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168화 (168/249)

#168

2번째 만남(5)

"정신을 잃었나?"

헬캣을 처리하고 온 페릴턴이었다.

여전히 체스는 누워있는 채였다.

비록 무시할 정도로 형편없는 관여자의 실력이기는 해도 또 맷집이 딸려 보인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 여하튼 결과는 이런 꼴이니.

저벅저벅-

페릴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마무리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페릴턴.

그는 만병 중 하나인 검을 꺼내들며 걸음을 계속 이어갔다.

번득-

빛에 반사된 예리하게 갈려진 검날이 순간 반짝이며 페릴턴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일순 찌푸려지는 페릴턴의 눈.

바로 그 순간.

눈을 번쩍 뜨는 체스.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자마자 지척에 다가온 페릴턴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까 자신의 머릿속에 속삭이던 목소리.

그는 그가 던져준 가르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단, 상단 그리고 다시 중단, 하단 마지막으로 다시 중단.

중단의 씨앗을 빠른 속도로 돌려가며 그 자가 이야기하던 기운을 느끼기 위해 애쓰는 체스.

페릴턴이 다가올 그때 체스의 몸 안에 있는 중단의 씨앗은 맹렬히 회전 중이었다.

손 끝까지 퍼져 있는 그 자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몸 구석구석을 탐색하던 체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처음 뭣도 모를 때에는 자신의 몸에서 그 기운이 느껴지긴 했었으나 삼단을 모두 개방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숨어버린 기운이었다.

그래서 아예 존재조차 잊고 있던 그 기운.

하지만 지금은 그 힘이 무엇보다 절실한 체스였다.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계약금도 받았고...

'...어딨냐??? 빨리 나와라 조~~~오오오옴.'

빨리 찾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기운이 있으면 자신은 분명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자를 이길지도.

열 걸음.

아홉 걸음.

여덟 걸음.

.

.

.

그리고 네 걸음.

또 세 걸음.

페릴턴과 체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이씨... 어디에 있는 거야? 분명히 뭔가가 있는 건 알고 있는데.'

안달이 났다.

등에서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른다.

...더 이상 늦으면 죽이건 밥이건 나발이건 오히려 똥물에 코를 박고 죽을 판이다.

그때.

바로 그때!

움찔-

체스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자신의 감각에 걸리는 어떤 것.

중단의 씨앗에서부터 퍼져나간 싹에 걸려든 그것은 청량하고도 지극히 냉랭한 기운.

싹을 뻗어 조금 더 자신의 중단으로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몸 안 가득 차갑기 그지없는 기운이 느껴져갔다.

어마어마한 기운을 품고 있는 그것.

감히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은 체스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왜 이제야 자신이 이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진작에 알았다면 이렇게 두들겨 맞아 바닥에 널부러지거나 하는 일도 애진즉 없었을 것 아닌가.

할 수 있다.

이것이 있다면 눈앞에 이 무시무시한 놈과도 비벼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더욱 더 기운을 당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체스였다.

****

그리고.

마침내 한 걸음 앞.

"흠. 꼴사납군."

체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페릴턴이 입을 열었다.

그의 등 뒤로 둥실 떠올라 있는 만병들.

전투 내내 줄곧 한결같던 그의 모습이지만 느껴지는 살기에 새삼스레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무엇이 좋을까?"

페릴턴은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체스를 아예 보내버릴 무기를 고르기 시작하는 그.

무기 하나를 고르며 체스를 한 번 보고 또 무기를 고르는 그의 모습은 몹시도 신중하게 보였다.

"흠. 이게 좋겠군."

페릴턴의 또 한 번의 중얼거림.

그리고 바로 그때 체스가 움직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튀어 오른 것이겠지.

그는 터질 듯한 근육으로 둘러쌓인 장딴지를 이용해 폭발하듯이 땅을 디디며 마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힘차게 온 몸을 튕겨대며 몸을 날렸다.

파닥이는 듯한 그의 몸짓.

하지만 그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체스의 몸에서 퍼져 나가는 시리도록 차갑고도 청명한 기운.

"그래. 역시 그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순간 페릴턴의 손보다 먼저 반응하는 만병들.

페릴턴이 끌어낸 하르무의 힘에 적셔진 만병들은 그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체스가 내민 대검의 칼 끝을 향해 맞붙어 가는 만병들.

그것들은 오로지 하나의 점만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째애애애애애애앵-

순간 충돌하는 둘의 힘.

그리고 스와아아아아 퍼져 나가는 체스의 기운.

...조심해야한다던 그 기운이었던가?

일순 만병들의 끝 부분이 얼어버렸다.

'이 기운.'

페릴턴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인의 기운이다.

확실하다.

주인의 기운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힘에 맞붙을 수 있는 힘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제야 알겠다.

자신이 하르무의 기운을 가진 것처럼 이 녀석 역시 주인의 힘을 가진 것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군.

주인들끼리도 모두 생각이 같지 않다는 것.

하지만 다시 발악이 시작되었으니 응당 거기에 어울리는 것.

그것 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솔직히 관여자가 된 자신이지만 관여자가 어떻고 마수들이 넘어오고 이런 자잘한 것들 따위는 완전 무관심이다.

그저 강한 자와 붙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궁극적인 자신의 목표이니까.

그 사이에도 만병들의 끝날은 점점 얼어붙어 가는 중이었다.

'안되지. 안돼.'

페릴턴은 만병들을 다시 회수해 가며 자신의 기운으로 체스의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검을 쥔 채 체스와 다시 맞붙어 가는 그.

동시에 하르무의 기운으로 가득 찬 만병들도 당연한 일마냥 체스에게 쇄도해 갔다.

쾅-

다시 한 번 부딪히는 둘.

샥-

둘의 거리가 다시 벌려지는가 싶더니 다시 체스로부터의 공격이 이어졌다.

까앙-!!!

하지만 만병 중의 하나인 창이 창날을 들이대며 그의 검을 막아간다.

순간 나머지 만병들이 체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촤아아아악-

만병들이 스쳐지나간 피부에서부터 피가 흩뿌려진다.

크흑-

아픔이 느껴지는 듯 순간 일그러지는 체스의 표정.

하지만 키린의 기운은 빙속성.

극한의 영도, 극한의 차가움이 바로 키린의 주요 기운이었다.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는 체스의 상처들.

그럼에 따라 그의 대검은 더욱 시리게 파란 기운이 강해져 갔다.

하아아압-!!!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다시 검을 꼬나든 체스.

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 큰 덩치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 게 페릴턴의 시선은 그를 쫓아가기에도 버거울 정도이다.

'노환인가?'

흠.

아니지.

잠시 보이지도 않던 체스를 좇던 그의 시선.

따악-

페릴턴이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순간 만병들의 움직임이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어디론가 쏘아지기 시작하는 만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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