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자이앤트 여왕(7)
-아~ 이것들. 귀찮게 달라붙네 진짜. 그런다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좁은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자이앤트 병사 한 마리의 체액을 잔뜩 뒤집어 쓴 헬캣이었다.
안간힘을 쓰지만 노력만 가상할 뿐.
고작 자이앤트 따위로 헬캣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뒤는 뭐.
학살이었다.
헬캣이 몸을 강하게 털자 일순 그를 덮고 있던 모든 자이앤트들이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마치 시간이 정지가 되어버린 듯 멈춰버리는 모두의 동작.
샤샤샤샥-
순간 헬캣의 몸이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팍-
삽시간에 갈기갈기 찢어 발겨지는 자이앤트들.
정말 순식간이었다.
투둑- 투두둑-
시간의 흐름이 다시 이어지고.
주인을 잃은 팔다리와 몸통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흩뿌려진다.
-에이씨. 털이 더러워졌잖아.
새하얀 자신의 털이 체액으로 뒤덮인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헬캣은 털을 할짝 핥아댔다.
-어우... 이 냄새.
코를 틀어막는 헬캣.
노린내가... 노린내가...
헬캣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순간 틈만 노리던 여왕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둘의 거리를 단 두어 걸음 만에 좁혀가며 뻗어오는 남은 하나의 앞다리.
쿠웅-
하나의 공격과 하나의 방어가 격하게 부딪혔다.
하지만 힘의 차이가 선명하게 보인다.
여왕은 필사적이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조금씩 밀려가는 앞다리였다.
크와아앙-
헬캣이 여왕의 앞다리를 쳐냈다.
그렇지만 여왕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튕겨져 가는 자신의 몸을 살짝 비틀어 배를 들이대며 산을 뿜어내는 여왕.
처음 산을 뿜을 때와는 달리 일직선으로 강하게 쏘아대는 여왕이었다.
푸슈우우우욱-
-이런.
순간 헬캣의 털이 곤두섰다.
분명 저건 자신의 방어를 뚫고도 남겠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헬캣이 재빨리 제자리를 뛰어올라 벗어났다.
탁- 탁-
그리고 벽을 타더니 그대로 여왕의 등 부분을 짓눌러 버리는 헬캣이었다.
콰앙-
어마어마한 무게.
여왕의 몸이 별다른 반항도 못한 채 땅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끝이다!!!
헬캣이 자신의 앞발을 드는가 싶더니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힘껏 내리꽂았다.
****
"어...으..."
체스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고통스러웠다.
어디 몇 군데는 이미 뼈가 박살이 난 듯했다.
특히 다리.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각도가 희한하게 뒤틀린 게 뼈가 아예 나간 듯 보였다.
"...안 죽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체스가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귓가에 들리는 격렬한 충돌음.
그의 눈앞에 두 마리의 환수가 격렬하게 손속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싸우는 걸로 봐서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 듯했다.
그런데 말이다.
하나는 분명히 자이앤트 여왕인데.
나머지 하나는 누구지...?
그새 또 새로운 마수가 치고 들어온 건가?
대등하게 싸우는 걸 봐서는 얼추 보더라도 동급이거나 혹은 그 이상의 등급 같은데...
순간 여왕이 뿜은 산이 자신에게 튀었다.
그 산은 자빠져 있는 체스의 옆구리를 그대로 뚫고 지나가고.
치이이익-
살이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밖으로 뿜어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르르르르륵-
격렬한 고통을 느끼며 입에 게거품을 문 체스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헉헉-
-너 이 새... 도대체 힘을 얼마나 비축한 것이냐?
-헉헉. 그냥 좀 죽던가 그냥 가던가... 나도 좀 살자.
둘은 엄청나게 지친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하고도 여왕과 결착을 짓지 못하다니.
자신이 우세한 건 확실한데 극히 미세한 차이다.
여왕이 설마하니 이 정도나 힘을 비축했을 줄이야.
후욱- 후욱-
헬캣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그.
어떻게든 이번의 공격에 마무리를 지을 생각인 그였다.
삐죽-
거의 사람의 키 만한 발톱이 그의 발에서 슬그머니 튀어나온다.
