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환수계(1)
어느 공간에 문 모양의 무언가가 생겨났다.
직사각형 형태로 생긴 그것은 정확히 중간을 기준으로 위아래로 갈라졌다.
끝이 없을 정도로 어두운 그 속에서 나온 것은 한 남자.
남자가 공간을 넘어와 문을 통과하자 이내 그 문은 닫힘과 동시에 존재 자체가 사르르 희미해져갔다.
그는 신비한 푸른 빛의 머리색을 가진 호리호리한 남자.
체스를 살려줬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리고 그가 온 이 곳은 바로 환수계.
헬캣이 이야기했던 환수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아무도 함부로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곳.
그 곳에 발을 디딘 남자였다.
환수계에 도착한 그는 지금 매우 곤란한 얼굴이었다.
"아... 분명히 내 집 앞으로 바로 통하는 문인데 왜 여기로 나오게 된 거지? 그것도 하필 남쪽 지역이네. 그 녀석이 올 텐데..."
남자가 중얼거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하... 역시 그것 때문인가...? 하여간 좀 그냥 냅두면 안되나 몰라. 그러니 내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쉴 수가 없지."
하지만 말로 해서 그렇지.
지금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환수계는 인간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여러 개의 공간이 존재했다.
그 공간은 일반인들은 지나다닐 수 없는 곳.
먼 옛날 환수계를 들락날락거리는 인간들이 있긴 했으나 그것은 정말 머나먼 이야기이다.
지금처럼 환수가 마수로 취급받는 세상에서 그러한 교류는 일절 이뤄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기.
사내는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화끈거리는 열기에 볼이 다 따가울 정도다.
그가 도착한 이 곳은 온통 터져나갈 듯이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체온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점점 올라가는 느낌이다.
영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사내.
자신이 가려는 곳은 여기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 떡 하니 떨어져버렸으니 곤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귀찮은 건 피하고 싶은데..."
남자는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이 곳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도 않는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곳에서 자신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딱히 몇이나 되는 건 아니다.
단지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그러는 그였다.
혹여나 걸리기라도 하면 나중에 닥칠 일은 안 봐도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주변에 있던 환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구역에 이질적인 존재를 느낀 탓이다.
허락되지 않은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환수들.
모습을 드러낸 환수들의 모양새는 각양각색이었다.
크르르릉-
남자의 주위로 환수들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한 남자.
열기와 화끈함으로 가득 찬 이 곳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분위기의 남자였다.
!!!!!!
샤샥- 샥-
주위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던 환수들이 나타난 속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바람 같이 사라졌다.
으르렁거리던 처음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모습을 드러냈던 환수들은 그 자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 자도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딱히 혀를 끌 찰 뿐이었다.
굳이 남의 구역에서 말썽을 피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안 들키고 사라지는 게 훨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귀찮은데 그냥 날아가야겠다. 그 녀석. 나타나지는 않겠지? 오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지."
그는 자신의 지역이 있음직한 먼 곳으로 시야를 한 번 던진 후 슬슬 도망갈 준비를 했다.
"가볼까. 그럼."
그가 돌아가려는 그 곳.
그런데 그는 왜 이리도 서두르는 것일까.
환수계라 알려진 이 곳은 정확하게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곳이었다.
각각의 지역에는 그 곳의 주인이 통치자가 한 명씩 존재했다.
북의 지배자 하르무.
동의 지배자 키린.
서의 지배자 배코.
남의 지배자 부르사이.
그리고 마지막 하나, 환수계의 중심을 지배하는 크리스탈 드래곤인 호아류.
이 다섯의 환수는 인간계에 알려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SSS급의 환수들이었다.
존재 자체가 환수들의 상징이었으며 환수계의 중심이자 환수계의 모든 것인 이들이었다.
아마 인간들 사이에서는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환수라고 하면 적당하려나.
이 환수들은 인간들에게 있어 복을 기원하고 재해를 물리치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매해 일부러라도 새해를 맞이하며 무병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기원을 올릴 정도였으니.
혹여나 가끔 운이 좋은 인간들이 간혹 이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행운이었다.
또한 환수계는 인간계와는 달리 특징이 있었다.
각각의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섯 지역은 모두 극명하게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남자가 있는 곳은 부르사이가 지배하는 남쪽 지역.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기도 한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 느껴지는 열기가 너무나도 싫은 듯 연신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사라지기 위해 남자가 막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콰라라라라라락-
막 자리를 뜨려던 남자의 머리 위로 어마어마한 기운과 함께 힘찬 날개짓이 느껴졌다.
일순 구역에 가득 차 있는 열기를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 뜨거운 곳이다 보니 되레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가뜩이나 뜨거운 이 곳에 날개짓이 더해지자 남자의 창백하던 얼굴이 일순 붉게 달아올랐다.
순간 남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낭패감.
"아이씨... 망했네... 부하들이 알렸나보네... 이런 건 또 엄청 빠르단 말이야. 진짜..."
그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중얼거리는 사이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하나의 인영.
불타오르는 붉은 머리가 사방팔방 뻗친 약간 부은 듯한 여성이었다.
"오호호~ 키린~ 이 곳에는 웬 일이야? 날 보러 온 거야?"
****
그녀의 출현에 일순 주위의 분위기가 경건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부르사이.
환수계 남쪽의 지배자의 출현이었다.
부르사이가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녀가 저렇게 키린이라 부르는 남자라면...
그렇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바로 동쪽의 지배자인 키린이었다.
분명히 동쪽에 도착했어야 할 자신이 생각지도 못하게 환수계의 남쪽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얼른 튀었어야 했는데 키린이 채 떠나기도 전 그녀가 와버렸으니...
그 사이 톤이 높은 그녀의 목소리가 기린의 귀를 사정없이 긁어댄다.
눈살을 찌푸리는 키린.
"아. 잘못 들어왔을 뿐이야~ 인사도 서로 나눴으니 나 이제 그만 내 지역으로 가도 되지?"
"에이~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왜 그래~ 할 이야기도 있고 내 성으로 가자~"
부르사이가 은은한 목소리로 키린에게 권유했다.
'으으으...'
키린의 미간이 절로 찌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