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54화 (54/249)

#54

라이손 성(7)

굽이 높은 보라색 구두발이 천천히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주 천천히 머리 위로 떨어진다.

아.

드디어 마지막인가.

그러고 보니 20여 년 간 참 치열하게도 살았었지.

굳이 아쉬운 게 있다면 연애도 한 번 못해본 것 정도...?

에휴.

이럴려고 그렇게 아둥바둥 살았었나싶다.

마무리는 비현실적인 이 곳에서 비현실적인 죽음이라.

드라마틱하네.

엄마.

나 열심히 살았어. 그치?

문득 체스의 눈앞에 엄마가 손짓하는 것 같았다.

손을 훠훠 젓는 게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죽기 직전 자신 만의 생각에 빠진 체스였다.

그 사이에도 그 자의 발은 위세 좋게 공기마저 짓이겨가며 체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슈아아아아아-

곧.

이제 곧.

체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순간.

와장창창-

천장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갑자기 모든 것이 촤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의 시발점은 보라빛 천장.

저마다 다른 의미로 동그래진 2쌍의 눈동자는 그 천장을 향해 있었다.

천장부터 시작된 붕괴는 순식간에 주변으로 번져가며.

온통 보라색 일색이던 그곳은 그뤟게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와그르르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호오옹? 이게 다 뭐래???"

황당하다는 표정의 그 남자.

그는 하릴없이 무너지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떨어지는 조각들은 서로에게 투영되어 가며 주변을 온통 반짝이게 만들었다.

유리가 깨어지듯 그대로 촤르르 사라져 가는 그의 세계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그 남자.

그는 체스를 밟으려던 발을 거둔 채 재빨리 뒤로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 보라색의 세계는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반투명한 색의 뭔가로 채워지는 그 곳.

그는 매섭게 눈을 뜬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이건 분명히 결계. 누구냐. 도대체 어떤 녀석의 짓이냐.'

자신의 세계를 깨뜨린 존재가 누구인지 찾는 그.

이걸 깨뜨릴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조차도 얼마 없을 터인데.

게다가 쉽게 움직일 수도 없다.

어떤 존재가 관여한 것인지도 모르는 판에 괜히 움직였다가 되레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릴 정도라면 무조건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존재라는 말이었다.

'이런 곳에 그 정도의 존재가 있단 말이냐?'

그런 그에게 포착되는 무언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체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녀석이었다.

'아니. 저거... 저 놈이 왜 여기에 있지?'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의 새하얀 고양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앞발을 할짝이는 데 정신이 팔린 녀석이었다.

헬캣이었다.

그는 그저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주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탁-

-별일없냐?

전방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체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헬캣.

"...뭐 덕분에 산 것 같긴 하네요. 진짜 죽을 뻔 했지만."

-거봐라. 내가 이상한 놈들이 온다고 했지? 낄낄낄.

"...저 자... 혹시 아시는 잔가요?"

헬캣은 체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연미복의 남자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지금 저기 인간이 아주 좋아할 법한 모습을 한 저것.

저기에 절대 속으면 안 된다.

지금 저렇게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은 단지 눈속임일 뿐이다.

저거 저거...

흉악하고 잔인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녀석이다.

아니 감당할 수 없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최소한 팔 하나 다리 한 짝 정도는 주고 가야 겨우 도망이나 갈 수 있을 정도이려나.

하지만 혹여나 마음 속의 동요라도 들킬까봐 짙은 화장으로 올라간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리며 미소를 짓는 그였다.

그리고 입을 여는 그 자.

"오호호호홍. 당신 같은 존재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이죠?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당신이 말이죠~ 이제 어딘가에 속하기로 마음 먹으셨나봐요? 외로우신가?"

그 남자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둘은 확실히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보였다.

그는 지금 자못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며 헬캣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저 말이 말 그대로 반가움의 표현인지 빈정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투이긴 했지만.

-후후훗. 어글리불. 오랜만이지. 하여간 누가 청소부 아니랄까봐. 왜 왔냐? 결계까지 치면서까지 해야할 일이 있었나봐?

"오호호. 글쎄요~ 왜일까요? 아마추어처럼 왜 이러실까나~ 그건 당신이 훨씬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어글리불.

헬캣이 어글리불이라 부르는 보라색 연미복의 저 남자.

그는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그 역시 환수계의 환수.

더군다나 결계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환수였다.

저 정도의 결계는 아무리 환수라도 어느 정도 등급이 되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청소부라니?

청소부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게 생겼는데...

실은 헬캣이 그를 보며 청소부라고 칭하긴 했지만 그는 한낱 청소부로 치부할 존재가 아니었다.

헬캣 정도나 되니 저렇게 그를 부를 수 있는 것이지 오히려 그는 해결사나 암살자에 더 가까운 환수였다.

하지만 둘은 어글리불의 말마따나 서로 다른 곳에 속해 있는 환수들이었다.

헬캣은 아무의 지배도 받지 않는 중립인 환수인 반면에 어글리불인 그는 서쪽 지역에 속하는 환수였다.

-그나저나 냄새 맡고 왔냐?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것에 대해 알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구만. 그리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그걸 노릴 이유는 또 뭐래? 네 주인은 아직 중립이지 않냐?

"오호호. 굳이 제 주인이 아니더라도 그건 당연히 누구나 탐내는 게 아닐까요?"

-이건 네가 함부로 탐낼 게 아니다. 돌아가는 게 신상에 좋을걸?

앞발을 핥으며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하는 헬캣이었지만 저건 분명히 경고였다.

아니 그냥 살기 충만한 협박이었다.

헬캣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어글리불.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일단은 물러가야겠지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이상 환수계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금방일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벌써 환수계 전체에 쫙 퍼져있을 지도 모르죠.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지만 모든 환수들을 다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요? 오호호호호호홍."

-그건 네가 신경쓸 게 아니지. 그렇게나 지금 여기서 그냥 죽는 게 소원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용의는 있다만.

"에이~ 그럴 리가 없죠. 그럼 나중에 다시 오죠~ 오호호홍."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할 말은 이제 끝이라는 듯 어글리불은 순식간에 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어글리불이 사라진 곳을 말없이 응시하던 헬캣.

헬캣은 꽤나 곤란해진 표정으로 앞발을 들어 얼굴을 긁으며 혀를 찼다.

-끌...

한편 얼이 반쯤 빠진 체스는 몸을 엉거주춤하게 일으키는 중이었다.

둘이 대화를 한창 주고 받더니 갑자기 그 자는 도망을 치고 헬캣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라.

중간에 끼인 자신으로서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작금의 상황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

멍한 표정의 체스가 괜스레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