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만남(4)
시간이 멈추었다.
모두가 인지하지 못한 채 벌어진 일.
열쇠와 관여자의 접촉이 가져온 효과였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자들의 시간이 정지되었다.
본인들이 느끼지 못한 사이 벌어진 일들.
호아류는 물론 나머지 인원들 또한.
그들은 하던 동작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어떤 이는 놀란 눈을 뜬 채.
어떤 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한 채.
어떤 이는 널부러진 채.
아마 그들은 알지 못하겠지.
자신이 깨어나는 그 순간에도 지금 이렇게 시간이 정지되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타닥-
타닥-
두 명이 중심의 중심에 도착했다.
하나는 새빨갛고 하나는 새파란 게 부르사이와 키린이다.
둘을 뒤따라 오던 나머지 환수들은 그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들어온 채 대기 중이다.
"뭐야. 벌써 뭔가가 벌어졌는걸?"
현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조금 더 빨랐던 부르사이가 읊조렸다.
둘의 눈에 들어온 기묘한 광경.
시간의 기류에 올라선 열쇠의 기운에 지배되어 있는 이 공간.
한 공간에 속했음에도 멈춰선 이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나한테 물어본다한들 내가 뭘 알겠냐...? 나도 처음인지라 모르는 건 매한가진데 뭐."
어깨를 으쓱거리는 키린.
'이 자식은 도움이 안 되네 진짜...'
에휴-
한숨을 푹 내쉰 부르사이가 다시 멈춰선 이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왜 멈춰선 것이지? 저거 건드리면 다 깨어나려나?"
부르사이가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부아아아-
순간 강한 기운이 그녀의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흡-
'요것 보게?'
주인인 자신을 밀어낼 정도다?
부르사이의 두 눈꼬리가 한없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촤아아아아아-
화려하게 펼쳐지는 그녀의 꼬리들.
빠알간 빛이 넘실거리는 깃들이 제각각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먼저 한 발 내딛은 키린.
그의 시리도록 푸른 기운이 투욱 발했다.
허나 마치 모래사장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리는 키린의 기운.
그는 이내 자신의 행동을 멈춘 채 부르사이 쪽을 돌아보았다.
"부르사이. 이거 위험한 거 아냐?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나면 어쩌려고 그래?"
"뭐 죽지는 않겠지."
"그래도 저 안에 있는 녀석들한테 뭔가 악영향을 끼치는 거 아냐?"
"넌 그래서 문제야. 그러니 하르무한테도 쥐어터졌지."
"아니 그건... 그 녀석이 강해서 그랬던 건데..."
"시끄러. 멍충아. 내가 처리할 테니 넌 가만히 있어."
서슬 퍼런 부르사이의 윽박에 일순 움츠러드는 키린의 어깨.
'하아... 내 팔자야...'
명색이 같은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렇게 잔소리라니...
그래도 더 이상 군말은 않은 채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키린이었다.
바로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건드리면 안돼요!"
****
어린아이의 목소리.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다.
뒤편을 향해 돌아가는 둘의 고개.
그 곳에는 조그마한 아이 한 명이 환수를 타고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음? 저건...?'
일순 키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하다.
배코가 타고 있는 것.
자이앤트다.
'자이앤트가 언제부터 저렇게 날 수 있었지? 아니 그것보다 남아있기는 한 것이었나?'
게다가 또 하나.
환수들은 이 곳까지 들어올 수 있을 리가 만무하거늘 아무렇지 않게 이 곳까지 들어오는 자이앤트라...
키린이 부르사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보다.
의아함보다는 반가움이 더욱 넘치는 듯한 그녀의 표정.
부우웅-
타닥-
그때 배코가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를 태우고 온 자이앤트 또한 배코의 뒤에 나란히 착지했다.
"너 어떠...ㅎ."
막 키린이 입을 뗄려는 찰나.
부르사이가 그의 말을 끊었다.
"너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거야? 도통 찾으려 해도 찾을 수도 없고 말이야. 지금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고!"
반가움 반 책망 반의 말투다.
"에헤헤헤. 좀 일이 많았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천진난만한 미소로 화답하는 배코.
그 모습에 속이 터지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들기는 부르사이.
저 녀석이 저리도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춘다 진짜...
지금 얼마나 큰 사달이 벌어졌는데.
"아니. 지금 하르무도 죽었다고. 게다가 저기 보이지? 관여자와 열쇠도 만났고. 진짜. 도대체 하르무는 또 왜 그렇게 된 거래? 너 뭐 아는 거 없어?"
"그거요? 흠... 잘 아는데...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탈인가. 에헤헤."
하긴 주인으로서 그걸 못 알아차리지는 않겠지.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키린.
헌데 잠깐.
대화 속에 이상한 점이 있다.
너무나 당연히 잘 알고 있다는 저 표정 그리고 말투.
놀라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순간 어딘가에 다다른 키린의 생각.
"...너...?"
...설마......?
아니. 아니겠지?
아니다.
아무리 배코의 힘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는 해도 그럴 리는 없다.
배코도 다섯 주인 중 하나.
그렇지만 하르무를 압살할 정도로까지는... 글쎄...
아닐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키린.
"아니지...? 그렇지? 설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혀 생뚱맞은 키린의 말에 뭔 소리를 하냐며 키린을 쳐다보는 부르사이다.
그때.
짝짝짝-
"맞아요~ 깔깔깔깔깔깔깔. 역시 키린 님이라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셨을까나아아아아???"
그 소리에 확 가라앉은 키린의 표정.
응? 응? 응?
뭔가 알고 있나?
부르사이는 둘의 대화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키린과 배코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뭔데? 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의 부르사이.
"...너였냐? 하르무를 죽인 녀석이."
키린의 말이 낮게 울렸다.
순식간에 가라앉는 주변의 기온.
키린의 발 밑에서부터 시작된 푸르른 기운은 열쇠가 만든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의 공간을 조금씩 얼려나가기 시작했다.
쩡- 쩌엉-
자연스레 뻗어나가는 키린의 기운에 따라 퍼져 나가는 기운.
'뭐야? 얘가 왜 이래? 갑자기 그 얘기는 또 뭐야?'
자신의 몸에 붉은 기운을 두른 부르사이가 키린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키린. 너 왜 그래?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역시 범인은 이 안에 있었어. 부르사이."
"너 설마 지금 배코가 범인이라고 하는 거야? 하르무를 죽인? 우리 둘도 못 죽인 그 하르무를 죽인 배코를?"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며 키린을 윽박질러가던 부르사이.
하지만 키린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설명을 요하는 듯한 표정의 그.
"...진짜야?"
부르사이가 배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