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245화 (245/249)

#245

다시(4)

어둠 속에서부터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

낯선 자의 등장으로 인해 달란트의 몸에서 흘러 나오던 기운이 멈춰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허...

깜짝 놀란 표정.

놀랄 수 밖에 없다.

달란트의 눈앞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

그는 과거의 체스.

바로 자신의 아이.

그리고 걸어오는 자도 현재의 체스.

그 또한 자신의 아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어째서 이 둘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지?

자신의 커다란 머리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 당황했으려나? 우리는 둘이자 하나야."

기세 좋게 멈추라는 말과는 다르게 현재의 체스는 싱글벙글이었다.

"네 녀석이..."

말 끝을 흐리는 달란트.

그의 모습이 자못 재미있다는 듯 현재의 체스의 입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 모습이면 좀 헷갈리겠지? 자신의 아이도 있고 또 자신의 아이도 있으니 말이야."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을 쓰윽 만지는 그.

사라라라-

흩어지듯 흩어져가는 그의 신체.

그리고 달란트의 눈에 남은 건 현재의 체스가 아닌 열쇠의 모습이었다.

"이러면 좀 금방 알겠지?"

"...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지...?"

이를 콰득 깨문 채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달란트.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단 세 명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다.

"무슨 짓이라... 난 별로 뭘 하거나 한 적이 없는 걸?"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열쇠가 자신의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이렇게 따지고 달려드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저 분기에 가득 찬 모습.

실소가 흘러 나온다.

어차피 최종 선택은 체스가 한 것이거늘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는지 원.

그렇다면 이해를 좀 시켜줘야지.

이런 우매한 족속들은 좀 확실히 귀에 박히게 설명을 해줘야 이해를 하는 스타일이니.

잠시 과거의 체스를 향해 시선을 가져가던 열쇠.

하지만 그 시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신 다시 달란트를 향한 시선.

"내가 이 이아의 과거를 샅샅이 훑어봤지. 솔직히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당신의 영향도 꽤나 컸어."

"...그게 무슨 말...?"

"말 그대로야. 너. 쉽게 이야기하면 아이를 버렸잖아. 죽은 마누라도 두고 그저 빚만 지우고 도망치다시피 했잖아. 안 그래?"

"아...아니 그거...ㄴ..."

"다 알아. 내가 모르는 건 없어. 이 환수계에서 인간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아는데 하물며 나와 함께 있는 이 아이의 기억도 모를까봐? 넌 쓰레기야."

"아니다. 비록 내가 그렇게 행동을 하긴 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돌아."

"뭔 헛소리야? 지금 돌아온다한들 이 아이가 입었던 상처는 치유가 되겠어? 혼자 남겨진 아이였다고. 아니지. 버. 려. 진 아이였지."

버. 려. 진. 아이.

단 다섯 글자.

그 글자 하나하나가 비수로 날아 들어와 달란트의 가슴에 꽂혔다.

무언가 대꾸를 해야 함에도 별다르게 대응을 하지 못하는 달란트.

그의 심리가 변화된 탓인지 실날 같이 흘러나오던 기운은 아예 멈춰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열쇠의 말은 끝나지 않은 상태.

"그런 심한 짓을 하고 말이야. 게다가 뭐? 그 꼴에 뭐? 누가 누구를 막아? 세계를 구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원. 너네 가정이나 제대로 지키고 나서 남을 지키던가 말던가 해. 어디서 같잖은 영웅놀이야?"

"... 그 때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좋은 핑계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좋~지. 아주 좋아~ 현실을 도피하기에 딱 좋은 핑계지.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것 뿐이지? 그것도 변명이라고. 여하튼 넌 이 아이를 데려갈 자격이 없어. 내가 그런 짓은 허락하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넌 그럴 자격조차 없으니까."

"난 이 아이의 아빠야. 피와 피로 이어진 관계라고."

"그래. 말 잘 했다. 그 피가 과연 한 게 무에가 있지? 당당하게 네가 네 입에 올릴 수 있다면 인정해 주지."

그의 말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달란트.

달란트는 정신적으로 피폐해 가는 와중에도 무언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없다.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아.

털썩-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는 달란트.

그리고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어 본다.

달란트는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 잘 맞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아이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했다.

손을 덜덜 떨며 힘겹게 들어 올리는 달란트.

그때.

"뭘 하려고? 아서라 아서. 안돼. 넌 그럴 자격이 없대도.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지? 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니까~ 하하하하."

그리고 과거의 체스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 당기는 열쇠.

아이는 너무나 쉽게 그에게 딸려갔다.

순간 열쇠의 눈꼬리 부근에 스쳐 지나가는 기쁨.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속내는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부리나케 달려온 이유.

아까 느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 기운.

일반적인 기운이 아닌 그것.

하지만 몹시도 기분이 나쁜 그것.

너무 따스해.

견딜 수 없이 너무 따스해서 그래서 더욱 기분이 나빠.

그 기운이 넘쳐나면 넘쳐날수록 왠지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져만 가는 것 같은 그였다.

이대로 기분 나쁜 그것을 내비둔다면 분명히 사달이 나도 크게 날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온 그였다.

그리고 지금.

저기 털썩 주저앉아버린 달란트.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이 났다.

말 몇 마디에 저렇게 무너질 정도라면...

잔뜩 긴장한 채 달려왔거늘 되레 너무 싱겁게 무너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싱거웠다.

"헤헤. 넌 이제 이 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 네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버렸거든."

이제 변수는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더 이상의 변수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그가 달란트를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꺼져~~~"

****

따스함이 느껴진다.

털썩 주저앉아있던 달란트에게 느껴지는 아주 조금의 따스함.

그는 온기가 느껴지는 그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달란트의 시선에 들어온 것.

한 손에 담긴 자그마한 손가락들.

따스한 온기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그 손의 주인은 체스.

과거의 체스다.

"...으...ㅇ?"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달란트와 열쇠.

둘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때 천천히 벌려지는 조막 만한 입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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