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다시(2)
...이게 무슨 짓?
무슨 놈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뭐 이딴 걸 그린 것도 아니고 말이다.
관여자의 얼굴에 당황함이 떠올랐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그의 표정.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덥석 껴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행동이었다.
"떨어져라."
관여자의 팔뚝에 힘줄이 불룩 솟아오른다.
그를 뿌리치기 위한 시도다.
헌데.
떨어지지가 않는다.
눈을 부릅뜬 관여자가 이번에는 자신의 기운을 이용해 그의 몸을 마구 훑어갔다.
촤악- 촤악- 촤악-
선이 그어진다.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 것처럼 늘어나는 붉은 실선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해진다.
오히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욱 강하게 조여오는 그의 몸뚱아리.
"이이익... 놔...놔라..."
끙끙거리는 관여자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 올랐다.
이 불편한 상황.
어색하다.
타인의 체온이 몹시도 어색한 탓이다.
하지만 자신을 끌어 안은 자는 움직일 생각도 지금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풀 생각은 단 1도 없어 보였다.
쾅쾅- 쾅쾅쾅-
이번에는 강한 타격음.
관여자는 주먹으로 자신을 끌어 안은 자의 등을 마구 때려대었다.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려는 심산의 행동이었다.
한 대 한 대가 엄청난 충격을 일으킨다.
내장이 진탕될 정도의 충격.
크헉-
관여자를 끌어 안은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아픔이 느껴질 법도 한데도 몸을 웅크린 채 그저 버티는 달란트였다.
그 후 몇 번이나 더 타격음이 흘러 나왔으나 그는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때리는 자도 지치고 맞는 자도 지쳐갈 즈음.
순간 달란트의 몸에서 따스한 기운이 물씬 피어 올랐다.
솨아아아아아-
어떤 기운인지는 모른다.
허나 느껴지는 따스함.
뭐랄까.
그 기운은 본디 그의 기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따스한 기운.
한여름의 푸르른 숲처럼 녹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듯하다.
...어...어...?
다소 이질적인 기운에 관여자가 당황하는 사이.
둘의 몸을 감싸버리는 기운.
그렇게 둘은 그 기운에 아예 먹혀 버렸다.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
"여기는 또 어디지?"
달란트의 중얼거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와버렸다.
시커멓다.
아주 시커멓다.
너무 시커매서 바로 앞의 발걸음조차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음직한 곳의 저 끝.
저 곳이 이 곳의 종착점인 것일까?
뭔가 희미한 빛이 은은하게 비쳐오는 곳.
저 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저 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달란트.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 달란트.
자신이 본 빛은 허상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온기가 느껴지는 빛.
그리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하나의 형상.
은은한 빛이 하나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기다랗게 늘어진 그림자.
그 그림자를 거슬러 올라가니 빛이 가둬둔 원 안에 있는 하나의 인영.
홀로 그 곳에 쭈그려 앉아 있는 아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덩치가 자그마해 보이는 아이였다.
무언가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이는 아이.
흐으응~
혼자 만의 세상에 갇힌 채 무언가에 열중이다.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 만의 놀이에 빠진 아이.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아 아이의 표정은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걸로 봐서는 연신 손을 놀려가는 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듯하다.
'이 아이는...'
뒷모습만 보고도 그 아이가 누군지 알 수 있다.
아니 모른다고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 아이의 뒷모습.
그 아이는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누구와 너무나 쏙 닮았다.
"...체...스...?"
조심스레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따스롭다고 해야 할까 자상하다 해야 할까.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임에도 그 목소리에는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그 목소리에 움찔거리는 아이의 어깨.
그리고 다시 한 번.
"체스."
아이가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고개를 돌린 아이의 눈에 들어온 덩치가 아주 큰 남자.
"누구세요?"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달란트의 귀에 쏙 들어왔다.
****
"나야."
흐응~
"내가 누군데요?"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내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
그는 이내 다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흠흠-
덕분에 무안해진 건 달란트의 몫.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틀림없다.
하긴 지금의 모습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
예전 그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 환수계에 머무르는 모습이니.
흠...
잠시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달란트가 아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에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는 아이.
"왜요?"
"참 잘 생겼구나."
"...내가요? 호옹~ 귀엽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잘 생겼다는 말은 글쎄요..."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듣자마자 바로 욕을 했을 정도로 뻔뻔한 말투다.
하지만 달란트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아이였지만 역시 어릴 때부터 떡잎이 남다른 아이다.
어쩌면 이리도 잘 생겼는지.
역시 환수의 혈통을 이어 받아서 그런지 인물이 아주 그냥 훤칠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런데 누구냐니까요?"
아.
그래. 이게 아니었지.
"난 지나가는 사람이란다. 지나가는 길에 혼자 놀고 있는 네가 보여서 말이야."
"그럼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 가세요. 전 원래 늘 혼자서 놀았어요."
순간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아이가 저렇게 이야기하는 이유.
그리고 자신이 아이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이게 다 환수계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누군가는 오해를 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사소한 연보다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릴 적 체스의 모습을 보며 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니 왠지 속이 미어지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떠난 자신이거늘...
빚 또한 더 큰 대의를 위해 한 것이었거늘...
"아빠는? 엄마는? 부모님이 혼자서 안 놀아주시니?"
"엄마는 바빠요. 그리고 아빠는... 아빠는 아예 안 놀아줘요."
다소 투명한 목소리의 아이.
하지만 달란트는 아이의 저 말 속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환수에게도 가족은 중요하다.
더군다나 자신처럼 인간과 눈이 맞은 환수에게는 말이다.
그런 그가 아이에게 저런 소리를 듣다니...
가슴이 미어질 수 밖에 없지.
하지만 달란트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
가슴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 다른 말이었다.
"...아빠가 쓰레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