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자이앤트(11)
헬캣은 체스 일행이 들어오기 직전 입구 근처에서 몸을 샥 뺐다.
남들 눈에는 그저 귀엽디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일 뿐이라 그다지 신경을 쓰는 이 하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자이앤트와의 전투를 앞두고 온 신경이 곤두서있었으니까.
헬캣이 향하는 곳은 4군데의 입구 중 나머지 한 군데.
인간들이 향하지 않은 곳이었다.
샥-
체스가 향한 입구로부터 정확하게 대각선으로 얼마 동안 내달리자 있는 듯 없는 듯한 자이앤트 둥지의 입구가 보였다.
스윽-
입구로 한 발을 내딛는 헬캣.
순간 자이앤트가 내뿜는 적대적인 페로몬이 헬캣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환수들만이 할 수 있는 언어가 뿜어져 나온다.
[저건 인간이 아닌데?]
[뭐냐? 저건 인간계에 있는 동물 아닌가?]
[저런 건 여왕님께 가져가기도 민망하다.]
[인간들이 오기 전에 그냥 죽여서 한쪽에 치워. 아직 이 곳에는 인간들이 없는 것 같으니.]
쑥덕쑥덕-
'시끄러워 죽겠네.'
갑자기 헬캣이 둥지의 천장으로 도약을 했다.
천장 부분에 착 매달린 그의 앞발이 천장을 무가 파헤치고 들어가니 그의 눈앞에 떡하니 등장하는 건 자이앤트 병사의 큰 머리.
헬캣의 눈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이앤트 병사의 시커먼 눈이 보였다.
[뭐...뭐냐?]
-닥쳐. 이 하등한 것아.
허억-
그제야 헬캣이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자이앤트.
[너...너는...나는...단지...]
심하게 말을 더듬는 자이앤트 병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헬캣이라면...
자신들의 여왕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환수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은 자신의 여왕을 지키는 존재.
게다가 헬캣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굳이 좋은 의도로 인사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터.
본명히 뭔가 목적이 있겠지.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그 길을 막아버려야 한다.
자이앤트 병사가 자신의 집게를 양껏 벌리더니 무시무시한 기세 그대로 헬캣에게 몸을 쑤욱 들이댔다.
이대로라면 단숨에 헬캣의 머리가 뎅겅 날아갈 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롯이 자이앤트가 그리는 그림일 뿐.
분명히 시작은 헬캣이 느렸지만 더 빠른 건 헬캣이었다.
빛살처럼 움직이는 헬캣의 앞발.
퍼억-
순식간에 헬캣의 앞발이 자이앤트의 머리를 후려치고 그 머리는 잘 익은 수박이 깨어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머리가 가루가 되며 녹색 체액이 후두둑 떨어진다.
하지만 이미 헬캣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어느 새 또다른 자이앤트 병사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너희 여왕은 어디에 있냐?
[뭐...뭘 하려고 우리 여왕님을 찾는 것이냐?]
역시 헬캣이다.
헬캣이 내뿜는 기세에 그대로 짓눌려 버린 자이앤트 병사였다.
자신의 여왕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환수들이었기에 더욱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의 존재를 척살해야 하는 게 자신들의 역할.
그러나 이미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에게 겁을 먹어버린 터라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네놈들. 어떻게 넘어왔지?
[여...여왕님의 명령에 따라 문을 넘어왔다.]
-네놈들. 고작 그 허접한 능력으로 잘도 무리를 이끌고 넘어왔군.
[우...리는 모두 한 동족이다. 그렇기에 넘어올 수 있었다. 많은 동족을 잃기는 했지만.]
뭐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세력의 약화까지 감내하면서 넘어온 것이었구만.
-여왕은 어디에 있지?
샤아아아아아악-!!!
여왕의 위치를 묻는 헬캣에게 갑자기 어마어마한 적대감과 살기를 뿜어대는 자이앤트 병사.
그것 만큼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죽음의 향기보다도 훨씬 우선 순위인 듯 보였다.
-미친 놈. 네 놈들이 그러니까 주인들조차도 관리를 하는 거다. 누울 곳을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도 모르냐?
퍼억-
파사삭-
더 이상의 대답은 물어봤자 나오지 않겠지.
헬캣의 앞발이 무자비하게 남은 자이앤트 병사의 머리를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하여간 이것들은 도움이 안돼. 쯧쯧.
혀를 끌끌 차는 헬캣.
그나저나 여왕은 또 어떻게 찾나...
또 어떤 놈을 족쳐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결과는 비슷할 것 같지만 말이지.
-하. 결국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하나?
헬캣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이앤트 둥지는 심히 복잡하다.
게다가 여왕이 있는 곳은 둥지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
스스로 길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길치인 헬캣이었다.
-에잇. 뭐 가보면 나오겠지. 아차. 까먹을 뻔했네.
헬캣이 갑자기 자신이 죽인 자이앤트 병사의 시체를 뒤졌다.
그리고 그가 꺼낸 것은 두 개의 환석.
-보자.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주면 되겠지? A급이니까 지난 번에 내가 먹은 것보다 훨씬 낫겠네 뭐.
그거 하나 먹었다고 어찌나 갈궈대는지 원.
더러워서 하나 챙겨준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잘 하고 있으려나?
잠시 기감을 탐지해 보니 다수의 기운이 감지가 되었다.
마수 사냥꾼들과 환수들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순식간에 꺼져가는 기운들도 다수 있고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는 기운들도 여러 개 느껴졌다.
-잘 있네. 그럼 됐지. 보자 그럼... 난 여왕이나 좀 찾아볼까나~
폴짝 뛰어내린 헬캣은 환석 하나를 오도독 갉아먹으며 둥지 안쪽의 어둠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
헬캣이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 때 체스네는 좀더 안쪽으로 간 상태였다.
'저 새끼.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앞에서 걸어가는 체스의 등을 바라보는 참견쟁이 스고르였다.
체스는 여전히 심슨과 나란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알았다고? 자세히 좀 이야기해봐."
"아유.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요. 나도 잘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진짜다.
설명을 하려고 해도 그냥 보인 걸 어떻게 설명을 하라는 건지.
헬캣이 말한 대로 뭐 상이 열렸다거나 이런 말을 어떻게 하나?
말을 해도 믿지도 않을 거면서.
"... 너 혹시 뭐 등급을 숨기거나 그런 건 아니지?"
자꾸만 의심이 간다.
심슨 자신이 보기에 이 녀석 평범한 실버 등급의 보류 따위가 아니었다.
무슨 실버가 실버 등급 이상의 마수와 그렇게까지 저돌적으로 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는 한은 그런 놈은 절대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말을 안 해줄 뿐이지.
"이 자식 분명히 아이언 등급이에요."
이제야 끼어들 틈을 찾은 스고르가 그들의 대화가 끼어들었다.
"그래?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지금도 어쩌다 용케 살아남은 것 뿐인데 무슨. 흐흐흐흐."
"아닌데... 내가 보기에는..."
스고르의 말에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심슨이었다.
그때 다시 체스가 외쳤다.
"잠시만요!"
그의 말에 심슨이 재빨리 손을 들고 일행들을 멈췄다.
그리고.
"온다!"
본방의 시작이었다.
어마무시한 기세로 자이앤트들이 벽을 타고 통로를 따라 자신들을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