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엘윈마을(6)
지금까지의 꿈은 말이다.
체스는 아직 다이아 급을 본 적이 없다.
솔직히 이 조그만 마을에서 실버 급을 보는 것조차도 탄성을 지를 일이건만 하물며 다이아급은...
솔직히 사인이라도 받아둬야 할 판이다.
그래도 목표는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이왕 발을 들여놓은 것.
골드까지는 그래도 가봐야...
이왕 뽑은 칼,
무는 못 썰더라도 하다못해 감자라도 썰어야하지 않겠나?
뭐 아직까지는 아이언 등급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도 5년 내내...
훠이훠이~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다이아는 둘째치고 지금 당장 눈앞의 이 녀석.
실버 등급의 녀석를 이길 지조차 미지수인 지금이다.
****
이미 술집 앞 공터에는 소문이 쫙 퍼졌는지 많은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어제 체스가 한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이런 조그만 마을에서 소문이 안 퍼지는게 더욱 이상한 일이다.
간만의 이벤트라 그런지 술집 앞은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흥미진진한 대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체스~ 살아남아라~"
"미안하지만 난 체스 네가 지는 데 걸었다~"
누구야!
체스가 찌릿 눈을 째리며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노려 보았으나 그것도 순간.
그의 행동은 주위 관객들의 더 큰 함성에 이내 묻혀버렸다.
뭐 이들에게 뭐라할 건 아니지.
지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일테니.
체스는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계속 반복했다.
지금 이 순간 체스의 심장은 몹시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마수 사냥꾼과의 결투는 처음이다.
그것도 한참 윗 등급인 실버 등급과의 결투다.
고작 아이언 등급이 실버에게 덤빈다?
미친 게 틀림없다.
아마 다른 마수 사냥꾼들이 들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헛소리로 치부할 정도의 그런 행동이었다.
이래서 술은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그 놈에 빚 때문에!!!
내가 속이 상해서!!!
귀마저 좋아서!!!
그래도 이왕 하는 것 최선을 다 해봐야 하지 않겠나?
체스는 지금까지 스승다운 스승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실전과 실전에서 경험을 쌓고 살아 남았다.
빚을 갚기 시작한 이후 실전 이외의 시간은 늘 혼자서 단련과 의뢰 그리고 또 단련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은 순전히 자신의 나름의 노력으로 이만큼이나마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남들에 비해 선천적인 이점은 있었다.
몸집은 원래부터 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쑥쑥 컸으니.
빌어먹을 아빠가 그다지 큰 몸집도 아니었으니 유전은 아니다만 어째 이만큼이나 커버렸다.
그렇기에 아이언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용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
쓰읍-
체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이렇게도 신경이 곤두서는지 원.
"자자~ 조용~ 조용~"
디오스가 좌중을 조용히 시키며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자~ 내가 심판을 볼게. 네 녀석이 이기면 되는 거야. 알았지?"
디오스가 이 결투의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 까짓 거 뭐. 해보면 알겠지.'
"당연. 질 리가 없지."
짐짓 허세를 부리며 내뱉는 체스의 말에 디오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녀석 보고 있자니 뭔가 즐겁다.
다음의 상황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술에 취한 상태의 이 녀석을 알게 된 것은 놀이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줄 것만 같았다.
어차피 용도는 정해져 있지만.
디오스가 싱글벙글하는 사이.
꿀꺽-
괜히 목이 타오르는 듯 체스가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슈발. 진짜 잘못 덤빈 것 같은데.'
자신의 앞에 서있는 겔리온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우르브독 같은 마수들과 싸울 때와는 아예 다른 느낌이었다.
"흐흐흐. 그럼 슬슬 시작하면 되겠지?"
양쪽의 의사를 물어본 디오스는 슬슬 시작할 때라며 손을 위로 올렸다.
이제 손을 아래로 내리고 빠지면 시작이다.
디오스가 손을 아래로 힘껏 내리려는 찰나.
"잠깐."
