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자이앤트(12)
끼에에에에엑...
그들에게 달려들던 자이앤트 중 마지막 녀석의 숨통이 끊어졌다.
살아남았다.
주위에 널린 건 사체, 사체, 사체 뿐이다.
헉헉...
그제야 거칠게 숨을 고르는 체스.
들고 있는 검마저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격한 전투였다.
질퍽질퍽-
무거워진 발을 옮기자 자이앤트의 체액인지 마수 사냥꾼들의 피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액체가 신발에 마구 달라 붙는다.
"윽..."
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그의 어깨를 툭 치는 누군가.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심슨이었다.
"자네. 굉장하구만?"
"뭐가요?"
"아니. 실버 등급의 심사 결과가 보류라더니 보류를 받을 정도도 아닌데 어떻게 보류가 나왔나 싶어서 말이야."
심슨은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체스보다 등급이 높은 녀석들도 나자빠져 죽어나는데.
이 녀석은 보면 볼수록 알 수가 없다.
전투를 하면 할수록 성장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
마치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안다고 해야할까.
방금도 그랬다.
자이앤트의 집게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그는 다가오는 방향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벌써 방향을 튼 채였지 않나.
'이 놈. 도대체 정체가 뭐지? 좀더 지켜보면 알려나.'
심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다른 마수 사냥꾼 하나가 다가왔다.
"심슨. 얼추 정리는 끝났는데 가지?"
"어. 벌써? 그렇다면 빨리 가야지. 자~ 이동이다."
지시를 내린 심슨이 잠시 남은 마수 사냥꾼들을 둘러보았다.
전투 불능에 빠진 마수 사냥꾼들을 비롯해 사망자까지 합치니 어느 새 꽤나 많은 수가 줄어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삑사리 나겠는데.'
아씨.
심슨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신 정도의 랭커라면야 당연히 살아 남겠지만 나머지가 문제라...
더군다나 자이앤트의 여왕은 아직 찾지도 못했지 않은가.
"안가?"
상념에 빠진 그를 되돌리는 목소리.
"어? 어. 가야지. 다시 이동~"
어이차-
잠시 숨을 돌리던 무리의 곳곳에서 곡소리가 흘러 나온다.
계속 이어지는 전투에 지친 탓이겠지.
하지만 더욱 세력이 커지기 전에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그게 더 큰일이다.
심슨을 비롯한 남은 마수 사냥꾼들은 다시 어두운 둥지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응? 뭐야. 여기서 왜 길이 나뉘는 것이지?"
지금 심슨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돌고 돌아 꽤나 오랫동안 밑으로 내려온 뒤였다.
하지만 나오라는 여왕은 안 튀어나오고 뜬금없이 양 갈래로 갈라진 길 때문이었다.
흐음...
여기서 전력을 또 나눠야 하나...?
나눈다면 또 어떻게 나눠야 하지?
"우리 스피어 사냥단이 왼쪽으로 가겠소."
스고르였다.
하지만.
...가능하려나?
스고르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여나 여왕을 만났을 경우가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다른 방향으로 들어간 나머지 무리들.
그들도 소식이 없어서 불안하기도 하고.
그러나 스고르는 자신감이 아주 넘쳐보였다.
오히려 걱정이 없어 보인달까.
"가능하오. 여기 이 아이언 등급 녀석을 데리고 가겠소."
"응? 왜?"
"지금은 우리 스피어 사냥단과 함께 하지 않소. 게다가 이 아이언 등급 녀석이 얼마나 잘 싸우는 지도 봤을 것이고. 웬만한 골드 등급의 녀석들보다 훨씬 나으니."
그 말은 사실이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강하다.
이 상태로 잘 성장을 한다는 가정 하에 랭커까지도 노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할 만한 실력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닌데...
그리고 우선 옆에서 좀더 보고 싶었다.
체스가 가진 능력을 확실히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피어 쪽에서 데려간다면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나...? 나는 우리 쪽에서 좀 데려갔으면 좋겠는데."
