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진(2)
카카캉-
마지막으로 둘이 부딪히는 소리.
그 충돌음을 끝으로 둘은 거리를 띄우고 물러났다.
하지만 어느 새 실컷 달아올랐던 전장의 열기는 사악 식어있었다.
진을 부른 인간의 단 한 마디였다.
'호오~'
헬캣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지금 이 곳의 분위기가 저 자의 말 한 마디에 좌지우지된단 말이야?
하물며 저 진 데몬 스코르피가??????
'대체 누구지? 뭔 놈에 인간이길래 저 녀석이 저렇게 반응하지?'
의심이랄까 헬캣의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야. 진. 너.
-뭐? 왜?
-그 인간이 누구길래 환수계에서도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 그리 반응을 하냐?
-그런 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네 몰골이나 봐라. 자식아~
대수롭지 않게 말을 툭 내뱉는 진.
아...
하긴 삽시간에 불타오르긴 했었지.
한바탕 격돌이 끝난 후 둘의 모습은 꽤나 처참했다.
먼저 진.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여기저기 사정없이 뜯겨져 나가 있었다.
처음의 깔끔하던 차림새와는 전혀 다른 몰골.
하지만 차림새와는 다르게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다.
마치 스트레스를 마음껏 털어낸 직후의 즐거움이랄까.
그리고 하나 더.
헬캣.
-시발 거.
순간 체스가 귀를 의심했다.
저렇게나 직설적으로 욕을 내뱉는 건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어지간히 화가 났나본데.
"괜찮으세요?"
체스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헬캣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헬캣의 욕에 놀라고 두번째는 헬캣의 몰골을 보고 놀랐다.
이미 군데군데 상처가 가득한 헬캣.
"...괜찮아요?"
재차 물어보는 체스.
-야. 괜찮아 보이냐?
"아뇨. 전혀 괜찮아 보이지는 않네요."
-그렇지? 그럼 그딴 멍청한 질문은 좀 하지마. 지금 몹시 스트레스 쌓이니까.
헬캣은 자신의 말을 마친 후 진을 쳐다보았다.
그저 싱글벙글거리고 있는 진이었다.
****
-즐겁냐? 이 변태 같은 놈아.
-나쁘지는 않네. 인간계의 이 역한 냄새가 몹시도 짜증났는데 널 만나서 많이 개운해졌지. 우후후후.
자신의 몸에 난 이까짓 상처 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더 날뛰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한 진이다.
-빨리 다시 시작하자. 나도 갈길이 바빠.
-크흠. 그런데...
헬캣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지 않나.
지금 자신은 저 천하의 진이 저 자의 말을 저렇게 곧이곧대로 듣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봐도 분명히 인간인데.
-옆에 그 자는 누구지? 네가 왜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지? 너처럼 기고만장한 녀석은 주인 이외에는 아무런 말을 안 듣는 게 아니었냐?
-후훗. 여기 이 녀석이 궁금한 거야? 흠... 뭐라고 얘기할까? 이 녀석은 말이지. 뭐라고 하는 게 좋으려나... 그렇지. 동반자야. 딱 까놓고 말해서.
진이 자신의 옆에 선 남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남자를 보며 말이다.
****
"지금 이럴 시간이 없지 않나?"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내가 너무 신이 나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 조금만 더 하면 안될까?
"안된다. 빨리 끝내야 하지 않나?"
-쳇. 재미없기는. 크크큭. 식어버렸다. 빨리 해라.
진의 말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정체불명의 남자.
"우리가 바빠서 말이지. 빨리 정리를 좀 해야겠다. 너희들이 우리 일을 너무 방해하고 있다."
-네 녀석은 또 누구지? 왜 진이 너의 말을 저리도 잘 듣지?
헬캣의 다시 이어진 질문에 그 자는 자신의 등 뒤에 둘러져 있던 망토를 툭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 뒤에 나타난 모습에 헬캣과 체스의 두 눈이 급격히 커다랗게 커졌다.
그의 등 뒤에 꽂혀 있는 수많은 무기들.
-허...
뭐야?
저 놈.
무슨 놈에 무기를 저만큼이나 들고 다녀?
저걸 한 명의 인간이 다 들 수 있나?
아니 그보다 저 망토 안에 저 많은 무기가 다 숨겨지는 게 더 신기하다.
그리고 놀라기는 체스도 마찬가지였다.
무기를 저렇게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네.
무겁지도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응?
잠깐만.
저 자 알 것 같다.
염파를 꺾은 그 자...가 분명히 만병의 주인이었지 아마?
집회소에서 흘러나오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마...
"당신... 그... 랭...커 맞죠? 그쵸? 맞죠? 맞죠? 그 염파를 꺾었다는?"
빠르게 던져지는 체스의 질문.
그는 지금 확신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중이었다.
집회소에서 들었던 소문의 주인공.
매번 행로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인물.
"날 아나보군."
"당신을 모르면 간첩이죠! 맙소사..."
체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갑자기 체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주머니를 막 뒤지며 뭔가 적을 만한 것을 찾는 체스.
"이거 사인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당신 완전 유명인이라구요!"
하아...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분을 못하는 체스의 모습에 헬캣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 사인이라니.
-정신차려라. 임마. 안 보이냐? 적이다 적.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체스를 쳐다보는 헬캣이 보다못해 한 마디했다.
****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방금까지 싸우고 있었지.
"헌데 당신이 왜 마수들이랑...?"
"그건 알 필요없다."
딱 잘라 말하는 페릴턴.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
어차피 여기서 죽을 놈이 아닌가.
그는 대답 대신 삼단을 모두 개방하기 시작했다.
스릉-
그의 기운에 따라 페릴턴의 등 뒤로 둥실 떠오르는 무기들.
-쉬운 놈이 아니다. 조심해라. 저 기세.
헬캣의 긴장한 듯한 말투.
'이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지금껏 수많은 의뢰나 전투를 할 때에도 저런 말투는 하지 않던 헬캣이었다.
입술이 바짝 마른 듯한 목소리.
하지만 헬캣의 말 그대로였다.
페릴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폭풍 같은 기세.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야 한다.
"네? 아~ 네."
긴장감이 잔뜩이다.
중단과 상단을 동시에 열어젖힌 체스에게도 그의 움직임이 하나씩 그려졌다.
그리고 그런 체스를 바라보는 페릴턴.
"호오~ 흥미로운 녀석이군. 보아하니 마수 사냥꾼인 것 같은데 생각보다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거기까지. 네가 누군지는 묻지 않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자라나는 새싹을 밟아서 미안하군."
체스를 바라보는 페릴턴의 눈빛이 잠시 흥미로운 듯 빛이 났다.
-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할 때도 있었냐? 크크크.
진이 신기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쌀쌀맞은 페릴턴의 표정.
흥미를 보인 것도 찰나의 순간 뿐인 듯했다.
-그런데 굳이 네가 나설 필요 있나? 여기 우리 아이들을 쓰면 될 건데.
데몬 스코르피 수십여 마리는 아까부터 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마수들 특유의 살기는 여전히 이 전장의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아니다. 내가 빨리 끝내겠다."
페릴턴이 중얼거리며 삼단의 기운을 동시에 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