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207화 (207/249)

#207

추격(1)

환수계의 어느 곳.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자.

그는 페릴턴.

어느샌가 환수계 안에 들어와 있던 그였다.

열쇠가 풀려난 직후 환수계로 들어와 있던 페릴턴.

그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향하는 곳.

목적지는 열쇠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열쇠와 관여자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사이.

열쇠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관여자가 필요하고 관여자는 열쇠가 있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모든 게 끝이 난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헌데.

뚝-

그런 그의 발걸음을 처음으로 멈춰 세운 자.

환수계에 들어온 이래 그 누구도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자가 없었거늘.

무표정하던 페릴턴의 얼굴이 처음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자신을 막아선 자의 정체를 확인한 페릴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익히 아는 자다.

교류야 딱히 없기는 없지만.

뭐 교류를 할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

"너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선 사내와 눈을 마주 치는 페릴턴.

페릴턴의 말에 풀고 있던 팔짱을 풀며 미소를 보이는 자.

정돈되지 않은 주황빛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날리며 서있는 하르무였다.

"후후. 관여자. 자네. 자네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더군."

다짜고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페릴턴.

자신의 일이라니.

자신의 일이라면 이제 완벽해진 열쇠를 끼운 후 돌리는 일만 남았지 않나.

"무슨 까닭으로 그딴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이지? 주인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함부로 책임지지 못할 말을 마구 내뱉어도 되는 것인가?"

뜬금없이 나타나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하르무의 말에 페릴턴이 반응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둥실-

페릴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등 위로 떠오르는 만병들.

지금 하르무의 말에 페릴턴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워워~ 진정해.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관여자와 싸울 생각은 없어~"

"...그럼 무엇이지? 그게 아니라면 왜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여 나를 도발하는 것이지?"

크흐흐흐흐하하하하하하-

갑작스레 큰 웃음을 터뜨리는 하르무.

"도발이라. 도발이라. 크하하하하. 재미있구나. 주인인 나에게 도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니."

"...똑바로 말을 해라. 만약 받아들일 수 없을 시 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만병들이 하르무를 향해 겨누어졌다.

도전.

...도전.

도전이라...

광오하군.

감히 자신에게 저런 단어를 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말이지?

좋아.

그 정도는 되어야 관여자라고 할 수 있지.

만족스럽다.

어느 새 이만큼이나 성장했을 줄이야.

으흐흐흐흐-

"살기 보게. 관여자이기 이전에 맹수란 말이지? 하긴 인간계의 랭커랬나? 1위를 잡았으니 그럴 정도는 되겠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따끔거리는 살기.

하르무가 자신의 팔을 힐끗 내려다 보았다.

바짝 선 잔털들.

하르무가 자신의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싸우고 싶은데.

이 녀석이라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어쩌면 목이 타는 이 갈증을 풀어줄 지도 모르지.

까드득-

까드득-

손가락을 오므렸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하르무.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동공이 스르릉 풀려가는 하르무였다.

'할까? 말까? 해버릴까? 해야겠지? 아아~ 너무 좋아~'

하르무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지며 어느덧 맹수의 그 눈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두둑-

두두둑-

관절과 관절이 부딪히는 소리.

주변 공기의 흐름이 바뀌어간다.

주인이 뿜어내는 기운에 환수계의 대지 그리고 모든 것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때.

스르륵-

자라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르무 님. 뭐하십니까?"

아.

하르무의 뇌리 깊숙이 파고드는 자라이의 목소리.

순간 욕망이 사그라 들어버렸다.

하아아아아.

자라이의 말에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숨을 내뱉는 하르무.

자신이 왜 이 곳에 온 것인지 다시금 되새긴 것이었다.

게다가 흥도 깨어져 버렸다.

막 불타오를 수 있었는데.

쩝-

"왜 여기까지 왔냐? 좋다가 말았네."

입맛을 다시는 하르무였다.

****

자라이가 직접 하르무를 찾아나선 이유.

그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하나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관여자]

단 한 단어 뿐이었다.

보통 다른 주인들이 저런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남겨놓은 자가 하르무라는 게 큰일이다.

둘이 만난다라...

곱게 끝날 리가 없다.

하르무의 성격을 아는 자라면 백이면 백 싸운다에 걸겠지.

허나 지금 이 상황에서 싸운다는 건 좋지 않다.

싸우는 건 추후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잖은가.

그렇기에 바쁘게 걸음을 옮겨 그를 찾아나섰던 자라이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하르무의 기운을 찾아 한참을 헤맨 후에야 발견한 그는 막 전투태세였다.

후.

미리 찾았기에 망정이지.

불이 붙기 직전에 참여하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자라이였다.

****

"빨리 정리를 하고 가시죠."

에잉-

가득 쌓인 욕구를 발산하지 못한 탓에 입을 빼죽거리는 하르무였으나 그 또한 주인.

자신의 위치 정도는 언제나 자각하고 있는 그였다.

"흥이 떨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리는 하르무.

그를 보며 페릴턴의 만병들 또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던져지는 하르무의 한 마디.

"너 그때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은 것 같던데?"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지. 또 다른 한 명의 관여자."

하르무가 한 말.

그때 마수와 함께 다니던 관여자 그 녀석과의 싸움을 말하는 듯했다.

"그때라면. 그 녀석이 죽은 건 확인했다."

확실하다.

헬캣도 죽였고 그 녀석도 죽였다.

숨이 끊어지는 걸 이미 봤지 않은가.

"아니야. 아니야. 그게 너의 미숙한 점이지. 살아있다."

하르무의 말에 급격히 커지는 페릴턴의 동공.

"...그럴 리가 없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정말이다. 그 녀석 뿐만 아니라 같이 다니던 녀석도 살아있지. 반으로 나뉘어진 관여자의 기운이 다 들어오지 않았을 건데 느끼지 못한 건가?"

하르무의 말에 퍼뜩 자신의 몸을 점검하는 페릴턴.

그러고 보니 관여자의 기운이 늘긴 늘었으나 개미 눈곱 만큼 밖에 늘지 않았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

급격히 흔들리는 페릴턴의 눈동자.

"내 말이 맞지?"

"...그 녀석은 어디에 있지?"

낮게 깔린 페릴턴의 목소리.

그리고 그에 이어진 하르무의 대답.

"개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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