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복수(5)
헬캣이 앞발을 들어 슬쩍 쓰러진 자들 중 한 명의 옷을 들추었다.
그 곳에 보이는 건 문양 하나.
-이 녀석들. 그 녀석들이랑 한 패야.
"아!"
확실하다.
예전에 만났던 이들에게서 보았던 문양이 아닌가.
각자의 몸에 그려진 것.
오픈도어의 표식이었다.
-그래. 하긴 환수들 만의 힘으로 이 모든 걸 준비할 수는 없었겠지.
"그런가요?"
-당연하지. 환수들이 넘어온다고는 하지만 이게 생각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엉겁결에 휩쓸려 오는 녀석들도 있지만 특히나 상위 등급의 녀석들은 말이지.
말을 하며 자신이 쓰러뜨린 자들 중 한 명을 툭툭 건드려 깨우는 헬캣.
"으...음...?"
나지막히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나는 한 남자.
순간 그의 두 눈이 놀란 토끼 마냥 확 커졌다.
화들짝 놀란 표정.
게다가 주변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
그리고 또 하나.
눈앞에 떡 하니 자신을 쳐다 보고 있는 마수 한 마리.
"헉! 마... 마수다!"
그런 그를 보며 마냥 사람 좋은 표정을 한 헬캣이 읊조렸다.
허나.
아무리 저런 표정을 지은들...
협박에 진배 없는 그의 말투였다.
-네가 알고 있는 것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하는 게 좋을 것이야.
말을 하며 뒤로 힐끗 곁눈질을 하는 헬캣.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위로 열심히 흔드는 남자였다.
****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는 둘.
-넌 왜 그렇게 아직도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냐?
헬캣이 체스에게 말을 건넸다.
둘이서 걸어온 게 벌써 한참 전이다.
그 동안 체스의 얼굴은 영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라는 분위기는 다 잡으며 지금까지 저런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체스.
뭐 대충 이유가 짐작이야 간다만은.
"이거 원래 이런 기분인가요?"
-뭐가?
"그 왜 하나가 끝이 났으면 개운해야 되는데 오히려 이 더러운 기분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죠?"
-내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말이지. 복수가 마냥 개운하지는 않더라고.
"헬캣 님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흠. 나라고 그런 게 없지는 않지.
조막만한 입을 열어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헬캣.
그렇게 그는 환수계에 있던 당시.
어린 시절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이 곳은 환수계의 끝자락.
온갖 기운이 뒤덤벅이 된 듯한 일렁이는 느낌의 토지.
드넓은 공간.
그 곳에는 울타리가 쳐진 단 하나의 오두막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다.
완전 이질적인 분위기의 토지.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완전 평화로운 듯 보이는 울타리 안의 오두막.
허나 딱히 오가는 사람들은 없는 듯 울타리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때.
오두막에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
슈와아아아-
탁- 탁- 타악-
수십 여 명이 날개를 접으며 가벼운 몸짓으로 땅에 내려선다.
내려선 자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모양새를 한 인물들.
정확히는 인간형의 환수들이다.
"흠. 이번에 끌고 가야 되는데..."
맨 앞에 선 자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자라이.
"정중히 모셔라. 괜히 나대다가 죽지 말고 말이다."
이 곳은 경계.
함부로 날개를 펼 수 없는 곳이었다.
소위 말해 비행금지지역?
솔직히 여기까지 올 일도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기까지 와보는 것도 처음인 자라이였다.
아마 하르무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이 음침한 곳까지는 절대 오지도 않았으리라.
허나 자신은 하르무에게 복종하는 존재.
그가 손을 앞으로 슬쩍 내저었다.
네-
그의 말에 뒤에 내려앉은 환수들이 날개를 접고 저벅저벅 오두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환수 한 마리.
하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한 오두막.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듯.
"흠. 이거 참. 예의를 좀 갖추라고는 했는데."
자라이가 문고리를 슬쩍 잡아 당겼다.
끼이이이이익-
나무로 지어진 문이 너무나도 쉽게 열린다.
얼레?
마치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네.
이렇게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말인즉슨 들어오라는 말이겠지?
자라이가 당당하게 집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갑시다!"
..................
헌데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누가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내어야 할 것 아닌가.
혼자 오래 살았다고 하더니 예의가 없네.
예의가 없어.
쯧쯧쯧-
혀를 끌끌 차며 자라이가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좁은 집을 뒤지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 이 집 안에 생명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텅텅 비었다는 말이다.
스윽-
식탁 위를 손가락으로 한 번 훔치는 자라이.
그리고 손가락 가득 새하얗게 묻어나는 먼지들.
......히이이익.
순간 온 몸에 전기가 통하며 소름이 촤라락 돋아났다.
자신처럼 항상 깔끔함을 추구하는 환수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젠장!!!!!! 이렇게 더러울 수가!!!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나가고 싶었다.
"자라이 님.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어떡할까요? 기다릴까요?"
멈출 수가 없다.
이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이 느낌.
하지만 하르무 님이 당장 데려오라고 했었는데.
오도독- 오도독-
흔들리는 동공.
불안한 듯 잘근잘근 씹어대는 손톱.
몹시도 불안해 하는 자라이의 표정이었다.
이 집의 주인.
자신이 데리러 온 자.
언젠가는 올 터.
그래 오겠지.
허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젠자아아아아아아앙.'
속으로 벌써 열 번도 더 고함을 질러 댄 자라이였다.
****
"...자라이 님?"
"자라이 님?"
연거푸 그를 불러대는 부하의 목소리.
"그럼 이건 어떨까요? 좀 물러나서 자라이 님이 안정을 찾으실 수 있는 곳에서 머물다가... 온 것 같으면 바로 여기로 와서 데리고 갈까요?"
"응? 잠깐... 그럼 한 녀석만 여기에 박아두면 되겠네? 그렇지?"
"그렇죠. 어차피 저희도 여기에 제일 빨리 올 수 있는 곳으로 오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하르무 님이 시키신 일도 다 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래. 네가 남아 있어라."
"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걸음을 옮기는 자라이.
옳다구나 하며 얼른 오두막을 나가버리는 자라이였다.
"......참나..."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머리가 그렇게나 잘 돌아가는 양반이 어째 조금만이라도 더러운 곳에 오면 저리도 정신을 못 차리는지 원.
그 사이 자신과 함께 왔던 다른 환수들은 모두 자라이와 이미 떠나버렸다.
"아. 그런데 나 여기 주인의 얼굴도 모르는데...?"
이런 제기랄.
"자라이 님!!! 잠깐만요!!!!!!"
남아있던 환수는 얼른 밖으로 나가 다시 자라이를 쫓아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