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랭커(1)
솔직히 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정확한 정체는 모른다.
하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긴 했다.
그 정도 위압감이면 당연히 랭커이고 게다가 특징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곧이 곧대로 말하면 나중에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 지 모르는 일.
괜히 수풀을 건드려 뱀이 튀어나오게 하느니...
스고르는 그 와중에도 나름 머리를 굴렸다.
"손이 아주 빠른... 자다. 그리고 그 자 앞에 서면 괜히 오금이 저리고 말도 막 더듬게 되고 그 뭐냐 소름도 막 돋고 그랬지..."
-하 참나.
기가 찼다.
정체를 말하라 했더니 저딴 소리나 읊어대고 있네.
손이 빠르고 그 앞에 서면 무섭다라.
저 조건만 두고 따져보면 스고르 앞에 서있는 자신도 해당이 되질 않는가.
-너 좀 귀엽네.
"어...어? 어... 그렇지."
-이게 확! 자세히 이야기 안 할래???
확 역정을 내는 헬캣.
지금 누구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는 것인지.
아무래도 좀더 맞아야 그간의 행동에 대해 반성의 시간도 갖고 뉘우치겠네.
잠시 혀를 차던 헬캣이 앞다리를 확 들어올렸다.
"히이익~ 아이고오. 그... 그 자. 정체는 진짜 모른다고오오오오..."
-아~ 이거 분명히 거짓말인데. 한 세 대 정도만 더 맞으면 입에서 막 절로 술술 불게끔 되겠지. 자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타의에 의해 술술 입을 여는 널 발견하게 될 거니까.
"지...진짜야아아아아... 아! 그...그 자의 왼쪽 손등 쪽에 조그맣게 이...이 문양이 그려져 있어..."
-좋아. 그럼 그 자는 어떻게 연락을 취하지?
"그... 보통은 그 자에게서 까마귀가 날아오지. 그러면 내가 그걸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는 형식이다. 직접 오는 건 가끔이다만은."
이번의 이야기들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그제야 헬캣의 얼굴에 만족감이 흘렀다.
모든 것을 알아내지는 못 했지만 어느 정도의 정보는 획득했다.
'좋아. 이놈들. 꼬리는 밟았네.'
****
-자~ 그럼. 할 일이 하나가 더 있다.
"뭐...뭐...?"
순간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다.
...분명히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좋은 정보를 줬으니 여기서 날 만난 기억을 좀 지워야겠다.
"...기억을 지워?"
볼이 퉁퉁 부은 스고르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그게 가능합...니까?"
체스가 은근슬쩍 다가와 물었다.
그런 건 듣도보도 못한 것 아닌가.
기억을 지운다니.
-그래. 그냥 잡기 중에 하나다. 나보다 약한 녀석 한정이긴 하지만. 넌 굳이 지울 필요가 없어서 안 지운 거다만은.
"아."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약하다는 걸 저리 대놓고 얘기하면...
부끄럽게.
-뭐 여하튼 그냥 네 녀석들 기억을 지워버리겠다 그냥. 요 며칠 우리를 따라다닌 걸 싸그리 잊게 해주마.
헬캣이 앞다리를 스윽 들어올렸다.
차캉-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날카로운 발톱.
순간 그걸 본 스고르와 그의 일행에 공포감이 어렸다.
도대체 저 발톱으로 뭘 어떻게 한다고...
그 사이 헬캣이 천천히 움직였다.
스윽-
그리고 스고르의 이마에 콕 갖다댄 발톱.
순간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톱에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1분 여가 흘렀을까.
스고르의 몸이 무너지듯 그대로 스르르 쓰러졌다.
"헉. 주...죽였나...?"
-안 죽었다. 기절한 것 뿐이다. 잔말말고 다음은 너네다.
그렇게 똑같은 방법으로 나머지 둘을 더 기절시킨 헬캣.
아마 일어나면 자신들이 왜 여기 이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지.
목적을 달성한 체스와 헬캣은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얼른 도시로 몸을 돌렸다.
****
그 무렵.
대륙에서는 마수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화젯거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늘어난 마수로 인해 대륙 전체가 시끄러워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큰 이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랭커들 사이의 순위.
그 순위가 수십여 년 만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정도로 바뀌고 있었다.
그 이변의 주인공은 혜성처럼 나타나 온갖 화제를 몰고 다니는 자.
등에 수십여 종의 무기를 메고 다니는 페릴턴이었다.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어디 출생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두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이아 등급을 획득하며 대륙 전체에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그것 만으로 끝일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진정한 행보는 거기서부터였다.
그는 연이어 랭커들에게 도전을 하며 자신의 랭킹을 올려나갔다.
지금처럼.
"네가 요즘 그렇게 유명한 페릴턴이라는 작자인가?"
백발을 질끈 동여맨 날카로운 인상을 한 나이가 꽤나 든 남성.
그는 바로 현 랭킹 11위 염편 파락이었다.
그리고 파락의 말을 들은 페릴턴.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에 각이 잡힌 얼굴에 마치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균형 잡힌 몸.
그가 바로 지금 파락에게 도전하는 자.
페릴턴이었다.
"반갑소. 페릴턴이라 하오. 감정은 없소. 나보다 위에 있는 게 단지 운이 나쁜 탓이다 생각하시오."
"훗. 운이 나쁘다라... 누가 운이 나쁜지는 서로 따져봐야겠지.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더욱 운이 나쁜 것 같긴 하다만은."
"부디 그 생각. 끝날 때에도 유지하시길 빌겠습니다."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는 페릴턴.
그의 말에 파락은 그만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파하하하하하. 그 자신감 좋네. 하지만 자네가 지금껏 쓰러뜨린 랭커들. 그들과 나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 보여주지. 지금까지는 어떻게 요행으로 이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은 좀 다를 걸세."
아무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파락을 쳐다보는 페릴턴.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젊어보이는구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나이는 30살입니다만."
"30살에 랭커라... 대단하군. 진심으로."
훗.
긴장했나보군.
파락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 표정이 경직된 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하하. 긴장 풀게. 아무렴 내가 나보다 랭킹도 낮은 자에게 손을 과하게 쓰겠나? 그저 가르침을 준다 생각하고 하겠네. 하하하하하."
파락의 말은 역력히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였다.
심지어 약간 얕잡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자신보다 랭킹도 낮은 자가 아닌가.
지금껏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칭찬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랭커들을 차근차근 밟고 올라왔다 해도 그래봤자 경험이며 실력이며 모든 것이 미숙할 수 밖에 없다.
"그럼 내가 왜 염편이라 불리는지 보여주지."
미소를 띤 파락이 자신의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