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관여자(3)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것은 관여자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온 목소리.
어린아이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동굴 저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목소리 같았다.
그와 동시에 커져가는 관여자의 몸.
예의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버린 그였다.
"허...?"
뭔가 잘못됐음이 느껴진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벌써 모든 게 끝이 나고도 남았었을 시간.
헌데 저 치는 멀쩡하게 저렇게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현실보다 흘러 나오는 기운이 더욱 매섭기만 하다.
이익...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그의 정신을 옭아매는 것이다.
이 모든 세계를 손에 넣어야 끝이 난다.
재빨리 배코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렸던 건 하르무에게 주었던 그것.
손에 들린 그것을 바라보는 배코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꼭 이걸 써야 하나...?'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오히려 막혀 버린다면 이도 저도 안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생각의 여지가 없다.
꿀꺽-
배코가 자신의 손에 들린 그것을 삼키는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와아아아아아아아아-
관여자의 정신세계를 옭아맨 배코의 기운.
드넓게 펼쳐진 초원은 어느 새 얼룩이 점점이 져있고 아예 배코의 공간으로 뒤바뀌어 간다.
핏발이 선 두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뜬 배코.
이 기세를 몰아 일거에 그를 먹어버릴 심산인 듯 보였다.
으랴아아아아아압-!
배코의 손가락이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말이 손만 움직인다 뿐이지.
배코가 하는 작업은 치밀함에 조밀함이 쌓이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기억과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공간.
모든 기억이 합쳐져 흐르는 강에서 합치고 합쳐져 생겨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이 때의 행복.
체스가 살아온 순간 중 가장 행복한 순간.
그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코가 제일 잘하는 것 또한 바로 이런 것.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배코였다.
체스의 기억을 바꾸어 간다.
하나의 바꾸어진 기억에 새로운 기억을 주입한다.
그 모든 것에는 자신이 존재하게끔.
관여자의 기억 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배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이 모든 것을 자신이 품을 수 있으므로.
어느 새 배코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허나 흐르는 땀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배코.
혹여나 외부에서부터 방해가 유입되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한다.
자칫 잘못해 모든 게 헝클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천추의 한이 될 터.
자신의 온 신경, 온 힘을 집중한 배코.
그는 그렇게 모든 걸 쏟아 부어갔다.
****
이제 곧 끝이다.
남은 건 마지막 손톱 만한 기억.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배코.
그때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애쓴다.]
한창 자신의 작업에 열중하던 배코를 현실로 되돌리는 한 마디였다.
"...응?"
그 말은 다름아닌 관여자로부터 나온 목소리.
[설마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코웃음을 치는 관여자.
우습다.
고작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걸로 자신을 이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게.
그저 천둥 벌거숭이일 뿐이다.
[이거 오히려 미안한데? 그만큼 애를 썼는데 네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ㅇ...ㅔ...?"
자신이 하던 동작 그대로 얼어버린 배코.
그의 핏발이 잔뜩 선 두 눈이 관여자에게 정확히 향한다.
[말 그대로야. 차라리 힘으로 부딪히지 그랬냐? 그런 장난을 치지 말고. 명색이 주인이라는 녀석이 영 형편없네.]
"무슨 개소리냐!!!!!!"
허세다.
저건 마지막 부분 밖에 남지 않은 관여자가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 임에 틀림없다.
이야아아아아압-
배코가 남은 온 힘을 쏟아붓는다.
그 찰나.
[소용없대도. 네가 뭘 하는 지는 다 알았어. 이미 이 녀석은 나에게 먹혀 버렸으니.]
그 말과 함께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는 듯한 손짓을 하는 관여자.
순간 지금까지 쏟아져 나와 공간을 잠식했던 배코의 기운이 저 손아귀에 모두 잡혀간다.
"뭐...뭐냐...?"
갑작스레 뒤바뀐 기운에 정신을 못 차리는 배코였다.
[후음... 영 이해를 못 하는 듯한 얼굴인데... 시간도 좀 남고 잠깐 수다나 떨어볼까?]
"뭐...뭘 말이냐...???"
씨익-
일순 관여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너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내가 하나씩 설명을 해줄게. 착각은 금물이야. 이런 정신 세계에서 네가 가장 고차원적인 존재일 거라는 생각. 그런 게 제일 위험한 것인데 정작 당사자는 모르더라고. 나는 열쇠. 그리고 이 녀석은 관여자. 네가 태어나기 아득히 전부터 그 운명이 결정되어 있던 존재라고. 뭐 이 녀석은 조금 예외의 경우이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하는 관여자.
그... 그럴 리 없다.
자신보다 고차원적인 존재라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배코의 손이 덜덜 떨려온다.
[맞아. 너 네가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신이라는 게 되고 싶었겠지? 뭐 가령 창조주라던가 말이지.]
"나... 나는..."
[부정할 필요 없어. 모든 생명체라는 것은 욕심 혹은 욕망이라는 것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 그걸 어떤 식으로 표출하는 건 네 자유이긴 하지만 거기에 따르는 책임은 온전히 네 몫이지. 그리고 이건 네 분수를 모르고 나댄 과정에 대한 결과일 뿐이고 말이지.]
신랄하게 독설을 내뱉는 관여자의 말에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은 이 모든 것들의 정점이 되고 싶었으니.
하지만 그게 무에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고차원의 존재가 더욱 높은 차원으로 가는 게!"
[그렇지. 네 말이 틀린 건 없어. 오히려 넌 환수로서 봤을 때에는 지극히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 뿐이야. 본능에 충실한다. 그것 만큼 본능에 충실한 게 어디에 있겠어? 하지만 말이야.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으면 가끔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넌 그걸 안 했을 뿐이고. 그 결과는 뭐~ 온전히 네가 지면 그만인 걸. 안 그래?]
뿌드득-
배코의 이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너무 분해하지 마. 너도 살 만큼 살앗고 이룰 만큼 이뤄봤잖아~ 다 그런 거야. 그냥 제 그릇에 만족하고 살았으면 그만인 것을 네가 그렇게 나대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 아니겠어? 거기에 대한 책임 정도는 져야 그래도 주인다운 모습이지.]
관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신을 차린 배코가 재빨리 손을 써간다.
허나.
이미 늦었다.
꽈득-
관여자가 자신의 주먹을 불끈 움켜 쥐며 배코의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