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라이손 성(5)
그 사이 체스는 참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의뢰소에 가서 접수도 하고 장비 수선도 하고 하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이 저녁이 되었다.
"후... 바쁘다 바빠."
그리고 오늘 일정의 마무리.
이게 몇 년 만의 만남인지.
체스는 피커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는 중이었다.
"야~ 이게 얼마 만이냐? 진짜~ 이제 술도 마실 수 있고 어른 다 됐네~ 수염도 거뭇거뭇한 게 말이지. 흐흐흐."
"그러게요~ 잘 지내셨죠? 얼굴을 보니 잘 지내신 것 같긴 하네요. 하하하."
"주름만 늘었지 뭐. 가는 건 시간이고 늘어나는 건 주름이더라. 흐흐흐흐."
"에이 뭘~ 아직 말끔하신데요 뭐."
"그러냐? 크흡. 말이라도 고맙다."
피커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나저나 고향에 돌아간다더니 엘윈 마을이었지? 거기서 빚은 다 처리한 거야? 여기는 웬일이야? 놀러온다고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거고."
갑자기 체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 빚은 다 갚았는데요..."
체스가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체스.
체스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 나올수록 피커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다.
게다가 체스가 배신을 당해서 칼을 맞았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는 정말이지...
그 분을 참을 수 없는 피커였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주먹을 불끈 쥐고 테이블을 콰앙 내리치는 피커.
"아니 뭐 그딴 새끼들이 다 있지? 등처먹을 놈이 없어서 널 등처먹는단 말이야? 애가 좀 못나서 그렇지 나쁜 애가 아닌데. 그 개또라이같은 것들이 진짜!"
체스가 약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욕인지 위로를 해주는 건지 참 애매한 피커의 말이었다.
그나저나 화가 가득 차올랐는지 연거푸 술을 마시는 피커.
체스가 비록 저렇게 생겼어도 심성 만은 아주 고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등 뒤에서 칼을 꽂아?
내 이 놈들을 진짜!
피커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리며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어휴. 다 지난 일이에요. 진정하세요. 오늘은 간만에 만났으니 그간에 이야기나 해요~"
오히려 피커를 달래는 체스였다.
이거 참.
어째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만은.
그래도 체스가 달래준 덕분에 화가 가라앉은 피커는 체스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강해졌구나. 그 때보다 더.'
"...그랬구만... 여하튼 고생이 많았네. 그래서 이제는 어떡할 거냐?"
"뭐 어떡해요? 어떡하고 자시고도 없어요. 안 갚으면 추심이 들어온다는데 거기에 이자까지 붙으면 아마 난리날 걸요?"
"그래. 빚이 참 그렇더라. 나야 공무원이니 나름 괜찮긴 하지만 그게 참 힘들다더라. 쉽지가 않아. 더군다나 그 액수는 엄청나던데?"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는 피커였다.
"그런데 그게 되겠니? 아이언에서 바로 실버 심사를 본다며?"
"모르죠. 그래도 이 방법 밖에는 없어요. 실패하면 그 뒤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무조건 올려야죠."
단호한 말투의 체스였다.
뭐 이 아이라면 잘 하겠지.
걱정은 안 된다만.
"나야 잘 모르긴 하지만 마수 사냥꾼들의 승급 심사는 매우 어렵다던데..."
"에이~ 일단 해보면 알겠죠~"
"그래. 하긴 네 장점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니. 잘 하겠지. 그런데 그게 만약에 안 된다면 다른 방안을 좀 생각은 해봤는데 말이야."
"네? 다른 방안요?"
"응. 혹시나 모르니까 말이야. 내가 그래도 이 쪽에 오래 있었잖아. 이게 마수 조합들이 처리를 못하는 건수가 꽤나 있더라고?"
금시초문이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마수에 관한 건 마수 조합에서 모든 걸 처리하는 게 아니었나?
"그런 것도 있나요?"
"그래. 이게 보수 면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하는 거라 아무래도 좀 차이가 있기는 한데 질이 낮은 의뢰들이 많이 있더라고. 경쟁이 좀 치열하긴 한데 그런 것들도 필요하면 내가 알아봐 줄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마수 조합에서 모든 걸 다 감당하기에는 힘드니 국가에서 담당하는 의뢰가 따로 있는 듯했다.
이건 확실히 도움이 될 듯하다.
그나저나 참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을 좋게 봐줬으니 이런 이야기를 흘려주는 것이겠지.
간만에 여러모로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체스였다.
****
"벌써 가시게요?"
"야야~ 가야지. 늦게 가면 또 얼마나 혼날 지 몰라. 애들도 안 보고 어딜 싸돌아 다니냐고... 너도 결혼해 봐라. 이 고통을 알게 될 거다."
"하하하. 아직 저야 뭐..."
그 무슨...
우선 연애부터 좀...
그래도 그런 티는 안 내며 겸연쩍어할 뿐인 체스였다.
'귀여운 놈.'
외모만 곱상하게 생겼더라도 아마 여럿 여자 울렸을 것 같은 체스다.
요즘 세상이 지나치게 외모 지상주의여서 그렇지 체스 정도라면 만약 자신에게 딸이 있으면 사위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긍정적이이지,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착실하게 살지.
게다가 성격 또한 사근사근하니 남자로서는 최고의 성격인 녀석이었다.
또 저런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얼마나 여린 아인데.
물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딸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말이다.
볼이 약간 달아오른 체스를 빤히 쳐다보던 피커는 체스에게 간다며 손을 흔들었다.
"여하튼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성문으로 찾아오고~"
"네~ 가세요. 아저씨. 다음에 또 뵈요~"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혼자서 숙소로 추적추적 발걸음을 옮기는 체스.
꽤나 밤이 늦은 듯 길 주변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술도 적당히 마신 게 딱 기분 좋을 정도의 취기가 올라온 체스였다.
"하아~ 즐거웠다. 그럼 보자... 내일은 심사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야겠네. 처음 측정했던 때와는 아주 다르겠지?"
체스는 심사에 대해 생각했다.
자세하게는 몰랐지만 대충 주워들은 내용은 있었다.
마수 조합은 승급 심사에 살아있는 마수들을 이용했다.
그렇기에 늘 마수들을 따로 모아두는 성들이 따로 있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 말은 많았지만 워낙 영향력이 큰 마수 조합이 아닌가.
그딴 소리는 싸그리 무시하는 마이웨이 마수 조합이었다.
여하튼 이 곳 라이손 성은 골드 등급의 심사까지 가능하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체스가 승급 심사를 신청한 것이었다.
'너무 모험을 하는 건 아닌가 몰라...'
고작 아이언 등급인 자신이었다.
끽해야 잡아본 건 낮은 마수들.
그래도 거기에서 보인 실력 만으로도 등급은 올릴 수 있으니.
체스가 믿는 것은 실력보다는 자신의 튼튼한 몸뚱아리였다.
탕탕-
"부탁한다. 내 몸뚱아리. 킬킬."
뭐가 그리 좋은지 술김에 낄낄 웃으며 체스는 발걸음을 계속 이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순간 체스는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오감이 하나씩 막혀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토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놀라서 걸음을 멈춘 체스 주위의 사물들이 심하게 요동을 친다.
"어? 뭐야? 뭐야?"
당황하는 체스.
체스가 걸어가던 주변 거리가 변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