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남쪽(3)
"아이고... 죽겠다."
벌러덩 바닥에 누워버리는 체스.
"아. 이제 진짜 못해. 못해. 차라리 날 죽여. 허억. 허억."
지난 시간 많은 경험을 했다고 자부할 정도의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건 두 번 다시 못하겠다 진짜.
아예 혀를 내둘러 버리는 체스.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아니 없었다.
체스가 가진 능력.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듯 상대방의 다음 행동이 그려지는 것.
엄밀히 말하면 키린의 능력이었지만 우연찮게 기운과 함께 넘어온 그 능력.
물론 가끔 예외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에외적인 상황.
특히나 지금 정도로 단련된 체스에게는 더욱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잘 보였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부르사이가 든 그녀의 아리따운 꼬리 깃털이 쌔액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몸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확실하게 말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아주 수려한 곡선을 그려내며 피해내는 자신의 몸.
자신이 의도한 바도 아니건만 마치 의도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걸 본 부르사이 왈.
옆구리에 손을 척 올린 그녀.
그리고는 다다다다다다다다.
마치 폭격을 하듯 잔소리를 늘어놓던 부르사이였다.
지금 도대체 개념도 없이 뭘 하는 짓이냐며.
자신이 이렇게까지 귀중한 시간을 사용하며 이렇게 생쇼를 하고 있는데 넌 피하기만 하냐며.
이게 될 일이나며 삿대질까지 하지 않나...
완전 서슬 퍼렇게 달아오른 그녀의 어투였다.
무섭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기세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 체스.
그 이후는 뭐...
그녀는 더도 말고 자신을 딱 반 정도만 죽이겠다는 기세로 자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한 번 휘둘러 질 때마다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슬쩍 움직이기만 해도 소름이 돋게 만들 정도였다.
...저런 걸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들이대야 하다니...
그나마 나름 사정을 봐주는 것이긴 하겠지.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는 체스.
하지만 어디 시정잡배가 휘두르는 몽둥이질도 아니고 무려 주인이다 주인.
다섯 주인 중 한 명이란 말이다.
아무리 키린의 기운을 몸에 둘렀다 한들 그 충격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악하악...
거친 숨소리.
"뭐야? 너무 약한 것 아냐? 벌써 끝나버린 거야?"
기껏 달아올랐는데 벌써 뻗어버리다니.
부르사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정작 당사자는 죽을 맛이었다.
"아이고... 죽겠다구요. 진짜. 그걸 그렇게 사정 없이 후드려 패는 분이 어딨어요."
"언제나 훈련은 실전 같이 모르니? 이렇게 하면 다 네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라고."
"...한 번 더 했다가는 아예 몸이 녹아 없어지겠네요... 그게 봐준 거라니."
"시끄럽고 아직 안 끝났어. 계속 해야지."
그 말에 뜨악 하는 표정을 짓는 체스.
또 시작이라니...
그 사이 부르사이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으흐흐. 다음은 어디를 어떻게 할까. 이거 너무 찰져서 때리는 맛이 좀 있네~.'
실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이렇게 무식하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이런 수고까지 해가며 일부러라도 이렇게 하는 이유.
이 지루한 곳에 재미있는 일이 무에 있겠는가.
격하게 재미없는 이 곳에서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스트레스는?
당연히 쌓이기만 하겠지.
그걸 풀 수 있는 이렇게나 좋은 기회가 왔는데 그걸 마다하면 오히려 바보 아닌가?
이미 시간은 꽤나 흐른 상태였다.
그러나 멀었다.
지금까지 풀린 스트레스를 양으로 따지자면 기껏해야 절반 정도?
'아직 한참 멀었지. 으흐흐흐.'
"빨리 다시 시작하자. 시간이 없어. 얼른!"
체스를 다그치는 부르사이.
그녀의 붉은 두 눈이 일순 반짝였다.
하지만 체스는 그걸 보지도 못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해준다고 할 때 해야 하는 것 또한 맞는 말이지.
자신을 위해 직접 저런 수고를 해주는 것도 어디 보통 정성이겠는가.
그녀의 행동을 완전 잘못 해석한 체스.
끄응차...
온 몸이 뻐근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에 겨우 몸을 추스리는 그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을 바라보는 헬캣.
쯧쯧쯧-
'에휴...'
맞는 놈이나 때리는 놈이나...
그저 혀를 끌끌 차는 헬캣이었다.
****
그 사이 환수계의 중앙.
열쇠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
"저건 왜 아직도 저러고 있지? 아예 본인의 의지로 움직일 생각 자체가 없는 거야?"
둘 중의 한 명.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한 하르무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안의 풍경.
아이 정확히는 열쇠.
그것은 여전히 빠르게 흘러가는 주위의 풍경에 푹 빠져 있는 중이었다.
예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채.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냥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 관여자 녀석이 아직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흠... 그 말도 일리는 있군. 하지만 글쎄... 관여자도 중요하지만 열쇠 자체의 의지도 중요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
호아류의 반응은 하르무에 비해 무관심 그 자체다.
그러니 앓느니 죽는 건 당연히 하르무의 몫이지.
"정 안 되면 관여자의 멱살이라도 잡아서 끌고 와야겠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만도 없는 노릇이지."
하르무의 단호한 말투.
"그럴려면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흠..."
계속 말을 이어가는 하르무의 말에도 그저 미적지근한 호아류의 반응.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다. 너는 알고 있어야겠지. 이 곳을 나가는 그 순간 나
는 키린의 지역을 쓸어버릴 거야."
선전포고다.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하르무.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던 폭풍 전야의 환수계에 드디어 태풍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 모든 환수계가 그 혼란에 휩싸이겠지.
하르무에게 있어 그 정도 혼란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말을 꺼내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하르무가 이렇게 호아류에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
주인들 간에도 미묘하게 다른 입장 때문이었다.
다섯 주인의 위치는 모두 동등하다.
허나 호아류는 약간 다르다.
그는 절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법이 없다.
그저 단지 나머지 주인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할 뿐.
그렇기에 언제나 그는 중립적인 존재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르무와 동일하다.
환수계와 인간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것.
허나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는 호아류였다.
지금처럼.
"응? 그래? 그래."
마치 남일 이야기하듯 툭 내뱉는 호아류의 말투.
놀랄 법도 하건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르무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가 조율자의 역할을 하는 게지.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있어라. 어차피 관여자가 정리될 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듯하니 난 따로 움직이겠다."
통보 아닌 통보.
"배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