션이면 액션. 시물레이션이면 시뮬레이션. 나오는 족족 독파하여 게임 덕후의 이름을 드높였다.

동네에서도 신작 게임이 나왔다 하면 일단 나한테 달려왔다.

386컴퓨터를 앞에 두고 플라스틱 통에 담아온 디스크들을 하나씩 집어 넣을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왕처럼 모셨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나도 조금씩 게임과 거리를 두게 됐다.

수능을 보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다. 일에 치이고 술에 찌들어 게임은 엄두에도 못 냈다. 얼떨결에 만난 동료와 결혼도 했다. 분유 값 벌고 가족모임에 불려 다니다 보니 최근 나온 게임이 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 분유 값도 모자란 판에 무슨 게임을 사!]

어느 날 아내에게 물었더니 저렇게 호통을 쳤다.

그래, 맞는 말이다. 세금은 늘고 물가는 오르니 가계는 점차 빡빡해졌다. 박봉으로는 집 장만이며 아이들 교육비까지 감당 할 수가 없었다. 게임은 무슨. 쉬는 것조차 사치였다.

억울했지만 참았다.

나만 그러겠냐. 동창 진구도 마누라 등쌀에 소주잔 붙잡고 울기를 수차례고, 같이 게임하며 일대를 평정했던 석구도 이제는 눈이 어지러워 게임 화면은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다 그렇게 흘러가는 모양이다.

어릴 적 좋아하던 것들은 추억으로 남기고, 기억의 다락방에 조용히 묻어두는 것.

하지만……

멀어져 간 거리만큼 깊은 그리움이 쌓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옛 향취에 빠져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처럼 컨트롤러를 잡고 밤을 새고 싶었다.

들개에 죽던 캐릭터가 목검을 하나 주워 승리를 하였을 때의 기쁨. 조작법이 서툴러 얻어맞기만 하던 내 캐릭터가 콤보를 배워 상대를 무찔러 버렸을 때의 즐거움.

그리고 알지 못하는 미지에 몸을 던져 동료와 함께 탐험을 떠나는 그 짜릿함.

왜 지금은 그것을 누릴 수 없을까.

왜 지금은 그 즐거움을 찾지 못할까.

오래 된 게임기의 먼지를 닦아내며 괜히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 보았다.

#

“준경 씨이~! 오늘도 먼저 가쁠라 치면, 내 여서 콱 받아 버릴 줄 알그라요!”

얼큰하게 얼굴이 달아오른 윤이사가 넥타이를 머리에 맨 채 말했다.

혀는 꼬부라져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고, 다리는 풀려서 호랑나비 춤을 추고 있다.

지랄이다. 만날 저 짓 하다 먼저 개 돼서 실려 나가는 게 누군데. 끝까지 남아서 뒷정리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천불이 나는 소리다.

“헤헤.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이 서 준경이, 이사님이 주시는 술잔이라면 천 잔도 끄떡 없심더!”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딸랑거리는 아부뿐이다.

어쩌겠는가, 인사권을 콱 쥐고 있는 게 눈앞의 윤이사인데. 이번에도 승진목록에서 누락되면 마누라가 이혼 서류 내민다고 으름장을 놨으니 떫어도 삼켜야 한다.

“캬하하하! 그래, 그렇지. 우리 준경 씨이가 이래 봐도 남자 아이가? 그렇지 애들아?”

“어머, 어머. 그럼요. 서 과장님이 남자 아니면 누가 남자겠어요?”

“호호호. 호남 두 분이 모이셨네?”

“호남 둘? 크하하하! 그래, 그렇지! 우리가 호남 아인가!?”

트림을 꺽 하며 어깨동무를 해 왔다.

불쾌하지만 어쩌겠는가. 같이 어깨를 둘러주고 으쌰으쌰를 했다. 마담 손짓에 불려온 젊은 아가씨들이 옆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흥을 돋웠다.

남자로서 나쁜 분위기는 아니지만, 내게는 똥밭에 둘러싸인 것과 같았다.

