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조우(8)
강력한 바람은 전장에 있던 모두를 날려 버렸다.
"윽..."
퉤퉤퉤-
입 안에 가득 들어찬 모래를 뱉어내는 체스.
방금까지 분명히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바람에 지금 이 꼴이 되어 버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원래 있던 지역에서부터 제법 멀리까지 날려온 것 같았다.
도대체가 그 모두를 이렇게 한꺼번에 날릴 정도의 바람이라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고개를 흔들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키는 체스.
그러고 보니 헬캣도 어디로 날려가 버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아니. 내 귀여운 애완동물마저 날아가 버릴 정도란 말이야? 얘는 또 어디로 간 거야? 하여간 약해빠져서는."
혀를 끌끌 차는 체스.
-너 나 없을 때 그렇게 뒷담화 까고 다니냐???
헉-
목소리의 주인공은 체스의 머리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 땀.
체스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위를 향했다.
그리고 그 위.
나뭇가지에 턱을 괸 채 앉아있는 작아진 헬캣.
그는 눈꼬리를 한껏 치켜뜬 채 자신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뭐 귀신이라도 봤냐? 너무 약해서 그 바람에 죽기라도 했을까 봐? 아이고~ 예. 뭐 저 같이 약한 놈은 죽을 수도 있습죠. 우리 강하디 강하신 체스 님은 당연히 멀쩡하시겠죠?
'...화났네...'
저 말투.
단어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날이 잔뜩 서려 있다.
"...에헤헤... 그럴 리가 있나요~ 그저 좀 안 보이셔서... 제가 얼마나 걱정하는 지 뻔히 알면서."
-아~ 걱정이 되면 인간들은 그렇게들 이야기하나봐? 내가 환수라 그걸 또 몰랐네 그래.
"그건 뒷담화가 아니라..."
우물쭈물 핑계를 대는 체스.
...그래도 이럴 때에는 또 효과가 극명히 나타나는 게 있지.
주변에 널린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가지를 슬쩍 들어 올리는 체스가 헬캣 쪽을 다시 쳐다 보았다.
-이... 미친 놈이!
저 미친 놈.
의도가 지극히 불손하다.
체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헬캣이 막 뛰어 내리려는 찰나.
체스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손에 든 나뭇가지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팟-
순간 그 움직임에 반응해 버리는 헬캣.
어느 새 그의 몸은 바닥으로 내려와 두 앞발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잡고는 강하게 꾸욱 쥐고 있었다.
탐스러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면서 말이다.
후후후후-
그때 헬캣의 귀에 들려오는 체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
아...
-...젠장.
이 죽일 놈에 본능...
또 말려 버렸다.
-...꼭... 이렇게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이렇게 안 하면 계속 삐쳐있을 거잖아요."
그 와중에도 체스의 한 손은 멈출 생각을 않은 채 계속해서 손에 든 나뭇가지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중이었다.
타합-
헙-
타합-
헙-
다시 몇 번의 점프가 더 이어졌다.
이성보다 본능이 몸을 지배해 버린 결과였다.
순간 훅 밀려오는 수치심 그리고 자괴감, 굴욕감...
크흐흡.
-그만! 이제 그만! 제발!
헬캣의 절규.
허나 들리는 둥 마는 둥.
그의 앞에는 체스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서있을 뿐이었다.
****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이게 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된 둘.
-열쇠가 만들어진 것 같다.
혀를 쭉 내민 채 말을 하는 헬캣.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체스.
보통 간단한 게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심각하다고 해야겠지.
"에? 그게 정말인가요???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그럼 이제 다 연결이 되어 버린 건가요???"
-아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통로가 안개 속에 갇힌 듯 변해 버렸다. 전체가 말이지.
"엥??? 그건 또 말이 안되지 않나요? 반쯤 열려있었다면서요. 그게 왜 또 갑자기 그렇게 변한다는 거에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체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헬캣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지금까지 움직인 이유는 열쇠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열쇠가 만들어진다면 곧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니.
그런데 되레 '안개 속에 갇힌 듯' 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우리도 이렇게 열쇠가 만들어 지는 걸 보는 건 또 처음이라... 나도 확실히 잘 모르겠다.
고심에 빠진 헬캣.
헬캣도 이 현상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자신도 열쇠가 만들어지면 바로 두 세계가 연결될 줄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모두가 그렇게 움직인 것 아니었던가.
헌데 작금의 이 상황이란...
되레 막혀버린 듯한 두 세계의 연결.
-이거 좀 알아봐야겠다. 켄타 녀석이라면 알 지 모르겠다. 아니면 배코나 호아류 같은 주인들은 알 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럼 우리를 여기까지 날린 게 열쇠가 만들어지면서 생긴 건 맞는 거에요? 뭐 열쇠가 잘못 완성이 되었다거나 해서 벌어졌다던지 그런 가능성은 없나요?"
-그런 건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통로가 변해 버린 건 또 맞거든. 그런데 보통 열쇠가 완성이 되면 그냥 열쇠를 어디 끼워서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아주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다.
열쇠에 대해.
하지만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신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열쇠에 대해 많은 장치를 해둔 것 같다.
하긴 자신이 아껴 마지않던 존재들인 인간들이니 열쇠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두 세계가 연결이 되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그럼 다시 열쇠를 찾으러 가야 하는 건가요?"
-이 일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자가 있지.
"그게 누군데요?"
-아직 살아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의 끝에 혼자 사는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이 모른다면 아마 모든 존재가 모르는 것일걸?
"... 굉장한 사람이네요."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녀석이다. 반인반환이니까.
"네?????? 그 말인즉슨...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거 아니다. 그래도... 그... 환수랑 인간이랑... 응응응해서 응응응했다는... 뭐 그런 말인...가요?"
-자식아. 자세한 건 묻지 말고. 가보면 안다.
헬캣은 한시라도 빨리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자를 찾는 게 급선무.
처음에는 켄타에게 찾아가려 했으나 인간계 어디에도 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환수계로 돌아갔다는 말이겠지.
아마도.
-가자.
"어디로요?"
-내가 얘기한 그 자를 만나러 가야지.
"아... 그렇죠."
주섬주섬 준비를 한 체스.
그리고 둘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체스의 몸이 멈칫거렸다.
-뭐냐?
갑자기 걸음을 멈춘 체스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그를 돌아보는 헬캣.
"... 저것들."
진득한 살기가 잔뜩 묻어난 체스의 목소리.
지금껏 체스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던 헬캣의 눈에 순간 의아함이 서렸다.
도대체 누굴 보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체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헬캣.
그 곳에는 여러 명의 인간들이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