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문(3)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이어진 곳.
하나의 길로만 쭉 이어진 통로였다.
통로의 주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뿌연 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마치 희뿌연 안개처럼 그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몽롱하게 보이는 주변.
덕분에 통로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건 어쩌면 그것들 때문에 벌어진 착시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침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샤악- 샤악-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다수가 일으키는 조그마한 소음.
허나 그 소리는 멀리 퍼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주변에 묻혀갔다.
차츰 가까워지는 소리.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라이를 비롯한 다수의 인원들이었다.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어디론가 열심히 향하는 그들.
그들의 목적지는 인간계였다.
“자라이 님.”
“왜 불러?”
선두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라이에게 말을 건넨 건 그의 옆에 붙어 달리던 또 한 마리의 환수.
자이로는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힐끗 돌렸다.
이번에 자신이 데리고 가는 환수들.
처음부터 특별 임무를 하기 위해 하르무와 자라이가 심혈을 기울여 교육을 시킨 녀석들이었다.
종족은 제각각.
하지만 이 녀석들에게 종족이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 직속상관은 오로지 자라이와 하르무.
나머지 주인들의 말은 절대 듣지 않는 그들이었다.
오죽하면 나머지 주인들마저 혀를 내두르겠는가?
특히나 부르사이 같은 경우는 가뜩이나 불 같은 성격을 가진 탓이라 이들을 만나면 오히려 의식적으로 피하곤 했다.
분명히 충돌이 일어나면 갈등이 생길 것이고 갈등은 분란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성격 상 참지 못할 것을 아니까 말이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고 주인들끼리의 싸움은 아무래도 그녀로서도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
“드디어 우리도 인간계로 넘어가는 데 아무런 제약을 안 받을 수 있겠네요?”
“그렇지. 먹이 경쟁도 이제 편해질 것이고 다시 그 예전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 먼 옛날 인간들이 그저 우리의 먹이, 가축 이런 역할을 할 때로 말이야.”
“역시 하르무 님이시군요. 정말이지 다른 주인들에 비해서 우리 하르무 님은 아예 격이 다른 분이신 것 같아요.”
하르무에 대해 칭찬일색을 늘어놓는 환수 한 마리.
그의 말투에는 하르무에 대한 존경심이 넘칠 정도로 묻어 있었다.
하긴 그럴 수 밖에 없지.
하르무가 다른 주인들에 비해 야심이 넘치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계와 환수계를 연결한다는 것.
어마어마한 계획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렇게 하르무를 따르는 이유.
다른 주인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르무는 진정으로 북쪽의 환수들에게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지역의 주인들에 비해 좀더 열성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한 것.
그의 말.
그의 행동.
그의 몸짓.
게다가 저 넘치는 카리스마와 리더십.
하르무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찬양, 존경 그리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건 말이다.
바로 그때.
그들이 달려가는 통로의 양쪽 편에서 무언가가 화악 느껴졌다.
당연히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자라이.
그는 이 몹시도 신경을 긁어대는 기운들이 누구의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살기랄까.
아니 살기라기보디는 좀더 고차원적인 기운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경계태세를 극도로 끌어올린 그.
그의 알림에 따라 자라이의 주변을 내달리던 환수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리졌다.
그걸 알아차린 나머지 환수들의 행동 또한 더욱 기민해져 간다.
순간 통로의 틈 사이로 치고 들어오는 환수들.
‘역시 올 줄 알았지. 하르무 님의 말이 틀리지 않았군.’
자라이의 얼굴에 미소가 사악 떠올랐다.
****
나타난 자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짜고짜 손을 뻗으며 자라이 일행들을 공격해 가는 그들.
자라이는 나타난 자들의 면면을 세세하게 훑어보았다.
‘뭐냐. 없잖아.’
자라이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이들에게 공격을 걸어온 환수들.
이 자들은 통로를 여는 것에 대해 극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가진 집단이었다.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규모가 여기에 속해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지만 꽤나 모여 있는 걸로 위에서는 파악을 하고 있었다.
모인 환수들은 대부분은 그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
그렇기에 그들은 주인들에게 구애를 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있는 환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자.
모든 것은 신비투성이인 자.
그 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지금까지의 활약상으로 봤을 때 확실히 강한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래도 주인들보다는 부족하겠지.
그러니 대놓고 공격을 하지는 못하는 것일 것이다.
뭐 강하기는 확실히 강해서 자신들도 이 녀석들 때문에 꽤나 물을 먹은 적이 있었다.
잠시 통로 안에서 벌어진 전투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자라이.
그런 그에게도 어김없이 치고 들어오는 공격.
크롸아아아악-!!!
하지만 자라이가 누구인가.
하르무의 최측근이자 자신 또한 SS등급의 환수.
한 마디로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되레 당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자신의 공간에 잔상을 남기는 하르무.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온 자의 얼굴을 덥석 움켜쥐었다.
헙-!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것도 놀랄 노자인데 거기에 반격까지...?
하지만 그 생각은 곧 그가 살아 생전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 되었다.
갑작스레 강해지는 압력.
얼굴에 밀려 들어오는 압력에 붙잡힌 환수는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거렸으나 자라이의 손이 훨씬 빨랐다.
퍼어어어어어어-
수박 터지듯 산산조각이 나며 터져 나가는 환수의 모습.
그리고 그 사체는 이내 통로에 털썩 나뒹굴었다.
스스스스-
먼지가 되어 사라락 흩어져 가는 사체.
팔,다리 그리고 몸통까지.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자라이.
“뭐냐? 고작 A급이야? 참나. 기가 막히네 막혀.”
자라이의 자존심에 살짝 스크래치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감히 자신을 상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허접한 녀석들만 이렇게 한 다스를 보낸다는 거지?
하아. 이런 자들은 시간 때우기도 안 되잖아.
이들을 이끄는 자와 직접 붙어보고 싶었는데.
“뭐하냐???!!! 빨리빨리 처리해라!”
잔뜩 골이 난 자라이의 목소리가 통로에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데리고 온 녀석들 중 몇몇은 당하긴 했으나 누가 봐도 자신들의 승리였다.
“이것들 참.”
자라이가 다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