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157화 (157/249)

#157

문(2)

끝이 없을 정도로 펼쳐진 초원.

나무 한 그루 없는 오로지 풀만 가득한 곳.

환수계 중 이렇게 초원으로 가득한 곳은 단 한 곳 밖에는 없다.

이 곳은 바로 환수계의 북쪽.

하르무가 주인인 곳이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어째 좀 다른 것 같다.

알려지기로는 환수계에서 가장 호전적이라 알려진 환수계 북쪽의 환수들이 아닌가.

헌데 저리도 평화스로울 수가.

북쪽 그 곳은 지극히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커다란 환수들.

그리고 곳곳에 들려오는 환수들의 지저귀는 울음소리.

아마도 환수계에서 지금 이 순간 가장 평화로운 곳은 이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초원의 정중앙.

그 곳에는 성벽 전체가 덩굴로 뒤덮인 커다란 성 한 채가 있었다.

초원을 거니는 다른 환수들은 그 곳에 누가 있는지 뻔히 아는 양 성 주변으로는 절대 접근을 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초원 정중앙에 덩그라니 세워진 성 한 채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부터 풍겨나오는 위압감은 온 초원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위압감의 존재는 성 내부에서 버티고 서있는 자.

바로 뒷짐을 진 채 굳건히 서있는 하르무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

그리고 드디어 그의 입을 열게 만들 존재 하나가 그의 앞에 섰다.

"하르무 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

그 말에 굳건히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벌어진다.

"그래??? 다 준비가 되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2개의 열쇠를 모두 구했다고 합니다."

"좋아. 크하하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성 전체를 뒤흔든다.

심히 만족해 하는 그의 얼굴이었다.

"자라이. 네가 넘어갈 테냐?"

"네. 어글리불이 거기에 있으니 제가 아무래도 넘어가야겠죠."

"우후후. 좋아. 나머지 녀석들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부르사이 님이 키린 님에게 찾아간 것 같더라구요."

"부르사이 녀석. 애쓰는구만."

말은 그렇게 툭툭 내뱉는 듯 보이지만 내심 주인들의 동태를 신경쓸 수 밖에 없는 하르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립을 지키고 있는 부르사이지만 워낙 키린과 친한 그녀였다.

게다가 말이 중립이지 엄밀히 따지면 문을 여는 것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도 하는 그녀였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가 키린에게 찾아갔다고 하니.

"뭐 어찌 되었든 간에 호아류의 결정이 우리의 손을 들어주게끔만 하면 된다. 배코 녀석은 내가 말로 조질 수가 있으니."

"네. 안 그래도 자연스레 열린 것처럼 꾸미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연찮게 두 개의 열쇠가 만나 공명하게 된 것처럼 하려는 것이지요."

"그래. 오픈도어 녀석들. 꽤나 믿음직스럽게 일을 하는구만. 그런데 관여자가 둘이라고? 그럼 하나를 처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열쇠로 통로를 열더라도 관여자가 최종 관문인데 지장을 받을 일은 없는 건가? 관여자가 둘인 경우는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미 오픈도어 내부에 관여자가 있지 않습니까?"

흠.

그 말은 맞다.

관여자를 확보하는 것.

갖은 고생을 해서 통로를 기껏 열어도 관여자가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그만.

이 모든 것의 최종 관문은 언제나 관여자였다.

이 환수계의 긴 역사상 지금껏 통로를 열려고 시도한 환수가 왜 없겠는가?

수도 없이 많은 환수들이 통로를 열기 위해 희생하고 또 희생을 하였었다.

하지만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언제나 관여자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다르다.

자신은 이미 관여자를 확보해 두었지 않은가.

게다가 만에 하나의 불확실성조차 없애기 위해 자신의 기운마저 넘겨주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것은 오픈도어의 덴테조차 모르게 진행이 되었다.

헌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관여자가 둘이라니.

그런 그를 안심시키는 자라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관여자는 이미 저희에게 속해있기도 하고 다른 주인들이 무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이미 상황은 다 끝나있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관여자와 관여자의 싸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대 인간의 가벼운 전투로 끝이 날 것입니다. 나머지 한 명의 관여자는 그저 자신이 왜 죽는지조차 모르고 죽게 될 것이니까요. 모든 것은 다시 순리대로 궤도를 따라 흐를 것입니다."

"부족하진 않겠지?"

"부족할 리가 없죠. 관여자로서의 기운에 하르무 님의 기운까지 이미 가졌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정도의 기운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는 게 저로서는 신기한 일입니다."

좋아.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맞다. 하나 더."

"무엇입니까?"

"그 잔챙이들은 뭘 하고 있지?"

하르무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자라이.

"그 녀석들 어디에서 무얼 꾸미는지 모르겠습니다."

"훗. 감히 주인도 아닌 것들이 주인과 동등하게 놀려고 하다니."

"별로 신경을 안 쓰셔도 될 겁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하르무 님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잔챙이들이니까요."

어쩌면 말을 저렇게 마음에 들게 하는지 원.

다른 주인들의 오른팔에 비해 여기 이 자라이는 환수로서 격이 다르지 않나.

자라이의 말에 다시 한 번 대만족하는 하르무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지를 일만 남은 하르무였다.

"가라. 그리고 열어버려라. 남은 건 이제 넘어갈 일 뿐이다."

하르무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자라이가 곧장 인간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 하르무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게 된 하르무.

그 곳에는 낮게 깔린 하르무의 웃음소리만 성 안을 가득 채워갔다.

****

"좋아. 두 열쇠가 공명을 시작했군."

자신의 앞에 뉘여진 인간들을 보며 어글리불이 쪼그려 앉은 채 중얼거렸다.

눈앞에 놓여진 인간 두 명.

바로 그들이 납치해 온 인간들이었다.

둘은 아예 정신을 잃어버린 듯 두 눈을 감고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그리고 둘의 배 부근에서 맴도는 옅은 빛.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듯 몸에서 자꾸 벗어나려는 그 빛은 무언가에 막힌 듯 계속해서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왜 안 오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기다리게 하는 것이지? 지겨워 죽겠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글리불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

남은 건 이제 곧 이 곳으로 올 자에게 달려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괜히 일 그르치는 건 아니겠지? 그 전에 인간들이 치고 들어오면 큰일인데..."

혹여나 일을 그르칠까봐 괜한 걱정만 늘어가는 어글리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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