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관여자(4)
찰나의 시간.
현실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저 하품 한 번 길게 할 정도의 시간이다.
"뭐야?"
잠시 동안 무언가 멈춘 듯한 느낌이 확 들어온다.
주인들이란 게 워낙 그런 것에 예민한 부류들이다 보니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다.
어딘가에 태엽이 살짝 틀어진 듯한 느낌.
털썩-
그때 힘을 잃은 채 무너져 내리는 배코의 몸뚱아리.
헤헤헤-
초점 잃은 눈을 한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배코?"
서로 무언가 말을 하며 그를 살피기 위해 달려가려던 찰나.
그들의 몸이 멈추었다.
항거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으으으... 움직일 수가 없어..."
부르사이가 몸을 비틀긴 하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애쓰지 마. 너희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돼.]
그 말만 남긴 채 관여자는 호아류를 힐끗 보았다.
마치 그 자리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그저 서있을 뿐인 호아류.
[훗. 제 역할에 너무 충실하군. 그건 그거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군. 이제부터 내 공간에 들어오지 마라.]
딱 잘라 말하는 관여자였다.
그리고 이내 멈추었던 걸음을 옮겨 열쇠가 존재하던 곳으로 그가 들어가 버리자 감도는 침묵.
후아-
이제야 온 몸을 옥죄어 오던 압박감이 사라진 듯한 느낌에 부르사이가 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황급히 배코의 상태를 살펴보는 그녀.
"헤헤헤헤. 예쁜 누나다."
그저 반쯤 맹한 표정으로 웃기만 하는 배코.
"...이 녀석. 아예 정신이 무너져 버렸는데...?"
부르사이가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는 유난히 화려한 깃털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는 냅다 배코의 머리 부근에 그것을 꽂아 보는 그녀.
스르르르르-
이내 영롱한 붉은 빛을 뽐내던 깃털이 그냥 하나의 깃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젠장-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부르사이.
"...관여자가 저런 존재였군. 호아류. 움직이지 않을 것이냐?"
그 모습을 보며 키린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호아류의 대답은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
호아류라고 한들 또 주인들이라 한들 뾰족한 수가 없다.
저 상태는 말이다.
아예 환수계 전체를 종속시켜버린 듯한 관여자의 힘.
호아류는 깊은 생각에 잠겨가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게 더 옳을 것인가.
환수계와 인간계.
이미 이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던 하르무는 죽었다.
게다가 뒤에서 움직이던 배코 또한 저 모양 저 꼴.
키린과 부르사이는 당연히 반대하는 쪽.
다수결로 따지자면 이미 결론은 난 상태이지만 그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그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역할에 더욱 충실할 수 있을까 뿐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쉬이 결론을 낼 수 없는 일.
흠...
중재자로서의 역할.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관여를 하며 결정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서렸다.
바로 그때.
으으으으......
구석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어느 새 사라져 버린 존재감과 함께 쓰러져 있던 그.
정신을 잃고 있던 달란트가 그제야 눈을 떴다.
"...이...이런... 도대체 무슨 일이..."
****
그리고 그때.
관여자 아니 체스의 손을 텁 잡는 한 존재.
주인들조차 못 한 일을 하는 한 존재.
헬캣이다.
[...뭐지?]
-나다. 이 자식아.
헬캣 또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지 자신이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 나서지 못했던 것일 뿐.
그리고 지금 때를 봐오던 그가 나선 것이었다.
물끄러미 헬캣을 내려다 보던 관여자.
[이 녀석의 기억에 있는 게 바로 너로군. 환수의 냄새가 왜 그리 짙은가 했더니 키린에 부르사이에 너까지. 아주 잡종이 다 되어버렸군.]
-잡종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이 자식아. 정신을 차려. 그렇게 열쇠한테 먹혀서 어쩔 셈이냐???!!!
헬캣의 일갈.
주인들도 못한 일을 지금 하고 있는 헬캣이었다.
그 모습에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일순 관여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모든 것은 이미 운명이 이끄는 대로 만들어질 뿐이다. 물론 이 몸은 지극히 불확실성 속에서 태어난 녀석이긴 하지만. 아마 이 녀석이 환수의 씨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게 불가능했겠지. 애초에 이 녀석이 아니라 원래의 관여자가 자신의 역할을 했더라면 더욱 나았을 수도 있겠지만 뭐 그건 이미 운명이 이끄는 대로 만들어져 버린 것. 여하튼 더 이상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딱 잘라 말하는 관여자의 말에 헬캣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걸 왜 열쇠 네가 결정하는 것이지? 이 녀석은 그럴 생각이 단 1도 없었다고!
[후... 말을 좀 많이 하게 만드는군. 내가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나? 그런 건 오히려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닌 듯한데.]
그리고는 몸을 빙글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관여자.
하지만 헬캣은 그를 고이 보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퍼억-
관여자의 등을 힘껏 후려치는 헬캣.
-정신차려라! 이 녀석아! 네 자신을 잃어버릴 셈이냐??????!!!
물론 공격이 먹혀들지는 않았다.
주인들도 어쩌지 못한 것을 헬캣이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그렇게라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헬캣의 행동에 뒤로 돌아보는 관여자.
[날파리가 앵앵거리는구나.]
이 정도는 단숨에 소멸이다.
관여자가 자신의 기운을 일거에 쏟아내려는 찰나.
헙-
그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이 녀석이...]
방해다.
무의식 중에 녹아있던 체스의 의지가 열쇠에게 반항을 하는 것이다.
관자놀이를 질끈 누른 관여자.
심히 거추장스럽다.
이 녀석의 모든 자아는 무의식 중에 던져버렸다고 생각했거늘...
그만큼 유대감이 깊었단 말인가?
한편 그걸 본 헬캣의 눈이 반짝였다.
'좋아. 통한다.'
-정신차려라! 체스! 지금 빠져나오는 거야!!!
일갈과 함께 다시 한 번 자신의 앞발을 힘껏 후려치는 헬캣.
하지만 2번은 통하지 않았다.
황급히 자신의 팔로 헬캣을 그대로 쳐내어 버린 관여자는 그 후 그대로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냅다 이동을 해버렸다.
****
겹겹이 기운을 둘러버린 자신의 방 안.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하는 관여자.
마지막 자아까지 다시 깊고도 깊은 곳에 던져버렸다.
이제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그 어둠 깊은 곳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리라.
이제는 이미 그가 열쇠이고 또 관여자이다.
그는 열쇠일 적 한참을 맴돌던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깊게 가라앉은 눈매.
그 속에 엿보이는 광오한 힘.
모든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
그 모든 것을 몸에 두른 존재가 된 자신.
[자. 하나가 되어라.]
나지막한 말과 함께 관여자의 몸에서부터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는 힘.
그는 그가 결정한 바를 행할 셈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그의 손짓에 따라 시작된 변화.
일거에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크나큰 충격.
도래했다.
두 세계가 하나로 되는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