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통로(6)
"아참. 내 정신 좀 봐~ 잠깐만~ 곧 끝나. 입술만 바르면 돼."
음음음~
마무리로 입술까지 다시 한 번 점검한 그녀는 소리가 울린 곳으로 나풀나풀 날아갔다.
"나 왔어~"
"왜 왔냐? 그리고 뜨거우니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는 말아줄래?"
"오호호호호. 그럴수록 내가 더 앵겨붙고 싶잖니~"
교태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사방이 닫혀있는 방 쪽으로 더욱 몸을 찰싹 붙이는 그녀.
"야이씨. 좀~"
"아휴~ 까탈스럽기는. 하여간 넌 그런 점이 참 매력적이라니까능~"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참참참. 너 빼내주려고 왔지~"
순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머지 녀석들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방 안에 갇혀있는 키린에게서 말이 흘러 나왔다.
"뭐~ 내가 하겠다는데 무슨 대수야? 난 늘 저지르고 생각했지 생각하고 저지르는 타입이 아닌 걸 알잖아~"
"야. 너..."
엄청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그녀.
현재 키린은 공식적으로 잡혀 있는 상태.
솔직히 키린이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해서 안 나간 게 아닌 걸 뻔히 알고 있을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신의 입지 따위는 신경을 안 쓴다는 것에 진배없는 말이다.
완전히 큰 결심을 한 것이지.
뭐 어떤 의미로는 노선을 확실히 정한다는 것이기도 하고.
허나.
안 될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키린이었다.
"그래도 규칙이라는 게 있잖아. 더군다나 우리처럼 환수계를 다스리는 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절대 안 될 말이지. 아니야. 절대 그건 안 될 것 같아. 너까지 합쳐도 한 녀석이 더 필요해. 그러면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참 답답한 소리하네. 너 지금 하르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키린의 말에 순간 부르사이가 발끈했다.
이 고리타분한 녀석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저딴 신선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져 있다 진짜.
늘 봐온 놈이지만 정말이지 답답하기 그지없는 녀석 아닌가.
"...왜? 무슨 일 있냐?"
이 곳 키린이 잡혀 있는 곳.
켄타는 쉬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오는 건 자유지만 그 뒷감당은 오롯이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 정말 아무 것도 모르네. 하긴 켄타가 오기도 애매하지. 지금 그 하르무 그 자식. 통로를 열려고 완전 열중이라고."
부르사이의 말이 끝난 직후.
순간 키린이 갇혀 있는 방 전체가 냉기에 휩싸였다.
쩍- 쩌억-
벽면 전체가 얼어간다.
그리고 공중에 둥둥 떠있는 정육면체의 방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간다.
한 지역의 주인의 분노.
그 분노를 방 전체가 고스란히 받고 있는 것이었다.
'짜식. 이제야 좀 키린답네.'
그 모습을 본 부르사이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키린 이 녀석.
지금이야 저렇게 차분하고 한없이 자애롭게 보이지만 주인이 되기 전의 모습은...
환수계의 제일 골칫덩어리인 녀석이었다.
틈만 나면 다른 지역의 환수들을 쥐어 패질 않나.
그때 정말 큰 사고를 한 번 쳤을 때 뭐라더라?
기분이 안 좋아서 패고 기분이 좋아서 패고 그저 눈을 떴을 때 너무 평범한 일과라서 팼다나 뭐라나...
하여간 낮은 등급의 환수들은 키린의 그림자만 봐도 도망가기 바쁠 정도로 환수계 최고의 깡패에 진배 없었다.
피식-
'그럼 조금 도와줘볼까? 이힛.'
퍼어어어억-
부르사이의 날개 한 쪽이 벽 한 쪽을 쿠웅 내리쳤다.
후두둑-
구멍이 뻥 뚫려버린 한쪽 벽면.
그리고 그 안에는 어안벙벙한 표정의 키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얼레? 내 날개가 미끄러져버렸네? 아이쿠~ 저런~ 큰일났네?"
"이야~ 이거 완전 골 때리는 녀석이네 진짜......"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의 키린.
자신은 생각만 하던 걸 이렇게나 쉽게 행동으로 옮겨버릴 줄이야...
"이러면 네가 스스로 나간 거 아니잖아 그치? 아하하하하하하."
"휴...... 넌 정말..."
이렇게 된 이상 일단은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뭐 굳이 인과 관계를 따지자면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또 무슨 핑계를 생각해야겠지.
...아마도...
뭔가를 생각하는 듯 키린의 표정은 나름 진지했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이 섰는지 한 발을 밖으로 내딛기 시작한 키린.
"키린. 그래도 나름 출소한 건데 환석이라도 부드럽게 펴서 들고 왔어야 되는데 미안하다야.이히히히."
"...넌 지금 그 소리가 나오냐? 이제 더 골치가 아파질 건데."
"에이~ 뭐 어때.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나왓잖냐? 애가 왜 이렇게 툴툴거려 자꾸만.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찰싹 달라 붙어서 안 떨어질 거다?"
"알았다. 알았어~"
서로 틱틱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둘은 그대로 허공을 날아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한쪽 벽면이 뻥 뚫려버린 방만 덩그라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온통 크리스탈로 가득 찬 곳.
하지만 희한하게도 밝은 빛 대신 어둠 일색인 곳.
주변을 흐르는 공기조차도 그 압박감에 쉬이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이다.
그 누구의 접근도 거부하는 듯한 이 곳.
이 곳을 지배하는 건 침묵 그리고 주위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뿐이었다.
그리고 이 곳의 끝자락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있는 자.
허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주변이 너무 어두운 탓이었다.
그때.
그의 침묵을 깨뜨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갔습니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한 사내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단 한 마디의 말은 크리스탈에 반사되며 이 곳 전체에 웅웅 울려퍼진다.
"그래?"
"그렇습니다."
"그가 스스로 열고 나갔나?"
"아닙니다. 남쪽이 합류했습니다."
"흐음. 그렇군. 하르무는"
"북쪽은 전면에 나서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인간계에서 돌아왔나?"
"아직 돌아오지는 않은 듯합니다. 북쪽 전체 중 일부만 빠져나갔습니다."
"자라이도 움직였나?"
"그렇습니다."
"그렇군."
매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오고 간다.
게다가 대부분 단답형으로 끝이 나는 그들의 대화.
하지만 그것 만으로도 중요한 부분은 전부 전달이 되었다.
"변동사항이 있으면 또 알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다녀올까요?
"아니. 그럴 일은 아직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전 계속해서 추이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 곳을 떠나는 한 명.
이제 남은 건 계속해서 자리에 앉아있는 자 한 명 뿐이었다.
"어떻게 움직일 것이냐."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는 그대로 닫혀버린 입.
그렇게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