"그럴 거면 처음부터 우리 쪽에 맡겼으면 안되지. 이미 맡겼는데 잘 싸우니까 다시 데려가겠다니."
"안돼."
그 말도 또 맞네.
자신이 소속을 배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양보하기는 또 싫었던 지 다시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는 심슨이었다.
그때 체스가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자신을 두고 때 아닌 소유권 분쟁이 벌어진 듯 보였다.
"그냥 내가 스피어 사냥단과 같이 움직이면 되겠네. 그러죠 뭐."
어디에 있던 현재 살아있으니.
체스의 입장에서야 심슨이나 스피어나 별반 상관이 없었다.
'제길.'
본인이 저렇게 이야기한다면 반대할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끝나고 보지. 여왕이 있는 곳에서 보자."
그리고 심슨은 몸을 오른 쪽으로 향했다.
이미 나눠서 가기로 했지 않나.
결정을 내린 이상 행동은 빨라야 하지.
"행운을 빌지."
****
그렇게 두 팀은 나뉘어졌다.
한 쪽은 스피어 사냥단.
한 쪽은 심슨.
스피어 사냥단은 왼쪽의 길을 선택해 가는 중이었다.
여전히 체스는 선두에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거 여왕을 우리가 잡으면 완전 대박인데."
"그러게. 우리가 잡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발견해야 하잖아. 랭커들이 먼저 발견하면 어쩌냐?"
"야. 어떻게든 한 칼이라도 먹여야지.그래야 우리도 여왕을 잡는데 기여했다고 인정을 받지."
"그러면 좀더 빨리 가야겠네."
"그래. 심슨도 심슨이지만 다른 방향에서 가는 녀석들도 어디까지 갔는지 모르니 잘 파악을 해야해."
"그렇지. 뭐 우리는 네가 있으니. 어차피 여왕이래봤자 S급이잖아. 너 정도면 쉽게 잡겠지."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겠지만 무조건 잡도록 해야지."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앞에서 걸어가던 체스가 귀를 쫑긋거렸다.
역시 이들도 여왕을 잡아 한 몫 단단히 챙기려는 생각인 듯했다.
자신처럼 말이다.
실실 웃으며 걸어가고 있던 체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응?
벽이다.
벽에서 마수들이 튀어 나오는 장면이 체스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벽! 벽을 조심해!!!!!!"
체스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스고르를 비롯한 스피어 사냥단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쟤. 뭐라는 거야?"
"벽이 뭐가 어째서. 앞이나 봐라."
이들은 몰랐다.
체스가 가진 능력을.
순간.
체스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장면이 그대로 펼쳐졌다.
푸와아아아아아악-
양쪽의 벽을 뚫고 자이앤트 병사들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다.
큰 머리에 달린 집게턱을 활짝 벌린 채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마수들.
공간이 좁은 탓에 마수들과 마수 사냥꾼들 사이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일순 패닉에 빠진 마수 사냥꾼들.
노련한 몇 명과 체스를 빼고는 모두 그 턱에 꼼짝없이 잡혔다.
"이익!!! 놔라!!!"
"사...살려줘!!!"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고함이 빗발친다.
그 와중에 우리 체스는...?
그도 물론 자이앤트의 턱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피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하나.
실력이 부족해서였다.
그래도 용케 검을 들어 허리가 잘려나가는 건 막았다.
이미 몇몇은 허리가 잘린 채 죽어 있었으니.
순간 자이앤트 병사들이 인간들을 문 채 그대로 튀어 나왔던 구멍으로 샤샤샥 사라져갔다.
마수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구멍이 뻥 뚫려있던 벽이 메워져 간다.
필경 다른 마수들의 짓이겠지.
모든 일이 벌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스고르가 재빨리 반응하기는 했지만 모두를 구출하지 못했다.
남은 자는 고작 수십여 명.
"뭐...야."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스고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