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만남(1)
중심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
새하얀 복도가 끊임없이 이어진 평평한 길.
타다다닥-
침묵이 깨졌다.
조용한 침묵이 가득 찬 이 곳의 정적을 깨뜨리는 빠른 발걸음 소리.
그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달란트.
그는 호아류가 있는 곳으로 열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연이어 거친 전투를 벌였음에도 강철 체력인가 그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다.
하지만 그가 지나온 길.
눈부시게 새하얀 바닥에 점점이 피어나는 선홍빛의 꽃들.
다름 아닌 그의 핏자국이다.
부상이 꽤나 심각한 듯 걸음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바닥에 피어나는 꽃은 점점 화려해진다.
이 모든 상처는 불과 조금 전까지 바이야와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탓이다.
돌이켜보면.
후우...
역시 호아류의 오른팔다운 강함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치고 받는 근접전에 있어서 둘의 실력의 우위는 너무나 뚜렷했다.
결과는.
보다시피 자신은 이렇게 걸음을 내딛고 있고 그 녀석은 뭐.
아마 지금쯤이면 단잠을 자고 있겠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을 터이고.
그런 상념에 빠진 채 멈추지 않은 채 뛰어가던 와중.
갑자기 그의 걸음이 멈춰졌다.
지극히 타의에 의해.
사아-
어디선가부터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느껴본 적이 없는 기묘한 두려움이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아나며 달란트의 머릿속이 일순 새하얘진다.
스스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자.
그것은 저기 눈앞에 있는 자로부터 시작된 것.
직접 보는 건 처음이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호아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르무와는 천지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시공이 저 자의 몸 전체를 맴도는 듯한 느낌.
마치 자신이 곧 저 공간인 양 공간에 녹아든 느낌.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되레 호되게 역풍을 당할 것만 같은 그런 감정이 달란트의 온 몸을 짓눌러 온다.
윽-
문득 느껴지는 통증에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는 달란트.
이건 뭐...
그때 천천히 호아류의 고개가 달란트의 쪽을 향했다.
"쉬어라."
나지막이 흘러 나오는 호아류의 말.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그제야 마치 장막이 걷히듯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는 달란트를 짓눌러 오던 압박감.
겨우 그 힘에서 해방이 된 달란트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호아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그의 말.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전혀 생뚱맞은 말에 일순 달란트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열쇠."
그리고 한 팔을 들어 정면을 가리키는 호아류.
그의 팔을 따라 이동한 시선에 들어온 건 한 아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아이였다.
자신이 낳았던 그렇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체스와는 아주 딴판인 아이.
자신의 넋을 잃게 만들 정도로 눈이 부신 아이였다.
아......
절로 나오는 탄성.
"...저게...뭐...지...?"
"열쇠다."
헉.
저것이 바로.
달란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사르르 풀려갔다.
"그래. 이 곳까지 온 건 칭찬해 주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들어줄 수가 없겠구나."
이미 달란트가 왜 온 것인지 다 안다는 말투의 호아류였다.
그 말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달란트.
잠시 마음의 끈을 놓아버렸다.
불끈-
그의 두터운 팔에 힘줄이 빠악 솟아난다.
"해보겠나?"
상냥한 호아류의 말투.
하지만 그 말투 안에는 단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만 느껴진다.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하아아아아압-!!!
스스로를 격려라도 하는 듯 크게 기합을 불어넣은 달란트.
그리고 그는 그대로 정면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호아류에게 힘껏 달려 들었다.
****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죽어나간 시체에 시체에 시체가 산을 이룬다.
"여~ 왔냐?"
중심의 안쪽으로 막 발을 옮기는 체스와 헬캣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남자.
-저 영감이 왜 여기에 있지?
걸음을 옮기던 헬캣이 멈춰섰다.
단박에 그를 알아본 헬캣.
하긴 여기 환수계에서 저렇게 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영감님. 여기서 뭐해요?"
안으로 들어가던 체스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이거~"
자신의 손에 든 책을 팔랑팔랑이는 막시멈.
-아~ 그렇지. 하긴 기록하는 자라면 이런 곳을 빠지면 안되지. 그래서 많이 썼수?
"한 권을 넘어섰지. 그런데도 아직 써야할 게 천지야. 저 안에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지를 못 하니."
자못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였다.
-안에 누가 들어갔나봐?
"그래. 아~ 그래. 네 애비. 그 녀석이 들어갔지."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건 체스.
"엥?????? 아...빠요?"
"그래. 뭐 이러쿵저러쿵하더니 저 안으로 쏙 들어갔지."
"아니 왜 왔...지...?"
약간 떨떠름한 말투로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체스였다.
걱정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신경이 쓰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궁금한 건지 정확하게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듯한 말투였다.
체스의 말에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는 막시멈.
"그거야 네 애비가 하려는 일이 원래대로의 세계로 되돌리는 거 아니냐? 그러니 들어갔겠지."
뭐 어떻게 저떻게 하다보니 쑥 들어가긴 하더만 자신은 어째 들어가려해도 틈을 주지를 않는다.
들어가기 위해 억지로 몸을 쑤셔넣을 때마다 오히려 밀려나는 자신의 몸뚱아리.
나머지 환수들 또한 별반 자신과 다르지 않다.
방금의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환수들도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헬캣.
-응? 안 들어가지나요? 왜?
막시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헬캣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막시멈도 마찬가지.
헉-!!!
"너... 너... 어떠...ㅎ게..."
입을 쩍 벌린 채 둘을 바라보는 막시멈의 시야.
이미 체스와 헬캣의 몸은 반쯤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 잘못 느끼신 거 아니에요?"
손을 훠훠 휘젓는 체스의 손에 걸리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의 행동을 따라 막시멈의 손도 따라 움직인다.
"오~~~ 진짜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걸렸는데..."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순간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미친 막시멈.
"아! 이 녀석 관여자라서 그런 거구만???!!!"
막시멈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얼른 책을 펴 글자를 마구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슥슥- 삭삭-
점점 빨라지는 막시멈의 손놀림.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둘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중심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