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부자(6)
체스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단어.
정말 알고 싶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 엄청난 빚을 만들고 떠났는지.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고생시켰는지.
그 말에 달란트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였다.
"빚? 무슨 빚?"
무슨 소리를 하는 것지 당최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
...이런... 개...
그 말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체스.
"...빚. 빚 말이야. 비읍. 이. 지읏. 다시 한 번 말해줘야 해? 마수 사냥꾼 협회에 차용증까지 쓰고 갔잖아!!!"
허나.
달란트는 정말 모르는 얼굴이다.
"......"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체스.
체스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엄청난 빚.
평생 걸려도 다 못 갚을 빚만 남겨놓고 떠난 주제에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있지?
아니 어쩌면 척인지도 모르지.
다시 달란트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그 단어야 알지. 그런데 빚이라니. 너 설마 나 모르게 빚 지고 다니냐? 이거 어린 놈이 안되겠구만?"
혀를 끌끌 차는 달란트.
"하아... 아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본인이 빌려간 돈을 잊어버릴 수가 있죠?"
"난 진짜 모르겠... 아! 설마 그건가...?"
뭔가 짚이는 데가 있어 보이는 얼굴.
그리고 잠시 후.
"생각났다. 1억인가 10억인가 가져간 거?"
"그래요! 그거...!!!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데."
발끈하는 체스.
헌데 달란트는 체스가 왜 화를 내는지 아예 짐작도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이다.
"그런데 그거 그냥 가져가라던데?"
"...가져가면서 나한테 대신 변제를 시킨다고 뻔히 적어두고 갔잖아요.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에요? 지금???"
달란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간 것인지 거기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환수계와 인간계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
바로 '돈'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수계에는 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돈을 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지.
"...그래서 그 돈은 다 어떡했어요? 어디에다 쓴 거에요?"
일단 돈을 가져갔다는 건 확실히 자신도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체스가 던진 질문.
혹여나 돈이 남아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체스.
침이 바싹 마른다.
얼마 후.
잠시 그 돈의 행방에 대해 생각하던 달란트가 입을 뗐다.
"다 썼지."
"?????? 그걸 다 썼다구요?"
눈이 동그래진 체스가 되물었다.
"당연하지."
아주 당당한 표정의 달란트.
그의 표정에 되레 말문이 막혀버린 체스였다.
왠지 입 안이 까칠해지는 기분이었다.
****
이어진 달란트의 말.
돈을 쓴 곳은 하르무를 막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했다.
그 많은 돈을 말이다.
정작 하르무를 막지도 못한 주제에.
그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된 달란트.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우선 그 돈을 마정석으로 전부 바꾼 것이었다.
그 후 환수계로 돌아와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언제 그 돈을 다 써버렸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대충 그런 내용의 핑계였다.
그의 말에 헬캣과 막시멈은 그래도 얼추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래. 하르무를 상대하려면 확실히 그 정도는 준비해야지. 암."
-흠. 그건 맞지.
그리고는 갑자기 불이 붙어 버리는 셋.
그들은 하르무를 주제 삼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어느 새 묻혀버린 체스의 말.
이 작자들이 정말...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셋을 쳐다볼 뿐인 체스였다.
****
결국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새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 이것저것 알게 된 사실도 있고 수확도 있긴 했다.
후...
한숨을 푹 쉬는 체스.
일단 수확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건 수확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여하튼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인반수.
자신의 몸이 남들에 비해 월등한 체격을 가진 이유.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빠른 치유력.
이 모든 것들이 환수의 피가 섞인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건 체스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달란트가 만들어 준 빚.
고맙지.
암. 아주 고~~~~~~맙지.
달란트는 모든 것을 체스에게 일임하였다.
자신은 하르무를 막아야 하기에 바쁘다나 뭐라나.
그 말인즉슨 모든 빚은 여전히 체스가 해결해야 한다는 말에 진배 없었다.
가끔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글쎄...
한숨만 늘어가는 체스였다.
그때.
드르륵-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달란트.
"그럼 난 이제 돌아가야겠다."
"가냐?"
말을 많이 한 탓에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막시멈이었다.
"가야지. 여기에서 계속 이야기만 해서 뭘 하겠수? 지금 이 순간에도 하르무는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달란트의 말.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떠난 후 체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존재인지 모든 걸 알게 된 그였다.
하지만 자신이 바로 옆에서 체스가 해야 하는 일을 도와줄 수는 없다.
그는 그 나름대로 하르무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그리고... 헬캣. 이 아이를 잘 부탁하지."
달란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헬캣.
앞으로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체스는 헬캣과 함께 다닐 것이며 또 헬캣은 체스와 늘 함께 있겠지.
-걱정 말아라. 나도 어디 가서 그렇게 쥐어터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그건 안다만은 네 몸."
체스는 잘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은 알 수 있었다.
헬캣의 심장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을.
허나 헬캣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얼른 그를 보내려는 헬캣.
-됐다. 그냥 가라. 말 많네 진짜. 안 바쁘냐? 바쁘다면서.
"으흐흐. 갈 거다. 안 그래도."
말을 마친 달란트의 시선이 헬캣에게서 체스에게로 옮겨갔다.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제대로 못 한 건 안다. 허나 나는 완벽한 환수. 그렇기에 너의 그 인간적인 면에 나의 모든 걸 맞춰줄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너의 관여자로서의 역할 그리고 나의 모든 일이 끝이 난다면 하나는 꼭 약속하마. 네 어미의 무덤에는 꼭 들르겠다."
"그러던가 말던가."
퉁명한 체스의 말투.
그 모습을 본 달란트의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이런 모습은 나랑 판박이군. 다치지 마라."
그리고는 체스의 머리를 마구 휘젓는 달란트의 손.
지금껏 했던 말에 비해 그다지 길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모두는 그의 말투에서 체스에 대한 나름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됐어요."
체스는 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팔만 휘적였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미소를 띠운 달란트.
하지만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는 그.
그렇게 짧디 짧은 부자 간의 상봉은 마무리가 되었다.
후우......
그리고 체스의 긴 한숨이 온 방 안에 퍼져 나갔다.
앞으로도 여전히 바쁠 것 같은 꼬여버린 자신의 인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