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40화 (40/249)

#40

출발(4)

퉤-

괜히 기분이 더러워진 체스는 마수들의 시체에 침을 탁 뱉었다.

부락은 아예 박살이 났다.

살아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으니 더 이상 마을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들도 꿈이 있었을 것이고 당장 오늘도 할 일이 있었을 터인데.

그렇다고 자신이 죽은 자들을 살릴 수도 없는 노릇.

마수들을 다 죽인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죽은 이들이 편히 잠들 수 있게 해주는 것 뿐이었다.

끄응-

"후... 일단은 정리부터 해야겠네."

체스는 우선 죽어있는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이미 여기저기 흩어져 널부러진 시체들이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생각보다 빨리 모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 삽을 찾아 무덤을 하나씩 만들어 주는 체스.

그렇게 삽을 쥐고 무덤을 만들다 보니 어느 새 시간도 꽤나 흘렀다.

묵묵히 땅을 파던 체스는 마지막 여자의 시체를 묻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제야 다 끝난 듯 허리를 펴는 체스.

"후..."

우두둑-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다.

간만에 삽질을 해서 그런가.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둬야지.

체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헤어짐의 인사를 건넸다.

"다음 생에는 더욱 행복했으면."

짧은 기도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죽음은 참 그렇다.

엄마를 보낼 때도 얼마나 울었던가.

갑자기 그때가 생각이 나자 눈시울이 괜히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에잇."

자자. 괜찮아.

추욱 가라앉은 자신을 다시 끌어올리며 괜찮다며 돌아서는 체스였다.

"아!"

문득 방금 전 가볍게 지나쳤던 상황이 떠올랐다.

삽질을 하느라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제 생각이 나네.

조금 전 피기를 처리할 때였다.

분명히 눈동자가 시뻘건 색이었었지 아마.

원래 저런 눈이었나 싶을 정도로 시뻘개진 눈이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아.

그게 원인일까?

"흠. 확실히 눈이 이상하긴 했지."

자신이 지금껏 상대했던 우르브독 같은 마수들에 의해 지금의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본디 공격성과 흉폭함을 가진 그런 마수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피기는 전혀 그렇지 않은 마수들인데...

등급도 등급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온순하기 그지 없는 마수들이다.

흠.

체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뭐 지딴에는 원인이라도 한 번 밝혀보려는 듯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 알겠나?

역시나 답이 나올 리가 없지.

"에잇. 모르겠다. 라이손 성에 가서 알리면 뭔가 알게 되겠지."

그래도 그 와중에 다행인 것도 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피기라는 녀석들은 무리를 짓는 마수들이 아닌가.

일단 본대는 안 보인다는 것.

지금이야 수가 적어서 금방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 피기들이 벌써 수백, 수천의 무리를 이뤘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적 재난이다.

그때 쯤이라면 단순히 이렇게 작은 부락 정도로 끝이 날 리가 없으니.

분명히 어딘가에 있기는 하겠지만 우선 당장은 안 보이니.

...만약 지금 자신의 앞에 본대가 있었다라면...

으... 끔찍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체스의 마음이 괜히 착잡해져 간다.

이런 마수들에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들 때문이었다.

다른 피해자들은 더 없어야 할 텐데...

우선은 가서 얼른 알리는 게 중요한 일이다.

"얼른 라이손 성에 가서 조합에 알려야겠네."

타타탁-

괜히 마음이 급해진 체스는 원래 목적지인 라이손 성을 향해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

저 멀리 라이손 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벌써 거의 다 왔네. 어째 너무 빨리 온 느낌인데...?"

대충 자신이 온 시간을 생각해 보니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3일.

비록 피기를 상대하느라 시간이 좀더 걸리긴 했지만 하루 이상이 줄어 들었다.

"뭐 어찌 됐든 체력이 붙어서 좋네."

역시 긍정적이다.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체스의 장점이었으니.

하긴 그렇기에 그 많은 빚도 다 깔 수 있었겠지.

"그 동네 사람들은 다 잘 있겠지?"

마지막으로 라이손 성에 들른 게 4년 전이다.

10대에 들렀던 곳을 20대가 넘어서야 가게 되었다.

한때 다이아 등급의 마수 사냥꾼이 되는 것이 목표인 적도 있었다.

비록 힘든 직업이기는 하지만 빚을 갚아 나가면서 이 일에 나름 흥미를 느끼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마수를 쓰러뜨릴 때의 쾌감 같은 것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당시 체스는 라이손 성에서 몇 달이나 거주하며 어떻게든 등급을 올리려 했었다.

의뢰는 의뢰 대로 하면서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을 쪼개서.

그때는 코피까지 터져가면서 했었지 아마.

흐...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

그래도 당시에는 노력을 많이 했었는데...

지난 날을 생각하니 괜시리 떨어진 그때의 아픔이 밀려왔다.

괜히 그 시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안부도 궁금했고.

즐거웠던 일들도 생각이 나고.

게다가 몇 달간 라이손 성에 살았던 탓에 나름 친해진 사람들도 있었으니.

하나하나 다 잘 살고 있을까 생각이 드는 체스였다.

곰곰이 옛 추억을 곱씹으며 걸어가는 체스.

슈왁-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

갑자기 수풀 속에서 툭 튀어나온 무언가.

어이쿠-!

아...

잠시 그저 옜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걸음을 디디던 체스가 화들짝 놀랐다.

"히익~ 엄마야!"

아차...

험험-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까지 들며 뒤로 한 두어 발자국 물러났던 체스였다.

그는 괜히 겸언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갑작스레 튀어나온 무언가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수풀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놀래킨 것은 자신의 팔뚝 정도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동물이다.

새하얀 털에 비취색 눈을 가진 들고양이 정도 같은 것이려나.

꼬리에 불이 붙어 있고 귀가 얼굴만한 게 좀 특이하긴 했다.

그런 것만 빼면 뭐 저건 고양이로 착각해도 무방할 정도의 생김새를 가진 고양이 같았다.

멍 하니 침까지 흘려대며 빤히 그걸 쳐다보는 체스.

그는 그저 신묘하게 생긴 동물의 귀여움에 푹 빠져있을 뿐이었다.

보고 있자니 심장이 계속 쿵쿵거리는 게 곧이라도 심장마비가 올 것만 같았다.

저건 저 귀여움 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데...

그저 넋을 잃은 체스였다.

그때 갑자기 체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

'응?'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

체스의 감각에 빨간 경고등이 들어왔다.

불?

...불...?

마... 마수다!

꼬리에 불이 붙어 있는 고양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챙-

체스는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매로 저 고양이 같은 것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행동을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쳐다보는 그것.

'아... 귀여워.'

순간 또 느슨해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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