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출발(9)
'말 참 많네...'
그래도 머리가 좋은 환수라 그런지 헬캣은 체스가 일러주는 말을 쉽게 이해하였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이내 행동으로 옮기는 헬캣.
어차피 이제 남은 거리는 지척이다.
목적지는 시야에 들어왔으니 금방 도착할 것이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시 라이손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헬캣 님은 여기에 있으신 겁니까?"
서먹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체스가 질문을 던졌다.
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지.
-흠... 여러 이유가 있다만. 내가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순 없지만 우선 너의 그 기운. 그게 느껴졌다.
"그... 헬캣 님이 오신 게 제 기운 때문이라는 거죠?"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네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그게 왜 지금 네 몸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혹시 너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인지 설명을 해줄 수 있나?
질문이 되레 질문으로 돌아온다라.
뭐 말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체스는 곰곰히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갔다.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 체스라 쉽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지만 되짚어 보다보니 뭔가 짚이는 게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어요."
확실히 이상해진 건 그 때부터인 것 같으니.
체스는 자신이 칼에 찔렸을 때의 일과 그 후의 일에 대해 헬캣에게 설명했다.
한참을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듣던 헬캣은 자신 만의 생각에 잠겨갔다.
-흠... 그것인가? 네 말대로라면 내 생각이 맞겠군.
"가설이요? 그게 뭔데요?"
-넌 몰라도 된다. 거기까지는 네가 알 필요가 없다. 환수계에는 또 그곳 만의 규칙이 있으니. 단지 네가 신경쓸 건 하나 뿐이다. 살아남는 것.
"네? 살아남는 것이요? 절 누가 노리기라도... 하나요?"
끌...
이 녀석은 정말 하나도 모른다.
-너의 그 기운이 문제지. 내가 괜히 네 앞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 기운은 정말 네 그릇에 맞지 않는 것이야. 그리고 그것은 환수들 모두가 원하는 긋. 낮은 등급의 녀석들부터 높은 등급의 녀석들까지. 특히나 높은 등급의 녀석들이라면 아예 환장을 하고 덤벼들겠지. 아마 밤낮으로 조심해야 할 걸?
"네???"
헬캣의 말에 체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고작 기운 하나 가졌을 뿐인데 자신을 노리다니.
이 기운이 도대체 뭐라고...
심지어 존재의 유무조차 몰랐고 자신은 사용조차 할 수 없는 기운인데.
이딴 계륵 같은 게 자신의 몸에 들어와있다는 것조차 불쾌한데 게다가 환수들이 덮쳐온다니.
말이야 방귀야.
"저... 이거 정말 제가 좀 넘겨드리고 싶거든요? 이런 걸로 괜히 고생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냥 이 기운 다시 가져가시면 안되나요?"
-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미안하지만 내가 건드릴 수 없다. 아까도 봤지 않느냐?
"그...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분을 만나면 알게 되겠지. 그 분의 의도를.
그리고는 입을 닫아버리는 헬캣.
헬캣의 의도는 분명했다.
가르쳐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체스가 오래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했었다.
가령 토마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이런 것들.
괜히 알게 되었다가 중간에 끼이는 바람에 고생을 한 적도 있잖은가.
체스는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시 이야기가 뚝 끊겼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헬캣이었다.
-마수 사냥꾼이지? 너.
"아...네. 그렇죠. 지금은 아이언 등급이지만 이번에 등급을 좀 올리려구요. 그래야 빚도 좀 까고..."
-역시 쓰레기 같은 직업이군.
체스가 왜 그 직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헬캣이었다.
방금 한 이야기들 중에 그런 내용도 충분히 섞여 있었으니.
그래도 싫은 건 확실히 싫은 것이다.
어느 새 혐오감이 가득 떠오른 헬캣의 얼굴.
"...전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만."
헬캣의 말을 잘못 이해한 체스가 발끈했다.
-우리 환수들을 죽이는 게 바로 너 같은 마수 사냥꾼이 아니냐? 그리고 난 네 직업을 비하한 게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환수족을 죽이는 그 직업을 싫어하는 것이다만.
"아..."
체스가 그제야 헬캣의 말을 이해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인간계에 있는 마수들은 인간을 학살하고 먹이로 삼았다.
대부분의 마수들이 마을을 습격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마수들이 마을을 휩쓸고 간 마을은 참 정말이지...
여하튼 그랬기에 인간들 사이에 마수 사냥꾼이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이었다.
마수들이 인간을 덮치기 전에 먼저 위협요소를 제거하자는 생각이지.
물론 위험하기는 몹시 위험하다.
생명을 걸고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만큼 보수가 따라오고 명성마저 얻을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인간계에서 최고의 직업으로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마수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계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준일 뿐.
헬캣 같은 환수들이 제일 역겨워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이 바로 마수 사냥꾼이었다.
가끔 그런 것들이 있잖은가.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위해 생명을 경시하는 그런 것들.
그들의 목적은 하나.
환수들의 몸 안에 든 환석.
즉 인간들이 마정석이라 부르는 것들을 구하기 위한 존재들이 바로 그것.
인간들을 사냥하는 환수들은 당연히 죽여도 상관이 없다는 게 헬캣의 지론이었다.
그런 환수는 인간계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기에 죽이는 게 당연했다.
환수와 인간들은 묵시적으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게 되어 있으므로.
그렇지만 인간들은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무고한 환수들까지도 마구 학살하고는 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그러니 헬캣이 마수 사냥꾼들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체스는 말문을 잃었다.
더 이상 반문을 할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좀더 공부를 했어야 했나...'
-여하튼 이상한 환수들이 네 주변에 자주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그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너와 같이 다닐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 헬캣 님이 말하시는 그 분은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
-그건 그 분의 의지다. 우리가 함부로 그걸 정할 수는 없다.
"아...네. 뭐... 그렇군요. 대단하신 분 납셨네요~"
찌릿-
걸어가던 헬캣이 걸음을 멈춘 채 체스를 째려보았다.
순간 주눅이 든 체스.
"뭐... 편하실 대로 하세요..."
-참고로 난 맛없는 것은 먹지 않는다.
와...
먹여주기까지 해야해???
체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헬캣을 빤히 쳐다 보았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귀엽다 귀엽다하니 진짜 귀여운 줄만 아나...'
하지만 체스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저 속으로 꿍시렁꿍시렁거리며 걸음을 옮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