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출발(7)
체스는 죽을 맛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더군다나 우린 처음 만난 사인데 다짜고짜 자신의 몸에 뭔가를 하려하질 않나.
힘 있는 놈이 갑이라더니 딱 그짝이다.
"아픈데...일단 여기 이 발톱을 좀..."
체스가 말을 하건 말건 그의 눈동자에 비친 헬캣의 눈동자는 맑고도 깊은 게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았다.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의 눈 앞에서는 진실만을 말할 수 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흠...
헬켓은 체스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말을 하는 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 따끔할 거다. 그래도 금방 끝날 거니 걱정마라.
마치 의사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푹 찔러넣을 때 하는 말과 같다.
헬캣은 발톱을 살짝 세웠다.
날카로운 발톱이 비쳐지는 빛에 반사되며 번득인다.
집도를 하기 직전의 비장한 표정이 헬켓의 눈가에 서렸다.
하지말라며 외치고 싶었던 체스였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 말.
숱하게 마수들과 싸우며 상처를 입었던 체스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가 느꼈던 어느 순간보다도 공포스러웠다.
게다가 몸도 마취라도 된 양 얼어붙어 움직여지지도 않으니.
그 사이 헬캣이 몸을 슬쩍 움직였다.
스윽-
발톱으로 체스의 심장 부근을 살짝 손으로 긋는 헬캣.
찰나의 순간이었다.
슬쩍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체스가 살짝 미간을 찌뿌렸다.
순간.
우우웅-
상처는 나지 않았다.
대신 투웅 밀려나는 헬캣의 발톱.
체스의 몸에서 강한 반탄력이 일어난 탓이었다.
헬캣의 눈썹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미묘하게 뒤틀리며 꿈틀거렸다.
-음...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이 기운.
자신이 이걸 빼내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 녀석을 죽여야 한다.
아예 영혼이 이 녀석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게만 된다면야.
-어렵네. 어려워. 그렇다고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 죄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헬켓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헬캣이 고민을 하는 사이.
체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헬캣을 보는 중이었다.
처음 느꼈던 공포감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뭘 저리도 혼자 중얼거리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헬캣이다.
아까부터 뭐가 있다느니 그걸 빼내야 한다느니...
방금 자신의 심장으로 헬캣의 발톱이 들어올 때 심장이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픔도 아픔이거니와 반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마저 들었던 체스였다.
'말로만 듣던 S급은 이런 존재였구나...'
마수도감의 저자는 마지막 장에 분명히 S급의 마수도 비빌 수 있을 존재라고 써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불...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비빌 수 있는 존재란 말이냐? 꿈쩍이기만 해도 바로 죽겠구만.'
그딴 말을 끄적여 놓은 녀석은 분명히 책을 팔기 위해 쓴 것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런 느낌을 받을리가 없지 않나.
'개...%$##$. 책 하나 팔려고 그딴 거짓말을 쳐?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똥물에나 빠져버려라. 니기미.'
B급 정도의 마수는 참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S급은 정말이지...
강하다는 표현조차도 헬캣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아고스트 따위는 몇 천 마리가 있어도 이 헬캣 하나도 못 이길 것이다.
그것이 헬캣을 직접 만난 체스의 심정이었다.
헬캣은 체스의 심장에서 빼낸 발톱을 혀로 샥샥 핥았다.
발톱을 핥는 녀석의 모습은 세수를 하는 고양이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역시 겉모습만 보면 판단하면 안돼.
암. 그렇고말고.
-야.
"어...어. 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헬캣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체스.
-너. 그 분이랑 무슨 관계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보이는 녀석이 아... 아니지. 됐다.
"네...? 그게 무슨 말...?"
-하긴 네가 뭘 알겠냐. 앓느니 죽지. 됐다 됐어.
뭐야.
말은 지가 다 해놓고 지 맘대로 결론을 지어버리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격도 좀 더러운 것 같은데...
하...
빨리 헬캣인지 나발인지 이 녀석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너무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진심.
"...그럼... 다 끝난 건가요?"
-너. 나랑 좀 같이 다녀야겠다.
"아...네. 네???"
화들짝 놀라는 체스.
뭔 개소리야!!!!!!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같이 다니자니.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순간 이게 미쳤나 싶었다.
하지만 헬캣의 표정을 보니 너무나 진지한 표정이다.
조금 전 실실 웃던 그 표정은 어느 새 온데간데 없고 엄숙, 근엄, 진지의 그런 류의 모든 표정이 다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다.
"...농담...하는 거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나랑 다녀서 뭘 하겠다고."
-내가 어딜 다니면서 농담할 놈으로 보이냐?
"아... 그건 아닌 것 같긴 한데..."
-말 그대로다. 일단 난 무조건 너와 함께 다닐 것이다.
"아니. 그래서 왜 그런 무모한 아. 아니지. 왜 그런 불필요한 행동을 하려는 것이지...?"
-네가 예뻐서 그런 줄 아느냐? 너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네 녀석이 가진 그 기운 때문이다. 그것은 네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걸 빼려면 알아봐야할 것이 있으니 내가 같이 다니려는 것이다.
핑계는 아닌 것 같은데...
싫은데! 몹시도!!!
굳이 Yes와 No를 따지자면 체스의 대답은 무조건 No였다.
그래서.
'No!!!라고 하고 싶지만...'
마음 속에서는 벌써 100번도 넘게 No를 외쳤다.
하지만 이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면 그 순간 헬캣에 의해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날 것만 같았다.
사람에게는 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간 여러 일로 인해 단련된 체스의 감은 더욱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뭐...그러지... 즐거운 동행이 되었으면 좋겠네."
체스가 체념한 듯한 말투로 말을 했다.
-너 어째 표정이 좀 그렇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너무나 행복한 걸?"
헬캣의 말에 체스는 억지로라도 얼굴 근육을 실룩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울며 겨자먹기지만 체스는 어쩔 수 없이 헬캣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마음이 얼굴로 그대로 드러난 체스였다.
지금이라도 울 것만 같은 체스.
-마! 우냐?
"...안 울거든?"
-그럼 웃어라.
허참.
체스는 헬캣의 말에 따라 다시 한 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뜩이나 못난 녀석이 더 못생겨졌군.
미의 기준이 극히 엄격한 헬캣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체스였다.
-그나저나 너 몇 살이냐? 왜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말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놓고 있는 거냐?
"아니. 그러면 뭐! 어! 존댓말을 쓰나?...요?"
-뭐 너 편한 대로 해라. 굳이 나이 많다고 그런 대접 받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렇게 얘기할 거면 뭐하러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야.
도대체!
체스는 그저 지금 벌어진 일련의 상황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헬캣을 만나게 된 것부터 동행이 생겨난 것까지.
한 마디로 꼬여버린 여정이라는 말이다.
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오는 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