'마무리를 짓겠다.'
팟-
헬캣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여왕의 시야에서는 헬캣이 사라지고 여왕은 얼른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그를 찾았다.
'찾았다.'
저 육중한 몸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순간 시야에서 놓칠 뻔했다.
몸을 재빨리 숙이는 여왕.
하지만 잘려나간 팔 부근의 어깨가 불에 지져진 듯 화끈함이 피어올랐다.
윽-
-이런 씨! 노린 데 또 노리기가 있냐?!!!
그 화끈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깊게 패인 뚜렷한 자상이 남아 있었다.
헬캣의 발톱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한 살기가 느껴진다.
여왕의 뒤편에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살기가 다시 움직인다.
슈와아아아아악-
갑자기 여왕이 빠른 속도로 살짝 몸을 띄웠다.
두 번은 안 당하겠다는 명백한 의지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꼬리를 들어 헬캣을 빠르게 치고 감과 동시에 자신의 기운을 일거에 터뜨려 나갔다.
퍽- 퍽-
콰아아아아아-
헬캣의 앞발이 여왕의 왼쪽 눈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여왕의 쭉 뻗은 꼬리가 헬캣의 다른 앞발을 후욱 핥고 지나갔다.
크으으읍-
양쪽에서 터져 나오는 답답한 신음소리.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여왕이 터뜨린 기운.
그 기운은 여왕의 둥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여왕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공격한 헬캣의 몸을 잡아 땅으로 내려치는 여왕.
퍼어어억-
'엇. 젠장맞을.'
헬캣도 한쪽 팔이 자연스럽지 않은 탓에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쳐졌다.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크와오옵-!!!
드디어 고통을 느낀 헬캣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시 이 상황에서도 절대 방심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투두둑-
순간 여왕의 기운이 모든 둥지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천장부터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천천히.
하지만 빠르게.
그리고 여왕은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앞다리를 이용해 재빨리 땅을 파기 시작하던 여왕은 빠르게 생겨난 땅굴 쪽으로 냅다 몸을 던져버렸다.
이익...
놓칠까보냐.
그것을 본 헬캣.
그도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헬캣도 그 곳으로 몸을 날리며 얼른 여왕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한편.
드디어 도착했다.
여왕의 방에 오기까지 숱한 전투를 치루고 온 마수 사냥꾼들이었다.
세 방향으로 들어간 이들 중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아무래도 랭킹이 제일 높은 심슨 쪽이었다.
역시나 수는 상당히 줄어 있었다.
"억. 저것들인가!"
그들이 도착한 그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마리의 거대한 마수.
바로 자이앤트 여왕과 헬캣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수 사냥꾼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두 마리의 마수.
둘은 순식간에 여왕이 만든 구멍으로 연달아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런... 난 저걸 쫓겠다!"
심슨이 재빨리 외치며 구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하악... 하악...
그의 귀에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응?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는 심슨.
그리고 그의 시선에 들어온 건 다름아닌 체스.
널부러진 채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아니. 저 자가 왜 여기에...? 설마... 혼자서 S급의 마수와 싸워 살아남은 것인가...?'
완전 오해를 하는 심슨이었다.
체스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놀람이 가득 차올랐다.
실력을 숨긴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심슨의 시선은 체스에게 향해 있었지만 이내 갈등에 빠졌다.
쫓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 자를 데리고 살려야 하는가.
두말 할 나위 없이 대의를 위해서라면야 답이 정해져 있지만...
우르르르르르-
순간 천장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여왕이 뿜은 기운이 둥지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앗! 이런 젠장맞을."
이런 상황이라면...
그래 움직이자.
심슨이 결정을 내렸다.
한 번 마음을 먹자 다음 행동은 순식간에 이어졌다.
"얼른 밖으로!!!"
체스를 들처맨 심슨이 고함을 쳤다.
마수를 쫓는 대신 그를 살리는 길을 택한 심슨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곳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서로를 밀쳐내며 어떻게든 먼저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여념이 없는 마수 사냥꾼들.
생존을 위한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이 극대화되는 장면이었다.
"...이런 씨..."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여유는 없다.
천장의 붕괴가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른.
그리고 심슨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