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180화 (180/249)

#180

조우(1)

두 남자가 서있다.

페릴턴 그리고 레스티.

그리고 둘이 서있는 주위의 땅.

여기저기 구덩이가 패인 게 완전 만신창이였다.

누가 봐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이 곳.

이미 황폐해진 땅 만큼 둘의 모습도 처참했다.

뚝- 뚝-

페릴턴의 팔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

그의 옷은 여기저기 부욱 찢겨져 나간 게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

역시 랭킹 1위라는 그 타이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페릴턴의 맞은편에 서있는 레스티.

경단 모양으로 가지런히 묶여져 있던 그의 머리끈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봉두난발이 되어버린 그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뭔가 발톱 같은 것에 마구 할퀴어진 듯 찢겨져 나간 그의 옷.

그 탓인가 오늘따라 왜소한 그의 몸은 더욱 왜소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구. 삭신이야."

어깨가 결리는지 팔을 빙빙 돌리는 레스티.

한 바퀴씩 그의 어깨가 돌아갈 때마다 두두둑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후우. 이제 체력이 부치는구만. 염파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래도 뭔가 요행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거늘 그게 아니었군."

"영광이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페릴턴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사의 표현을 했다.

자신이 목표로 삼던 남자에게 이런 칭찬을 들을 줄이야.

마수 사냥꾼이 된 이래 이리 즐거운 적이 있던가.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미소라면 미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까 자네랑 손을 섞으면서 깨달았는데 뭔가 이상한 게 있더군. 자네에게서 마수의 힘이 느껴지는 건 나 만의 착각이 아니겠지?"

"안 그래도 마무리는 이걸로 끝을 내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힘을 끌어내는 페릴턴.

순간 그의 몸 깊은 곳 중단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격한 중단의 움직임과 함께 상단과 하단을 동시에 아우르는 그의 기운.

크와아아아아아-

화악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페릴턴의 몸 위로 스아아 떠오르는 바로 마수의 흉폭한 그 기운.

그것들은 페릴턴의 기운과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가며 하나의 기운이 되어갔다.

"흐음. 그것. 자네가 스스로 얻은 건가?"

레스티.

괜히 바지사장 마냥 마수 협회의 협회장의 자리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주인들.

인간계에 있어 가장 위험한 존재들.

그들 사이의 갈등 또한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 그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가 지금 혼자 움직이는 것이겠지.

문의 존재라는 것.

허투루 나섰다가 꼬리만 자르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에 오히려 혼자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을 열려고 하는 집단.

오픈도어의 존재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사전에 처리하지 않은 이유는 워낙 숨어 있었기에 찾지를 못했던 것일 뿐.

그리고 드디어 확실히 모든 걸 알게 된 그는 잔챙이들은 나머지들에게 맡긴 후 혼자 머리를 자르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던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을 막아선 페릴턴.

자신의 목적지에 다소 늦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정한 문제는...

지금 이 녀석과의 전투가 쉬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게다가 저 기운은 주인의 기운이다.

그것도 저 녀석의 기운과 완벽하게 합쳐진 기운들.

저 녀석은 관여자다.

잠시 후.

페릴턴의 어깨 위로 사라락 가라앉은 정제된 기운들.

몹시도 부담스러운 기운이었다.

"후배로서 선배에 대한 예우를 해드리겠습니다."

"허허허. 낯간지럽구만. 선배라니."

말은 웃지만 내심은 몹시도 긴장한 상태.

'이거 자칫 잘못하면 신에게 악수를 하러 가겠구만.'

"자. 그럼."

고개를 잠시 숙인 페릴턴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갔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페릴턴의 기운.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 매인 만병들이 함께 움직였다.

각자 의지를 가진 것 마냥 빠르게 움직이는 만병들.

슈와아아아악-

페릴턴의 몸보다 만병들이 훨씬 빨랐다.

허나 가만히 당할 레스티가 아니다.

어느 새 합장을 하듯 모아진 그의 손.

하압-

도저히 저 나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힘찬 기합소리.

동시에 그의 손이 마치 공을 던지듯 크게 포물선을 그려댔다.

레스티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 그려지는 그의 손.

일순 허공에 떠오른 기운은 만병을 그대로 채어갔다.

촤좌작-

손아귀 한가득 채어지는 페릴턴의 만병들.

손아귀에 잡힌 만병들은 레스티의 기운에 반항했으나그것도 잠시 그 막강한 기운에 힘을 잃고 땅바닥에 패대개쳐졌다.

하지만 그 사이 흉폭한 기운이 레스티를 덮쳐왔다.

이대로 그 기운에 노출이 된다면 온몸이 찢겨져 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뻗었던 손을 다시 모아내며 하나의 원을 그려냈다.

샤아아아아아-

그리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둘의 기운.

쿠콰콰콰콰콰콰쾅-!!!!!!

허나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이어 쏟아지는 공격.

그럴수록 레스티의 손은 더욱 빠르게 교차해 가며 수십 여 개의 원을 그려냈다.

버티고 또 버텼다.

뚫는 자 그리고 막아내는 자.

그리고 끝났다 싶을 때 이어진 강력한 한 방.

콰아아앙-

순간 레스티가 그리던 방어가 깨졌다.

주르륵 뒤로 밀려나는 그의 몸.

잠시 후.

레스티가 구부정하게 숙였던 자신의 몸을 폈다.

두두둑-

허리에서 관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노인에 대한 공격이 없군. 자네. 쉽지 않네. 쉽지 않아. 오늘은 화가 훨씬 많은 날이군. 허허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레스티.

"자네 관여자지?"

"관여자를 안다라... 이야기가 훨씬 쉽겠군."

"내가 이래 뵈도 좀 오래 살아서 좀 아는 게 많다네. 그나저나 관여자가 하필이면 환수들 쪽에 붙다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나? 게다가 그 힘. 내가 보기에는 하르무 같은데."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으시군요. 그리고 이게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답이 없군.

답이 없어.

저리도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레스티는 다시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했다.

옷이 좀 망가진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머리도 다시 묶고 몸에 묻은 먼지도 털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내가 여기에서 자네를 막으면 되는 것이겠지?"

"할 수 있다면."

어깨을 으쓱거리는 페릴턴.

"좋아. 이제 전력으로 가겠네. 원래는 주인들을 만났을 때 쓰려고 했지만 말이야. 자네는 그만한 자격이 있어. 암."

합장을 시작하는 레스티.

그의 주변으로 고오한 기운이 물씬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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