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의 채무 탈출기-17화 (17/249)

#17

엘윈마을(8)

피식-

"참내. 곧 죽어도 그 놈에 주둥이는 물 위에 둥둥 뜨겠네."

겔리온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며 어처구니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대자로 뻗어 있는 주제에.

누가 봐도 승자는 자신이거늘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어디 저 질긴 가죽이 창호지가 될 정도로 좀더 두들겨 팰까?

천천히 체스에게 걸음을 옮기는 겔리온.

씨이익-

한쪽 입꼬리를 만 채 대자로 뻗은 체스는 힘없이 팔을 들어 손가락을 들었다.

"뭐하냐?"

겔리온이 보기에는 의미없는 움직임이었다.

그저 더 맞기 싫어서 수를 쓰는 듯한 그런 움직임 말이다.

그러나 체스는 계속해서 손을 들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든 겔리온이 걸음을 멈췄다.

체스의 들어올려진 팔의 펴진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조금씩 움직이던 체스의 손가락은 어느 곳에 이르러 멈춰 있었다.

겔리온의 시선이 움직인다.

체스에게서 체스의 팔 그리고 체스의 손가락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곳으로 자신의 시선을 옮긴 겔리온.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겔리온의 어깨 부근이었다.

갑자기 겔리온의 눈동자가 동그란 접시 마냥 급격히 커졌다.

"봐...봤냐? 헤헤."

꿈틀-

겔리온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곳에는 손바닥 모양의 흙먼지가 하나 묻어 있었다.

누가 봐도 큼지막한 게 체스의 손자국이었다.

"...건...드렸다. 임마...아이고... 죽겠다..."

체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엄청나게 지친 모습이었다.

"뭐야? 뭐야?"

"정말 해버린 거야?"

"저거 저거 물건이네???"

침묵에 둘러싸여 있던 관중들에게서 여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체스 녀석 결국 해내 버렸다.

체스의 승리 조건 자체는 워낙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그것을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승리조건을 달성해 버린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체스를 응원하던 마을 사람들은 그대로 발을 구르며 함성을 마구 질러댔다.

반면 겔리온이 이긴다는 쪽에 걸었던 사람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쳇. 돈만 날렸네. 실버 등급 사냥꾼도 별 거 없네 뭐. 아무리 조건이 저렇다고 해도 그걸 진단 말이야?"

내기에서 진 사람들에게서 투덜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을 들은 겔리온의 인상이 잔뜩 찌그러졌다.

솔직히 체스가 겔리온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건드리기만 해도 진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고 해도 말이다.

심지어 그 조건조차도 겔리온 자신이 건 것 아닌가?

하지만 승부가 채 나기도 전에 자만에 들뜬 겔리온이었다.

괜히 잘난 척을 해서 승리조건을 바꾼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겔리온도 물론 경험이 많은 마수 사냥꾼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방심을 한 것이 이런 실수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비록 아이언 등급이지만 뒹굴 만큼 뒹군 체스였다.

전투 경험만큼은 5년 동안 쌓이고 또 쌓인 게 바로 본인이다.

겔리온이 몇 십 년의 경력을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실버 등급의 마수 사냥꾼이라고 해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걸 그리 무시해버렸으니.

단지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승리라는 조건이 된다면야.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 게 유효타로 먹혔다.

"...이... 이 놈이 언제...?"

"...아팠다고...헤헤..."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퉁퉁 부은 입술로 중얼중얼거리고 있는 체스.

겔리온이 짓던 비웃던 표정을 이제 체스가 따라하고 있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겔리온의 얼굴.

자신의 몸을 어떻게 건드린 지는 모르겠지만 승부에서 져버렸다.

그는 이미 폭발할 지경이었다.

어째 시작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니.

그는 이딴 승부에서 진 탓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이런 씨이이이이이이이바아아아아아아아아알!!!!!!"

씩- 씩-

"하하하하하. 그만~"

디오스가 손을 들었다.

다시 체스를 짓이기기 위해 걸어가던 겔리온의 행동이 멈췄다.

무슨 개소리냐며 왜 그러냐는 듯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졌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 하하."

"이런 씨... 디오스!!!"

"쪽팔리게 이럴 거냐? 야~ 란도. 마일드. 겔리온을 데리고 들어가~ 난 얘기 좀 더 하고 갈게."

이들 4명 중 제일 강자이자 실질적인 리더는 디오스였다.

공식적으로는 실버 등급으로 알려진 이들이었으나 단지 승급 시험을 보지 않았을 뿐 뒷소문에 의하면 골드 등급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디오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발만 더 떼면 아무리 너라도 봐주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이런 개...씨..."

뭐라 반박을 하려던 겔리온이었지만 반항할 용기는 안 나는 듯 뒤돌아섰다.

"야야~ 들어가자. 됐어. 뭐 얕봐서 그런 걸 어쩌겠어?"

"그래그래. 기분 풀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 꺾자~"

나머지 일행은 겔리온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와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디오스는 체스에게 다가갔다.

체스는 여전히 툴툴 웃으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키키킥. 얕보면 그렇게 된다고~"

"여어~ 나름 인상 깊었어~ 몸을 일으킬만 하면 우리 숙소로 와라. 술집 뒷편에 순록 여관이다. 하하."

디오스는 체스의 쥐어터져 퉁퉁 부은 얼굴이 귀엽다는 듯 그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야. 그런데 있잖아. 너 그렇게 퉁퉁 부은 지금 얼굴이 훨씬 낫다야~"

체스의 마음을 후벼판 디오스는 킥킥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저게... 미쳤나. 아파죽겠는데 헛소리를 찍찍 하고 가네. 그거 아니어도 충분히 잘난 얼굴이구만..."

끄응-

"아야야..."

체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삐그덕대는 듯 이곳저곳에서 곡소리가 났다.

그제야 달려오는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

그들은 체스에게 달려가 얼른 부축했다.

"...나 다 들었어요... 날 응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데...?"

땀을 삐질 흘리는 몇몇의 마을 사람들.

드...들켰나...?

"그러게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야. 이게 다 너 때문이지!"

체스는 아픈 와중에도 그들을 다시 흘겨보았다.

이 사람들이 응원을 어? 그래도 어?

당연히 자신을 믿어야지.

따가운 체스의 시선에 몸둘 바를 모르는 사람들.

"아~아니야~ 체스~ 그럴 리가 있냐?"

"에이~ 당연히 마을 사람을 응원해야지~ 잘못 들은 거야."

그들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체스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무게가 어찌나 나가는지 몇 명이서 달라붙어 겨우 들어올릴 정도의 체스였다.

신나게 응원하던 자들은 땀까지 삐질삐질 흘려가며 그를 들어올렸다.

끄응- 아야야-

누가 그의 아픈 부위를 건드렸는지 신음소리를 내던 체스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살살 좀요! 끄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