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환수계(2)
절래절래 손을 젓는 키린.
그것도 매우 빠르게.
매우 싫다는 단호한 표현이었다.
"아서라~ 나 죽일 일 있냐? 지금도 뜨거워서 못 견디겠는데 네 성에 가면 아마 그대로 녹아버릴 걸~?"
"그래? 녹으면 어때~ 녹으면 내가 멋들어지게 나의 콜렉션에 추가해주면 되지~"
"아니야~ 난 내 성이 좋아. 그냥 네가 내 성으로 와."
"오호호호호호~ 그건 또 좀 싫으네?"
그녀는 연신 불꽃을 머금은 채 반짝이는 루비가 박힌 날개를 계속 접었다 폈다.
"아유~ 힘들어. 날개짓하는 것도 힘드네."
아...
저거 분명히 뭔가 계략을 꾸밀 때 하는 건데.
"야... 살을 좀 빼. 그러고 보니 엄청 부었네."
얼른 주제를 바꾸는 키린이었다.
"오호호~ 이 글래머러스한 게 더 어울리지 않니? 나의 열정적인 모습에 딱 어울리는 체형 같아."
갑자기 날개를 확 펼친 그녀는 한 바퀴 팽그르르 돌며 자신의 자태를 뽐냈다.
"...어...음... 그 뭐냐. 품종개량한 홍당무 같아."
"이런 푸르딩딩한 사탕수수 같은게. 야! 그런 소리할 거면 그냥 가."
좋아.
이거였어!
"...갈랬는데 네가 잡은 거잖아..."
"아~ 그렇지. 그렇긴 하지만 나야 아쉬워서 그러지~"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 마~ 아쉬운 마음은 단 1도 갖지마. 지금도 충분해~"
키린은 그녀와 더 이상 말을 섞었다가는 아예 녹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올랐다.
"나 간다~~"
마무리 인사만 던진 후 냉큼 하늘로 날아 도망치는 키린.
"훗. 귀여운 녀석. 참... 그나저나 어떻게든 결론이 잘 나야할 텐데..."
아쉬운 듯 입맛만 삼키는 그녀였다.
"아 몰라~ 뭐 잘 되겠지~"
그녀는 그 말만 한 후 기린이 떠나간 방향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자신의 성으로 날아갔다.
****
동쪽 지역은 남쪽과는 달리 온통 눈과 얼음으로 가득 덮인 지역이었다.
"좋아~ 바로 이거지."
자신의 지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만족한 표정을 짓는 키린.
낮게 비행을 하고 있는 키린의 눈에 환수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모두는 키린이 돌아온 것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각자 개성있는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함성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비행하는 와중에도 손을 흔들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 키린.
얼마 후 키린은 자신의 성에 도착했다.
눈과 얼음의 대지에 세워진 그의 성은 자신과 잘 어울리는 새파랗게 빛나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끊임없이 비쳐지는 하늘로부터 비치는 빛에 반사되어 쉴 새없이 반짝이는 그의 성.
키린의 눈에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그렇게 뜨거운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냐 그 녀석은."
만족스러운 눈빛을 한 채 성 안으로 들어가는 키린.
성 안의 모든 환수들은 키린의 모습이 보이자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당연한 일인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거기에 화답해 주는 키린.
"키린 님. 오셨습니까?"
그를 맞이하는 자는 그의 직속부하이자 자신의 부재시 이 곳을 총괄하는 켄타호른.
굳이 랭크로 이야기하자면 환수 중 SS급인 켄타호른이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인자한 품성을 지닌 그였다.
하지만 일단 화가 나면 각 지역의 주인들을 제외하고는 막을 수가 없을 정도의 강함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나 그가 사용하는 클라이언트는 환수계 내에서도 가히 일품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절정이었다.
물론 켄타호른에 대한 키린의 평가는 좀 엇갈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는 인간들처럼 콧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채 포마드 머리를 한 딱 봐도 집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항상 원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분이시다보니...
