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라이손 성(6)
"이...이게 다 무슨 일이래?"
긴 인생은 아니지만 평생 마수를 잡으며 살아온 체스다.
그런 그가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의 행동이 멈춘다.
걸어가던 사람.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사람.
단 한 명도 안 빼놓고 말이다.
게다가 체스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배경.
길부터 건물의 벽돌 하나까지 모두 보라색으로 변해간다.
지금 이 곳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 밖에 없었다.
"뭐...뭐야...?"
순간.
슈르르-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어떤 사내였다.
그 사내는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체스의 눈앞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온통 보라색으로 깔맞춤을 한 중절모를 쓰고 연미복을 입은 남자였다.
말려 올라간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멋들어진 유행 지난 중절모를 쓴 채 뒷짐을 진 그대로 땅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네...'
체스의 시선은 그 남자에게 고정이 되어 있었다.
화장을 떡칠한 얼굴이었기에 본 얼굴이 어떨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이 움찔거리는 체스였다.
하지만 워낙 개성이 강한 그 남자의 분위기 탓일까.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호호~ 역시 당신이 냄새의 근원지가 맞군요~ 여긴 어디냐구요? 제가 만든 세계랍니다~ 멋있죠?"
빙그르르 한 바퀴 도는 남자.
그리고 체스가 물어보기 전에 자기 할 말만 쏙 하는 사내였다.
체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헬캣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대충 그런 류가 목적인 듯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체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등 뒤에 검이 제대로 매여져 있는지 살짝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검은 자신의 등에 잘 매어져 있었다.
체스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 남자.
그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무리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굳이 싸우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긴장은 풀어요~ 심장에 무리가요."
"...넌 누구지...?"
긴장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입이 바싹 타는지 체스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에게서 좀 탐나는 게 있어서요~ 필요하기도 하구요. 오호호. 그건 당신이 가질만한 게 아니니 제가 가져가야겠어요. 우리 평화롭게. 알죠~"
할 말이 끝난 듯 남자는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카드 한 장.
단 한 장의 카드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후훗. 마술을 보여드릴까요?"
"...?"
체스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얼 달라더니 또 마술을 보여준다라.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슨 속셈이지? 저걸로 뭘 하려는 거야?'
체스가 생각을 하는 사이 그 남자는 손가락을 살짝 몇 번 튕겼다.
한 번 튕길 때마다 늘어나는 카드.
1장의 카드는 3장이 되고 다시 5장, 10장이 되고 그리고 그의 한 손에 가득 트럼프가 찼다.
촤라락-
카드를 다시 모으는 그 남자.
다수의 카드는 다시 이내 한 장의 카드로 돌아왔다.
'저걸 왜 보여주는 거지...?'
체스가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그 남자가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잘 보셨나요? 오호호."
"아...뭐..."
"그럼 관람료를 내셔야죠~ 관람료는 그걸로 받아가겠습니다~ 그럼 실례."
촤악-
남자가 한 장의 카드를 뿌렸다.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있던 체스는 순간적인 반사신경으로 자신의 등에 매여져 있던 칼을 뽑아 막았다.
캉-!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카드와 칼이 부딪혔는데 쇳소리...?
엉겁결에 카드를 막아낸 체스는 자신의 대검을 슬며시 보았다.
헉-
뭐야. 이게...
분명히 한 장이었는데.
게다가.
그 한 장의 카드는 어느 순간 3장의 카드가 되어 자신의 검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카드가 박힌 검날 부분에는 실금들이 자글자글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게 가능한 거야...? 맞으면 그냥 골로 가겠는데...'
손을 들어 카드를 당겨 보았지만 이미 박혀버린 카드는 옴싹달싹하지 않았다.
"오호호. 막을 줄은 몰랐네요? 그저 바닥인 줄 알았더니 숨겨둔 게 있긴 했나봐요? 그럼... 조금 더 난이도를 높여볼까요?"
이번에는 카드를 3장으로 만든 남자.
다음 행동은 신속했다.
슉- 슉- 슉-
이번에 체스를 향해 날아오는 카드는 3장이었다.
정확히 체스의 몸을 노리며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카드.
체스는 재빨리 몸을 날려 땅과 수평으로 몸을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머리와 다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2장의 카드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심장 부근을 향해 날아오는 카드는 막기가...
'쳇.'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검을 들어 다시 한번 카드를 막는 체스.
서겅.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나가며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하체 부분의 옷이 찢겨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의 검에 박히는 마지막 하나의 카드.
쩅그랑-!
두번째 카드가 체스의 검에 단단히 박혔다.
순간 산산조각나는 대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그의 검은 그렇게 박살이 나며 깨어지는 유리조각마냥 공중으로 비산했다.
체스의 몸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겨우 막기는 막았으나 카드에 실린 힘이 예사롭지 않은 듯 뒤로 주르륵 밀려나가던 체스의 몸은 허공으로 살짝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우당탕탕-
헉헉헉-
'무슨 카드 한 장의 힘이...'
땅바닥에 놔뒹굴던 체스가 재빨리 일어났다.
덕분에 멋진 착지는 대실패.
몸을 둘러보니 다리 부분 이외에는 상처가 없었다.
하지만 무기가 없다.
이미 박살이 나버린 자신의 대검은 자루만 달랑 남아 있었다.
'낭패네. 무기가 없는데. 아씨...'
"오호호. 이제 그럼 가져가면 되려나? 그러게 가만히 있으랬더니 왜 그렇게 힘을 빼고 그래요~"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는 그 남자.
"에라이~"
체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자루를 냅다 그에게 던진 후 바닥에 떨어진 검 조각을 주웠다.
그리고 있는 힘껏 팔을 뒤로 젖힌 체스.
온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활시위마냥 팽팽하게 당겨지는 그의 팔이다.
일순 체스의 팔에 튀어나온 힘줄들이 꿈틀거렸다.
"하이야압!!!"
힘차게 검 조각을 날린 후 재빨리 그에게 도약하는 체스.
무기가 없으니 주먹이다!
꼭 한 방 먹일 생각인 체스였다.
'시야를 분산시키고 몸으로 부딪혀 온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녀석이네. 오홍.'
하지만.
"훗."
체스가 날린 검 조각은 이미 그 남자가 들고 있던 카드에 의해 땅바닥에 놔뒹굴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얼굴에 체스의 주먹이 닿기 직전 손을 들어 그 주먹을 움켜쥐었다.
텁-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체스의 힘이 훨씬 강했던 탓일까.
그 남자의 몸이 한 발자국 밀려났다.
'아니...?'
분명히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믿기 힘든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서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체스와 그 남자.
그가 잡은 체스의 주먹에서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둘 중 한 명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벌써 섞여? 인간의 몸인데? 아니 애초에 인간이 받아들일 수가 있나?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럴 리가 없다며 지금의 현실을 부정한 남자의 몸이 갑자기 빨라졌다.
잡은 체스의 손을 그대로 땅으로 내려친 남자는 땅에 박힌 체스의 몸을 힘껏 걷어찼다.
퍼어억-!
신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체스.
"오호호호홍~"
어차피 그 기운을 빼내기만 하면 자신이 아닌가.
이 못난 놈이 죽든 살든 그건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남자는 그런 체스를 쫓아 그대로 머리를 빠개버릴 기세로 발을 힘껏 치켜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반격조차 못한 채 속절없이 밀려나는 체스.
그의 발이 자신의 바로 눈앞에 나타나며 두 눈을 가득 채워갔다.
체스는 공포감에 질린 채 있는 힘껏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