슬픈 이야기지만 나는 발기불능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첫째 애를 낳고 나서 부터는 밤일을 하러 들어가도 도통 서지가 않았다. 비아그라도 먹어보고 병원 가서 치료도 받아 봤지만 결국 무리. 어차피 새색시 등잔불 꺼 주며 호탕하게 바지 까는 나이는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팍팍하게 돌아가는 인생에 그것까지 스트레스 받으면 정말로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꺼억. 자자, 가자고! 오늘은 내가 쏜다! 4차, 5차, 6차로 돌격!”

“호호호호. 돌격~!”

그러니 못 먹는 감들을 찔러보기 보다는 호탕하게 외치는 윤 장군님 옆에서 부관이 되는 것이 최선이다.

“돌격!!”

언제 시켰는지 모를 닭다리를 들고 거창하게 외쳤다.

#

“잘 좀 부탁합니다.”

탁. 택시 문이 닫혔다.

지랄 발광에 삼거리 스트립쇼 하는 윤이사를 겨우 잠재워서 집에 보내는 참이다. 왜 잡냐고 빽빽 거리기는 했지만, 이쯤에서 진정시키지 않으면 다음날 와서 왜 말리지 않았냐고 타박이다.

차라리 머리털 몇 개 좀 빠지게 두고, 보내는 것이 낫다.

“수고하셨어요. 항상 과장님이 고생하시는 거 같네요.”

“아, 미스 김.”

상큼한 사과향이 코끝을 스쳐갔다.

얼마 전에 발령 돼 들어온 김서율이라는 여자다. 단아한 얼굴에 도회적인 몸매를 지니고 있어서 사내에서도 인기가 만점이다. 하지만 말단 부서 뺑뺑이 도는 것이 경영 수업을 한다는 얘기도 있어, 딱히 직접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나야 뭐 어차피 그림의 떡.

앙칼진 노처녀나, 머리에 똥만 든 아줌마들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 할 뿐이다.

“자, 이거 드세요.”

뜨거운 커피가 손에 들어왔다.

참 기분 좋아지는 포인트를 잘 아는 여자다.

으슬으슬하던 몸에 뜨거운 커피가 들어가자 몸이 푹 하고 퍼졌다. 그래도 이렇게 마실 수 있어서 산다고 해야 할까. 작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라도 없다면 참 살기 힘든 세상이다.

“과장님은 참 부지런하세요. 이런 건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시켜도 되는데.”

“휴우. 차라리 내가 고생하는 게 나아. 윤이사가 좀 괴팍해야지. 그래도 굴러먹던 통빡이 있는 내가 비벼야 분위기라도 맞추지, 괜히 아래애들 시켜 버리면 사단만 나.”

“후후. 그런 게 부지런하다고 하는 거죠.”

부드러운 미소에 쌓인 퇴적층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생각해 보면 부럽다. 어떤 잘난 놈이 저 참한 아가씨를 채가게 될 지.

아마 멋들어진 외모에 훤칠한 키. 벤츠 정도는 옵션으로 끌고 다니는 재벌 2세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킥. 가끔 과장님은 그렇게 멍 하니 있을 때가 있더라. 무슨 생각 했어요?”

“아,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뭐 대수롭지 않은 거. 그보다 미스 김은 안 들어가? 다들 흩어지는 분위기인데.”

“에이. 왜, 저랑 있기 싫어요? 난 과장님이 아빠 같고 삼촌 같고 그래서 편한데.”

같은 여자라고해도, 룸에서 탬버린 치던 여자와 미스 김과는 느낌이 다르다.

여자가 꽃을 닮아 향기를 풍긴다고 할 때의 느낌이라 해야 할까. 한 마디를 뱉고, 작게 고개를 기울이는 동작에도 도화꽃 냄새가 퍼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헤프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보통의 여자보다 강단도 세고, 배짱도 두둑하다.

룸으로 회식 들어가는데, 맨 정신으로 따라 올 정도니까.

“하이고. 나 같은 늙은이가 무슨 재미가 있다고.”

“에이, 그래도 뭔가 공통점이 있지 않겠어요? 자자, 말 해 보세요. 평소에 즐기는 취미 같은 건 없어요?”

“취미라……”

문득 옛적에 즐기던 게임이 생각났다.

하지만 입 밖으로 뱉기는 어려웠다. 생각해보라. 나이 마흔 넘은 늙다리가 게임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으음~낚시?”

말이 없자 하나를 짚어 보았다.

“낚시는 무슨. 지루해서 싫다.”

