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만남(5)
긁적긁적-
"에헤헤. 역시 키린 님은 눈치가 빠르시다니까.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어요."
뜨악-
배코의 당당함에 놀랐다.
그리고 저 엄청난 사실을 오히려 별 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저 뻔뻔함에 더욱 놀랐다.
"...지...진짜야?"
부르사이의 말에 배시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배코.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잉."
"......"
몸을 배배 꼬는 배코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부르사이.
"그거 하르무가 복용하던 것도 네 작품이냐?"
"아~ 그거요? 봤었어요? 네네. 맞아요. 역시 후유증을 처리를 못했더니 좀 더 쉬워졌지 뭐에요~"
약간 아쉽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배코다.
"그게 완벽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독의 배합이 조금 잘못 되었나 봐요. 덕분에 더 힘을 안 들이고 처리할 수는 있었는데 제가 복용할 건 당연히 아무런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없어야 하니까요."
역시.
모든 정황이 이해가 간다.
하르무가 복용한 것은 역시 배코의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뒤처리는 당연히 저기 옆이겠지?
"역시. 그럼 하르무의 시체는 그 네 옆의 자이앤트?"
"그렇죠~ 그런 고급진 식단을 안 먹이면 그거야말로 엄청난 손실 아닌가요? 어찌나 잘 먹던지 원."
말을 하며 자이앤트를 쓰다듬는 배코의 손길.
그의 손길에 자못 기분이 좋은 듯 자이앤트가 입에 달린 집게를 마구 부딪혔다.
"야야. 그럼 저기 지금 배코 저 녀석이 모든 걸 다 계획했단 말이야?"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부르사이의 말투.
"그래. 맞아. 그때 하르무가 먹던 약도 배코가 만든 것이고 하르무의 시체를 저기 있는 자이앤트에게 먹였고 그런 것 같아."
"뭐???!!! 그 말이 맞아???"
허나 그 말에 대답은 않은 채 대신 그들을 가로막은 열쇠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배코.
"이제 시작이 되려나 봐요~ 마지막 피날레가."
****
한편 여전히 다른 공간에 속해 있는 체스 그리고 열쇠.
열쇠의 손이 체스의 몸에 닿은 순간.
아까 열쇠가 했던 말마따나.
일순 뇌 안의 전두엽까지 한 방에 후려치는 듯한 엄청난 충격.
으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
엄청난 충격이 체스의 온몸을 강타한다.
마치 온 몸이 지져지는 듯하다.
자신의 가슴팍에 닿은 열쇠의 손에서부터 전달된 그것.
가슴팍 안으로 전달된 그것은 자신의 좌심방 우심실을 그대로 사정없이 뚫어버렸다.
미세혈관 곳곳으로 파고 드는 열쇠 곧 그 자체.
게다가 사정없이 떨리는 이.
누군가가 자신의 아래턱 위턱을 빠르고 강한 속도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다.
내려다볼 수는 없지만 아마 이가 갈려나가며 부스러기도 후두둑 떨어져 나갔겠지.
한참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던 체스.
그런 그의 눈에 미소 지은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열쇠의 얼굴이 들어왔다.
'......뭐지?'
순간 마구 밀려 들어오는 열쇠의 감정.
그가 말을 하던 게 바로 저것인 듯했다.
태초에 세계가 만들어지고 생겨난 모든 것들.
삶과 죽음.
몇 번의 정화를 거쳐 성립이 되어 만들어진 지금의 세계.
본능적인 싸움과 갈취.
학살 그리고 욕망.
예정된 죽음이 아닌 타인에 의한 죽음.
물론 반대의 감정도 있다.
하나의 탄생에 따른 주변의 행복.
사랑과 사랑이 합쳐져 더 큰 사랑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랑은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 내며 그렇게 성립이 되어가는 모든 것.
그렇게 무리가 만들어지고 더 큰 집단이 생겨나고 하나의 국가가 생겨난다.
체스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이것들.
이 모든 건 열쇠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체스에게로 전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부정적이다.
밝은 면은 순식간에 체스의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대신 남는 건 어두운 면.
특히나 인간계의 어두운 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체스의 온 몸은 그렇게 변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열쇠의 의지에 의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동화되어 가는 체스.
그리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열쇠.
그렇게 둘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갔다.
그와 동시에 열쇠가 만들어 낸 둘 만이 존재하던 공간도 사르르 마치 얼음이 녹듯 녹아 내려갔다.
****
다시 현실.
시작된 변화.
시간의 흐름이 다시 천천히 이어지기 시작한다.
체스와 마주 보고 서있던 열쇠는 이미 온 데 간 데 없다.
우연이 아닌 필연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자신의 역할을 모두 이행한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 열쇠.
본디 서있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체스만 자신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뿐.
그리고.
재깍- 재깍- 재깍-
멈추었던 시계바늘이 소리를 더해간다.
미비한 움직임이지만 아주 조금씩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동력에 힘을 더해가며 움직임에 힘을 실어간다.
차츰 풀려나기 시작하는 모두의 몸.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체스의 몸에서부터의 변화.
검정색이랄까.
아니 오히려 암흑에 가까운 색이라고 해야 할까.
새하얀 도화지에 물감이 번져가듯 그렇게 번져가는 체스의 몸.
어쩌면 설명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저건 염색이 되어가는 듯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침식이 되어가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어느 덧 몸의 절반 이상이 물이 들었다.
아마 필경 열쇠의 영향일 것이다.
체스가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약한 존재였으니.
아무리 관여자라 한들 말이다.
그간 환수계와 인간계 모든 곳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기에 열쇠의 힘은 체스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터.
여전히 체스의 의지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
열쇠의 의지는 체스를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의 몸을 뒤덮어 가던 어둠은 오히려 더욱 빠르게 그 속도를 더해갔으니.
그리고 마침내 그의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뒤덮였다.
체스의 온 몸을 덮어버린 어둠이랄까 열쇠의 흔적.
그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상태이다.
하아아......
순간 길게 내뿜어지는 그의 숨결.
날씨가 그리 시린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허연 입김이 그의 입가에서 흩어져 나온다.
단지 숨결 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 번에 체스 주변의 기운 그 자체가 무겁게 짓누르는 듯하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는 변해버린 체스의 시선.
여럿의 시선이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중이다.
무어라 확실히 설명을 하기에는 애매하나 각각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제각각인 듯하다.
허나 그런 것 따위는 이미 변해버린 체스의 안중에 없다.
체스.
변해버린 그가 느린 동작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스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