물론 그것은 S급 이상의 환수들은 모두 가능한 형태변환이었다.
본인도 그렇게 몇 천 년을 있다보니 어느 새 이 모습에 익숙해졌기에 늘 이 모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 켄타. 머나먼 여행이었지. 문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게 심각하긴 하네. 남쪽에 떨어지는 바람에 도망치느라 혼났네."
"그래서 그간 떠나셨던 일은 어떻게 잘 되셨습니까?"
감정이 풍부한 키린과는 달리 매우 무미건조한 질문이었다.
켄타호른은 다른 건 별로 관심도 없다는 듯 키린이 하고 온 일에 대해서만 물었다.
어차피 남쪽에 떨어졌다한들 자신의 주인인 기린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단 한 명, 부르사이를 제외하고는.
"응. 잘 끝냈지. 아니 굳이 이야기하면 끝냈었지려나?"
"...네? 그게 무슨 말...?"
"들은 그대로야. 켄타. 끝냈었다고~"
키린이라 불린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그런 후 피곤하다는 투로 기지개를 펴며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키린.
"???"
켄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했으면 한 거지 왜 과거형으로 끝이 나지...?
켄타는 방으로 들어가는 키린을 냉큼 따라 들어갔다.
피곤하다며 쉬고 싶다던 키린을 한사코 따라가 전후사정을 듣는 켄타호른.
잠시 후 키린의 방에서는 잔뜩 화가 난 켄타호른의 소리가 성이 떠나갈 듯이 울렸다.
"으아아아아아아!!!"
****
켄타호른의 얼굴은 지금 터질 듯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에 반해 별일 아니라는 듯한 키린의 표정.
"아니!!!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어렵게 만든 자신의 환석을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쓰다니.
켄타호른은 아무리 자신의 주인이라지만 키린이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어디 보통의 방법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던가?
더군다나 그것은 자신들에게 몹시도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한번만이라도 더 동쪽의 환수들을 생각했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터인데.
환수계의 모든 환수는 환석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자들인 다섯의 환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키린에게는 다른 환수들이 모르는 능력이 하나 더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환석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환수계에서 그것을 숨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로지 그것은 인간계에서도 끝 중의 끝.
대륙의 최북단.
그 곳에 있는 빙해 저 밑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숨겨둔 그것을 가지러 조용히 인간계에 다녀온 그였는데...
켄타호른이 출발할 때 신신당부를 했었다.
절대 다른 데에 써서도 안 되며 들켜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키린이 그것을 가져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환수계의 현 상황과 관련된 일이었다.
현재 환수계는 겉으로는 5명의 지배자가 각각 자신의 지역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보기일 뿐.
실상은 전혀 반대였다.
일단 어찌된 영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인간계로 통하는 문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계로 가는 환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예전에는 우연찮게 흘러 들어가는 환수들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자의에 의해 이동할 수 있는 환수들이 많아졌다.
환수계와 인간계의 기운은 엄연히 다른 것.
둘의 기운이 섞인다면 혼탁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넓어지는 문을 이용하자는 몇몇의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환수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실상은 이 기회에 환수들을 자유롭게 이동시켜 인간계를 정복하자는 게 진정한 목표였다.
물론 동쪽의 지배자인 키린은 문을 다시 원래 상태대로 돌리자는 쪽이었다.
그의 생각 하에서는 환수는 환수계에서 살아야만 했다.
인간들과 환수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생물들.
모든 환수가 일거에 인간계로 넘어간다면 인간계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복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단연 북쪽의 지배자 하르무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인간계를 아예 자신들 쪽으로 흡수하기 위한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배코와 부르사이는 아직까지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최종 결정은 호아류에게 달려있긴 했지만 아마 분명히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 키린이 먼저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었었다.
이번의 일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키린이 다스리는 지역의 힘이 월등하게 세지기 때문에 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모든 게 틀려버렸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해버린 자신의 주인인 키린이었다.
'그놈에 참...'
후......
켄타호른에게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 심히 걱정이 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