“에이, 그럼 독서? 아니다. 그건 안 어울리네요. 의외로 꽃꽂이?”

바둑, 축구, 스카이다이빙.

그녀는 지루하지도 않은 듯 온갖 취미들을 늘어놓았다.

이쯤 되니 미안해진다.

사실 별것도 아닌 내용 아니던가. 지금 당장 취미라 할 것은 없고, 그냥 예전에 좋아하던 게임이 떠오른 것뿐이니까. 잠시 생각하다 지나가는 투로 말을 했다.

“그냥 뭐……게임이라면 좋아하려나.”

“어? 게임이요? 무슨 게임?”

“뭐……요즘 건 잘 모르고 그냥 예전 게임 정도. 미스 김 같이 젊은 아가씨가 알 만 한 것들이 아니야.”

“와, 무슨 소리를! 저 게임 완전 좋아해요! 그것도 고전 게임! 완전 마니아라니까요?”

의외였다.

하지만 눈까지 반짝이며 말 하는 그녀에게서 거짓을 읽기는 힘들었다.

삼국지, 동키콩, 캐딜락 등. 정말로 그녀는 막힘없이 자기가 잘 한다는 게임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비밀 스테이지나 공략법 등도 알고 있는 게 아니던가.

“세상에! 그런 건 전부 어떻게 알고 했데?”

“헤헤. 아버지 따라 어릴 적부터 종종 했었거든요. 와……과장님이 게임을 좋아했다니. 진짜 의외네요.”

“하하. 좀 이상하지?”

“아뇨, 아뇨.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데요? 다른 사람들처럼 이상한 취미를 가지는 것보다야 훨씬 낫죠 뭐.”

술 먹고 여자 후리거나, 도박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긴 하다.

젊고 예쁜 미스 김이 그리 말을 해 주니 괜히 더 좋게 들린다. 괜히 어깨가 올라가는 느낌.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는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아! 그럼 우리 나중에 같이 게임 한 번 해요.”

그러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글 돌며 말을 했다.

머리카락이 크게 풀어져 꽃향기를 흘렸다.

늙은 나이에 물건조차 서지 않는 몸임에도 심장이 거하게 뛰었다.

주책없기는.

“게임을? 어디서?”

“제가 잘 아는 곳이 있어요. 고전 게임만 딱 모아놓고 즐길 수 있는 곳인데 분위기가 아주 좋아요. 과장님한테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런 곳이 있어?”

“그럼요. 예전에 게임을 좋아하다, 지금에는 눈치 때문에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동병상련이라.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이 찾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리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미스 김을 보고 반응하던 것보다 더하다. 이놈이 미쳤나 싶다.

작은 스틱과 힘껏 누르던 손가락.

하나하나 넘어 갈 때마다 느껴지던 그 성취감이 등줄기를 타고 되살아났다.

“좋죠? 좋죠? 그럼 약속 한 거예요?”

그녀가 약속을 바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평소 단아하던 모습에 비해 조금은 들떠 보인다. 그녀도 같은 취미의 동료가 생겨 기쁜 듯싶다. 늙은 내가 옆에 있어 폐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히 웃는 얼굴이다.

“앗!”

그러다 그녀가 살짝 발을 삐끗했다.

조절했다지만 술을 꽤나 마셨을 것이다. 한참동안 앉아있다 일어나 빙글빙글 돌았으니 그것도 꽤나 힘들었을 것이고……

빠아아앙—!!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휘청거리던 그녀의 몸이 도로변으로 쓸려갔다.

새벽 두 시. 늦은 밤의 폭주를 즐기는 스포츠카가 그녀가 있는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대로 있으면 차에 치일지도 모른다.

“위험해!”

난 본래 그렇게 용감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디서 그리 용기가 났는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꺄아악!!”

확 잡아당기는 손길에 미스 김이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내 몸은 당연한 물리 법칙에 입각하여 당긴 반대 방향으로 이동되었다.

차선과 검은 아스팔트.

그리고 라이트를 새하얗게 올려 킨 스포츠카의 모습이 망막을 가득 메웠다.

콰쾅—!!!

둔탁한 충돌 음.

그리고 어슴푸레 들려오는 비명 소리.

그것을 끝으로 의식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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