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키린(4)
체스와 헬캣을 떠나보낸 그 곳.
키린이 모든 힘을 거두어들이며 원래대로 돌아온 그 곳에는 각양각색의 환수들 수십여 마리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 무리의 앞에 선 세 명.
저마다 각각의 개성을 뽐내고 있는 그들.
적어도 셋 중 하나는 부르사이인 것을 알겠다.
저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
저 머리색 만큼은 적어도 환수계에 그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나머지 둘은...?
먼저 입을 연 것은 제일 왼편에 있던 덩치 좋은 남자였다.
"여~ 오랜만이야~"
반가운 듯 손을 흔드는 남자.
하지만 오히려 이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은 지나치게 반가운 인사말이라 되레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기에 응하는 인사라도 하는 듯 키린 또한 그를 보며 썩소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분위기를 못 견딘 건 켄타.
그들은 켄타가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이거 된통 당할 것 같지 않아요? 들키더라도 주인들은 안 올 거라면서요. 이건 좀 예상을 벗어난 것 아닌가요...?"
"야. 나도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지."
"하유. 하는 일마다 왜 이렇게 어째 그래요. 미쳐버리겠네."
혹여나 들릴세라 키린에게 귓속말로 말을 건네는 켄타.
키린이야 그렇다손쳐도 켄타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
호아류를 제외한 나머지 주인들이다.
그들이 온 것은 필경 키린에 대한 제재.
아마도 환수계와 인간계 사이에서 직접적인 힘을 사용한 탓에 그걸 간섭하려 온 것이겠지.
부르사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머지 둘.
왼편에 있는 저 덩치 좋은 남자는 하르무.
그 반대편에 있는 자는 배코.
둘다 환수계를 지배하는 주인들이다.
온통 초원으로 뒤덮인 북쪽의 주인인 하르무.
어깨까지 뒤덮은 검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 드러난다.
굵디굵은 송충이가 꿈틀대는 듯한 눈썹.
우뚝 솟은 콧날에 다부져 보이는 두터운 입술.
거기다가 넙적하게 딱 벌어진 가슴팍과 어깨.
누가 봐도 강한 남성상의 하르무였다.
그가 지배하는 그 곳 북쪽은 완전 주인의 성격을 쏙 빼닮은 곳이다.
유난히 경쟁이 심하기도 하고 약한 환수들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살아야 한다.
그 곳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강함이 아니면 곧 죽음이라는 인식이 가득 찬 호전적인 환수들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부르사이의 오른쪽에 서있는 배코.
딱 봐도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백발서생.
자기 얼굴 만한 안경을 쓴 그는 연신 코 언저리에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느라 쉴 새 없이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유. 배코. 정신 사나워 죽겠네! 그러게 내가 안경을 좀 작은 걸 쓰라고 했지 않냐???"
갑자기 짜증이 확 치미는지 부르사이가 배코를 보며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이게 나의 이 백옥처럼 파리한 피부를 더욱 빛나게 한다고. 멋짐을 위해서는 필수품이라고. 에휴... 하긴 네가 뭘 알겠냐? 매일 그 불구덩이에 사는 녀석이 멋들어짐을 어찌 알겠냐?"
"개소리하고 있네. 넌 이 붉디 붉은 옷들에서 뭔가 강렬한 뭔가를 못 느끼냐? 하긴 허여멀건 밀가루 같은 게 뭘 알겠냐? 자고로 모든 영감은 피와 같은 강렬한 붉은 색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거라고."
조용-
순간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말이 하르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주인 만이 쓸 수 있는 기세를 뿜어낸 것이었다.
"우리는 놀러온 게 아니다. 지금."
"또 봐라. 혼자 무게 잡는 거."
부르사이가 옆에서 비꼬았으나 그 이상 말은 더하지 않았다.
그만큼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존중해 주는 것이지.
대신 시선을 돌려 오늘의 주인공인 키린 쪽을 바라보는 모두들.
하르무가 모두의 대표로서 재차 입을 열었다.
****
"키린. 동쪽의 주인. 지나치게 주인의 힘을 남용한 죄. 그리고 환수계와 인간계 사이의 법칙에 간섭해 양계에 혼란을 야기한 죄. 인정하는가?"
"야. 하르무. 너도 참 엔간하다. 뭐 어지간히 급한 일이라고 뒤에도 우르르 달고 오냐?"
혀를 차는 키린.
그 말에 하르무가 방긋 웃음을 보였다.
"급하지. 규칙을 깨뜨린 게 얼마나 중죄인 줄 뻔히 아는 네가 그러나?"
"지는."
푸하하하하하하하-
키린의 중얼거림에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리는 하르무.
"아무리 조용한 네 녀석이라도 혹시나 날뛴다면 그것 또한 곤란하니까 말이야. 크흐흐흐."
환수계의 주인들은 모두 다섯.
그 중 호아류는 나머지 넷의 의견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남는 자는 넷.
평소에는 모이라고 해도 잘 모이지조차 않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주인 정도의 존재가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깨뜨렸을 경우에는 나머지 모든 주인들이 함께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들이 서로 혹여나 싸움이라도 벌일 경우.
단순한 싸움도 단순하게 끝이 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주인들의 힘에 환수계 전체가 요동을 치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혹여나 그 여파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들이 두말 않고 달려오는 이유였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빠르게 온 것 같은데...
이건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촤라락 나타난 게 아닌가?
하지만 도망을 가자기 그것도 또 그렇고 말이지.
후.
어쩔 수 없다.
"그래 그래. 인정하지. 나는 그래도 너처럼 뒤에서 지저분하게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크흐흐."
****
아야야-
"손은 왜 묶냐? 어차피 의미 없는 것 아니냐?"
키린의 말에 그의 손을 묶어가던 환수들이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감히 주인의 몸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죄스러운 짓인데.
그걸 본 하르무가 혀를 끌끌 차더니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키린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는 환수들.
멈칫-
키린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켄타. 내가 부재일 경우에는 네가 알지?"
"휴... 알아요. 알아. 다녀오세요."
이 상황에서는 켄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지켜만 볼 뿐.
쩝...
****
한편 체스와 헬캣.
키린이 둘을 보낸 곳은 그들이 원래 있던 자리.
분명히 키린과 함께 머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온 이 곳에 스코르피의 존재는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그 장소를 떠나버린 듯했다.
"...벌써 다 끝나버렸나 본데요?"
-환수계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다 죽은 것인지 모르겠네.
"그럼 우리는 어떡하죠?"
-뭐 돌아가다 보면 뭔가 있지 않겠냐?
목적지는 정해졌다.
다시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가는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