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심사 후(5)
머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머리는 지극히 정상인데?
체스가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가져가 더듬었다.
주물럭 주물럭-
...아닌데.
이제 돌아버린 게 틀림없다.
열리긴 뭐가 열렸다는 거지?
머리 뚜껑을 열어놓고 무슨 뇌를 식히는 것도 아니고 되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머리가 열렸으면 벌써 시체가 되어도 열두 번은 더 되었겠지.
그런 체스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헬캣.
어쩌다 이런 놈에게 그런 인연이 닿아버린 건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끌끌끌-
-에라이. 모자란 녀석아.
"힉. 모...모자라다뇨?! 제가 얼마나 나름 영재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아~ 뭐 숫자 0부터 시작해서 영재냐?
"... 하아. 그거 설마 웃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죠? 그런 썩은 내가 나는 개그를."
아니 뭐 여하튼.
보통 설명을 하면 어? 가르칠 때도 딱 어?
육하원칙으로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매번 대화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이 헬캣은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를 않는다.
그러니 이해를 할 수가 없지.
체스는 헬캣을 향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얼른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듯한 표정이다.
-좋아. 특별히 설명을 해주지. 한 마디로 큰일이 났다는 이야기지. 원래대로라면 순서대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야 하는 것을 넌 단숨에 뛰어 올랐다는 말이지. 그 멍청한 녀석을 상대하면서 너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 분의 기운이 너와 섞여가는 것이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 알아듣기 쉽게 좀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왕 해주기로 마음 먹으셨으면."
-역시 넌 확실히 머리가 나쁘다.
아니.
우리 부모님이 끙차끙차 힘을 써서 넘겨주신 이 머리가 뭐가 어때서.
체스가 눈을 부릅떴다.
"...부모님은 건드리지 말죠."
-이봐 이봐. 이러니까 머리가 나쁘다는 거야. 딱 하면 척 알아야지.
"아니. 참나. 말을 자꾸 두루뭉술하게만 해주는데 어떻게 알아요?"
-이대로라면 모든 것들의 목표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되겠군. 이상한 데 없냐?
"아뇨. 전혀."
오히려 지나치게 건강하게 보여서 문제인데.
머리가 열렸다느니 뭐가 어쨌다느니.
심사장에서 승급심사를 할 때도 봐라.
몇 번이나 날아가고 처박혀도 이렇게 멍 하나 없이 멀쩡하지 않은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체스의 눈에는 그저 6개로 뚜렷하게 갈라진 빨래도 가능할 법한 단단한 복근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 체스의 얼굴.
"자세히 말을 좀 해주세요."
자세를 고쳐 앉는 체스.
-이제야 들을 자세가 좀 되었군. 좋아. 그럼 이야기를 해줄까?
헬캣이 폴짝 뛰어내리며 제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순서를 벗어났다는 말이다. 하나가 완성이 되면 다음 하나가 열려야 하는데 넌 역순으로 흐른 것이지. 그러니 본디 수용을 해야 하는 부분에서 그게 안 되니 네가 가진 그 기운이 마구 새어나오는 것이고. 멍청한 불나방 같은 것들이 자꾸만 찾아오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그 열린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 아예 기초부터 아무 것도 몰라서 이해를 못 하는 것이었나. 이거 모든 걸 다 가르쳐 주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양이고 네가 이해를 못 할 테니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지.
"네."
헬캣은 간략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간단히 얘기하면 한 마디로 그것이었다.
인간이건 환수이건 간에 모든 숨을 쉬며 살아가는 생물들은 상중하 3단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 시작은 중단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단, 마지막으로 상단의 차례로 만들어 진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얻는 경험이나 수련에 따라 그 기운들을 차례로 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진다고 했다.
그 계기가 언제 오는지 그걸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벽을 마주한 본인.
넘거나 못 넘거나 그 또한 오롯이 자신에게 달린 것.
게다가 벽까지 가게 되더라도 더 큰일이 있다.
그것은 그 벽을 넘는 것.
하나의 벽을 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만 한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벽까지 가더라도 그 앞에서 주저앉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존재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마수 사냥꾼을 예로 들면 보통 하급의 마수 사냥꾼들은 중단이 조금씩 열리는 선에서 끝이 나지만 간혹 하단을 열고 그걸 넘어 상단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흔히 영웅이라 일컫는 존재들.
극소수로 존재하는 그런 벽을 극복한 인물들.
마수 사냥꾼으로 치면 사파이어 그리고 다이아 등급 정도 되려나.
하지만 현재 체스는 벽을 깨고 나발이고 그딴 것 없이 바로 쑤욱 열려버린 것이다.
본인은 전혀 자각을 못 하겠지만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되겠지.
그래서 그 기운이 멈추지 않고 스물스물 새어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를 추가한다면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나의 그릇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릇의 크기는 물론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
거기에 물을 따라보자.
차츰 그릇에는 물이 차오르겠지.
그걸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그 물의 양을 다 감당하지 못한 그릇에서는 물이 넘쳐버릴 것이고 결국 물은 차고 또 차서 그릇마저 와장창 깨어져 버리겠지.
그게 바로 지금 체스의 상태였다.
지금 당장이야 와닿지 않으니 본인이 자각을 하지 못하겠지만 점점 신체적으로 무리가 갈 것이고 종국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퍼어어어엉-
터져버리겠지.
그럼 담길 곳을 잃은 그 기운은 또다른 재앙이 되어 두 세계를 덮칠 것이고 그 또한 퍼어어엉.
그것이 바로 헬캣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있는 체스.
헬캣이 보기에는 자신이 심각하게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저 표정...만 봐도 알지.
힐끗 지켜보기만 해도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녀석이 아닌가.
헬캣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은 1도 없는 체스.
그는 지금 자신 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흠. 그럼 굳이 그 힘든 벽을 안 깨고 바로 상단이 열렸다면 훨씬 좋은 것 아닌가? 마수들로 따지면 S등급 이상이 대부분 그런 걸 경험한 녀석들일 것이고.'
왐마-
그럼 정말 자신이 대단한 것 아닌가!
갑자기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가기 시작한 체스였다.
으흐흐흐흐-
참을 수 없다는 듯 새어나오는 그의 웃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