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전쟁(3)
하르무의 정면에 앉아 있는 자.
키린이다.
한 명은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한 명은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도대체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들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평화로움이다.
"후후. 오랜만이지?"
미소를 머금은 하르무.
"오랜만인가? 오랜만이긴 하지. 잘 지냈지?"
"그래. 덕분에 잘 지냈지. 우흐흐흐흐."
"그런데 무슨 일로 저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거야? 뭐 소풍 나온 건 아닐 테고. 단체로 어디 유람이라도 떠나?"
"알면서 왜 이러실까~ 한 판 하자!"
하르무의 고함소리.
부우우우우웅-!!!!!!
다짜고짜 본론이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키린에게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가는 우람한 주먹.
허나 그의 시도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키린이 만들어 낸 푸른 막에 가로막힌 하르무의 공격.
정확히는 막이 아니라 오히려 얼어붙은 듯한 그의 주먹.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하르무의 눈이 일순 부릅떠졌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투기.
쩌적- 쩌저적-
푸른 막에서 실날 같은 금이 생겨난다.
그 금은 이내 하나의 선으로 연결이 되어 와장창 소리와 함께 깨어져 나갔다.
그 기세를 몰아 그대로 이어지는 하르무의 주먹.
콰아아앙-!!!
"그만하시죠. 하르무 님. 환수계의 역사에 오점을 남길 셈입니까?"
"호오~ 오늘 한꺼번에 다 때려잡을 수 있겠어~"
하르무의 온 몸에 넘실거리는 유형화된 투기가 그들을 덮쳐간다.
켄타 또한 자신의 부인을 보호하기 위한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온 몸이 긴장으로 덮인 그때.
누군가 켄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에?"
갑작스럽게 뒤로 확 딸려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켄타가 뒤로 돌아보는 찰나.
그의 몸은 어느 새 저 뒤편으로 쭈욱 밀려 나갔다.
"넌 빠져~ 다친다~"
그 말과 함께 하르무와 맞부딪혀 가는 키린.
콰과과과과과-
키린의 기운과 하르무의 기운의 격렬한 충돌음.
둘의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두 지역의 환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전투를 시작했다.
****
한참을 날아왔다.
전속력으로 두 지역의 경계에 들어온 부르사이.
그리고 남쪽의 환수들.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는 걸로 봐서는 거의 다 도착한 듯하다.
게다가 환수들이 내지르는 온갖 괴성.
전투가 그만큼 격렬하다는 말이다.
그런 그녀의 불타오르는 듯한 두 눈에 환수들이 절대 접근하지 않는 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군.'
뻔하다.
환수들이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근처까지 가면 싸움판에 끼어들지 말고 내 말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자신의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린 그녀.
쌔애애액-
이내 그 곳이 어디인지 확인한 부르사이가 마치 빛처럼 빠른 속도로 온 몸을 내리꽂았다.
****
둘은 치열했다.
마치 더 이상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처럼.
쾅-!!!
콰과과앙-!!!
신나게 공격을 해가는 건 하르무 쪽.
그리고 그걸 막아내는 건 키린.
아무래도 공격보다는 방어 쪽에 훨씬 특화된 그였기에 이러한 형태의 싸움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크음. 역시 수성의 귀재라 하는 이유가 있었어. 이 녀석.'
실제로 이렇게까지 살기를 머금고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자잘구레한 다툼은 있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격하게 싸운 경우는 한 번도 없던 그들이었다.
하르무가 모든 주인들 중 제일 강하다는 것.
그것은 그저 느낌 상 추측이었다.
환수계의 역사상 서로 간의 힘을 제대로 측정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겋기에 하르무는 더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격을 내지를 때마다 미묘하게 느려지는 자신의 공격.
아마도 원인은 이것 때문일 것이다.
키린의 몸을 맴도는 저 푸르스름한 기운.
저것이 지금 자신을 되레 오히려 안달나게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하르무.
그는 자신의 몸을 2배 가까이 불린 후 그대로 키린을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물리 방어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온 몸을 감싸는 투기가 있다.
쾅- 쾅- 쾅-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부르사이가 썌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쿠우우우우우웅-
자욱하게 피어 오르는 먼지들의 향연.
그리고 그 정중앙에 브루사이가 서있었다.
****
그녀의 난입에 한창 불이 붙던 싸움이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머지 환수들은 뭐 어젼히 불타 오르고 있었지만.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너희들끼리 왜 싸우는 거야?"
"으흐흐흐흐. 부르사이~ 이건 네가 끼어들 게 아니다. 정신차려라."
하르무의 압박 아닌 압박이다.
절대 끼어들지 말라는 압박.
정확히는 협박이지.
"흥. 그런 개소리는 나한테 씨알도 안 먹히는 것 알지?"
"그렇지. 개소리지 개소리. 하지만 그런 개에게 물리면 또 어떻게 될까? 개가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는 있겠지?"
실실 쪼개며 말을 하는 하르무를 보니 기가 찰 따름이다.
생각이 없는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여전히 키린은 말이 없다.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
부르사이가 그를 쳐다 보았지만 키린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따름이다.
'하여간 이 녀석도 참...'
다시 하르무에게로 시선을 향하는 부르사이.
"하르무.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넌 어차피 인간계와 환수계만 합치면 되는 것 아냐?"
부르사이가 던진 질문.
그녀는 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왜 주인들끼리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지.
"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 녀석이 있으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거든."
키린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을 하는 하르무.
그의 온 몸에서는 투기가 가라앉아 가는 탓일까.
식어버린 땀이 빠른 속도로 수증기로 변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 미친 짓을 계속 할 것이라고?"
부르사이의 두 눈에 들어온 전장.
환수계에 펼쳐진 지옥이다.
순수한 본능에 몸을 맡긴 그들.
그저 닥치는 대로 물고 뜯고 찢어발기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들을 너나 가릴 것 없이 죽여가는 그들이다.
"그럼~~~ 재미있지 않나?"
두 팔을 벌리며 기뻐하는 하르무.
"미친 놈. 그럼 나는 키린을 돕겠어. 이건 너무나 미친 짓이야."
키린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부르사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하르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주인이 둘이라. 나의 즐거움이 두 배가 되겠어~"
더욱 즐거워질 것 같다.
하르무가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툭 털어 넣었다,.
'뭐지?'
하르무와 마주 본 둘의 눈에 물음이 생기는 그 순간.
하르무의 식어가던 몸이 다시금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
"자아~ 2차전이다. 2명이니 즐거움은 그 배가 되겠지 아마? 으흐흐흐흐흐."
괴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퍼지는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없을 주인들의 대싸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