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호송(8)
"아...아니. 어? 왕가라니. 왕 씨도 아닌데 무슨 왕가는 왕가야.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허어어엄."
말을 돌리는 행크스.
그를 바라보는 심슨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렇군요. 뭐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으니."
"이 사람이 큰일날 소리를. 어허. 날도 참 좋은 게 이런 데 일을 하고 있으니 씁쓸하구만."
횡설수설하며 딴청을 피우는 행크스였다.
심슨이 저걸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닌 듯 하지만 여하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이건 여러모로 필히 보고가 되어야 할 일.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퍼져 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필경 조사가 들어가겠지.
"가지. 조금만 빨리 속도를 올려서 말이야. 어허험."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들 사이의 어색한 기류만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호송대 안을 맴돌고 있었다.
****
"야.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걸렸으면 전장 이탈로 큰일날 뻔했잖냐."
"아~ 마수의 기척이 느껴져 잠시 정찰을 하고 왔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체스.
거짓말도 수준급이다.
-흠. 좋아. 좋아. 얼굴색도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이야.
저 핑계.
헬캣 본인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뭐라고 핑계를 대냐며 발을 동동 구르길래 뭘 그리 걱정하냐며 툭 던져줬더니 그걸 또 그대로 따라하네.
그래도 체스의 일행들은 또 그걸 믿는 눈치다.
체스의 기감 탐색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탓이다.
"헉. 정말이야? 그래도 다행히 마수는 없었나 보네."
아벤 대신 끼어든 것은 마리안느.
"네. 제가 잘못 알았더라구요. 그냥 야생동물이었어요. 왁 겁을 줬더니 그냥 도망가더라구요."
"우리 체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 있지. 아유~ 내 동생."
어느 새 완전 동생이 되어 버렸다.
마리안느는 체스의 듬직한 면이 이뻐 죽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머리 다 헝클어져요."
"떽. 누나한테 그렇게 대드는 거 아냐~"
결국 체스의 머리는 그녀의 손에 맡겨진 채 이리저리 춤을 췄다.
그나저나 앞쪽에서 해결이 되어서 다행이다.
길이 좁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을 터.
'후.'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체스.
체스는 아까 벌어졌던 그들의 전투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가능할까?
아직은 무리다 무리.
헬캣에게 두들겨 맞으며 배우긴 했지만 아직은 글쎄다.
그 속도와 공격력 그리고 수비.
흉내를 내볼래도 무리가 아닐까 싶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연스레 강해지고 싶다.
헬캣에게 두들겨 맞거나 그런 것 없이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나면 세계 최강이 되고 싶다.
그러면 혼자서 S급 마수도 막 잡고 다 씹어먹을 수 있을 텐데.
빚은 금방 다 갚고 말이지.
행복하다.
빚이 다 사라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말을 타고 달려가는 체스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배시시 어렸다.
-또 망상에 빠져있구만.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 엎드려 있는 헬캣의 나지막한 한마디였다.
****
드디어 루비온 왕국의 수도 나스가 눈에 들어왔다.
드높은 성벽.
그리고 성을 주위로 잔뜩 밀집되어 있는 민가들.
성의 크기만 봐도 여기가 바로 수도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체스가 봐온 그 어떤 곳들보다 웅장한 크기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우와~"
입을 쩍 벌린 체스.
"수도는 처음 오냐?"
"네. 처음이죠."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시선에 들어온 성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체스.
수십 명 아니 수백? 수천여 명이 살 법한 곳이다.
그때부터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후 별다른 습격도 없었고 그들의 속도를 저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탓인지 별다른 대화나 휴식도 딱히 없었다.
그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그렇게 도착한 수도 나스다.
"체스. 가면 숙소를 잡고 마수 사냥꾼 협회에 먼저 가볼 건데 어때?"
"좋아요. 바로 의뢰를 잡을 거죠?"
"그렇지. 아무래도 협회에는 의뢰가 넘칠 거니까 바로 해야지. 너도 이제 실버 등급이기도 하고 우리랑 같이 움직일 거니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아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체스.
내심 한 팀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게 기분이 좋았다.
이들이라면 믿을 만하지.
암.
그렇고 말고.
****
성에 도착한 후 사브레 상단과 헤어질 일행들.
사브레 상단은 이미 물품을 납품하러 간 후 심슨도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고생했다."
"심슨 씨도 고생하셨어요."
"다 고생한 거지 뭐. 그래도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네."
심슨이 아벤과 악수를 하며 체스를 슬쩍 보았다.
체스는 여전히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연신 눈알을 돌리느라 아주 바빠보였다.
'좀 지켜볼랬더니.'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건만 앞줄에 위치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도착한 지금.
같이 움직이기로는 했으나 자신은 알아볼 일도 있고 협회장과도 만나야 한다.
아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지겠지.
"협회로 갈 것이지?"
"네. 우선은 묵을 곳부터 잡아야 할 것 같지만요."
"흠. 그럼 일단 자네들은 자네들 볼일을 보게. 난 협회에 먼저 가야해서. 또 연락을 하도록 하지."
심슨이 떠나갔다.
그가 가는 곳은 협회가 있는 방향.
"우리도 가자. 숙소는 좀 싼 곳이 좋겠지?"
"싸면서도 좋은 곳! 그리고 내 방에는 반드시 욕실이 있어야 해."
"......놀러왔냐?"
"난 여자잖아~"
"...같은 소리하네. 네 팔뚝을 봐라. 한 대 맞으면 죽겠구만."
마리안느의 말에 구박을 하는 아벤의 말.
하지만 말을 더 이어가려던 그의 입은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두둑- 두둑-
"그래? 다음 말도 들어보고 싶네."
어느 새 손가락의 관절을 풀며 다음 행동을 준비하는 마리안느였다.
"아... 아니야. 당연히 필요하지. 있어야지. 암. 안 그래? 다들 동의하지?"
대답 대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일행들.
그들도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너무나도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우리는 이래서 한 팀이야~ 난 정말 너희와 함께라서 너무 행복해~"
꽈악-
마리안느가 아벤과 포드의 목을 껴안더니 방방 뛰었다.
"켁켁! 모ㄱ...!"
"ㅇ ㅑ..."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들.
그 사이 마리안느는 다시 그들을 껴안았던 팔을 풀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향해다.
그리고는 몇 걸음 안 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안 가냐?"
"어...어~ 가야지."
목을 어루만지던 그들은 헐레벌떡 그녀의 뒤를 따랐다.
-쯔쯔. 한심한 놈들.
그리고 체스의 품에 안긴 헬캣.
그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