겔리온이 시작 신호를 알리려는 디오스를 불러 세웠다.
"대결 조건을 조금 바꿔주지. 실버가 아이언과 이렇게 대결하는 것도 부끄럽잖냐? 그냥 내 몸에 한 번의 손자국이라도 남기면 내가 진 걸로 하지."
"크크크크. 너 너무 여유 아냐? 그러다가 지면 어쩔려고 그래?"
"내가? 저런 아이언 등급에게? 그럴 리가 없지. 훗."
"뭐 네 말이 맞기는 하다만 결과라는 게 지켜봐야 알잖냐? 어째 너무 자신만만인 것 같기는 하다만은. 크크크."
"그냥 그렇게 하지."
"흐음. 어차피 나야 이왕 하는 것 재미있게만 해주면 만족이긴 하다만은~ 흐흐흐흐흐."
겔리온의 제안은 체스에게 좀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확실히 실버 등급이 아이언 등급을 잡고 드잡이질했다는 건 썩 보기는 안 좋으니 그 정도의 조건이라면야 별 말이 안 나올 터.
그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잡혔다.
잠시 고민을 하는 디오스.
"좋아. 일단 난 오케이."
여러 모양새로 봤을 때 체스에게도 겔리온이 제안한 승부의 조건이 훨씬 나은 걸로 보였다.
"어이~ 넌 어때? 겔리온이 내건 조건이 어때?"
겔리온은 체스를 심하게 얕잡아 보고 있었다.
체스의 등급을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으니 뭐.
아이언 따위가 실버에게 비빈다는 것 자체가 도대체가 가능성이 있는 말인가?
아예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겠지.
"좋아. 나도 그렇게 하지."
체스에게 있어서는 두말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렇게 대결의 조건은 바뀌었다.
둘은 서로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길리언은 한쪽 날이 톱니처럼 생긴 장검, 체스는 무식하게만 보이는 대검이었다.
"어제처럼 취하고 있던 게 더 낫다고 생각할 거다. 아마. 크흐흐."
"그런 건 모르겠고 언제까지 입만 털 거야?"
붕- 부웅-
체스가 손을 푸는 듯 검을 풍차마냥 휘둘렀다.
준비는 이미 다 된 듯했다.
훗-
건방진 놈.
그 모습이 우스워보이는지 겔리온이 그딴 잔재주는 보이지 말고 들어오라며 손을 까딱까딱거렸다.
들어오라는 신호 겸 도발이다.
그렇다면 어울려주지.
"원한다면!"
하아아압-
체스는 기합소리와 함께 겔리온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둘의 거리는 좁혀져 갔다.
****
시작이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마을 사람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이들에게는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어차피 구경 중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했지 않나.
단지 이왕 벌어진 싸움이면 자신이 돈을 건 사람이 이기는 게 제일 좋을 뿐.
그 사이 사람들의 환성을 등에 업은 체스가 재빨리 겔리온과의 거리를 좁혔다.
슈와악 크게 휘둘러지는 대검.
그의 검이 바람을 반으로 촤아악 갈랐다.
역시 덩치값을 하는 듯 휘둘러지는 바람을 가르는 검의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다.
슈와아아악-
차아앙-!
둘의 검이 부딪힌 지점에서 쇠붙이의 날카로운 충돌 소리가 울린다.
겔리온은 검을 사선으로 하여 체스의 검을 가뿐히 막아낸 상태였다.
힘 만큼은 알아주는 체스임에도 겔리온은 끽해야 반 발자국 정도만 뒤로 밀린 상태였다.
일순 당황한 체스.
'이런 씨... 바로 막아버리네.'
체스는 자신의 검을 빼 다음 공격을 하려 했다.
으응?
하지만 꿈쩍도 않는 검.
체스의 검은 겔리온의 검의 톱니부분에 단단히 물려 있었다.
"헤에~ 고작 이 정도야?"
비아냥거리는 겔리언의 목소리.
하지만 체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툭 내뱉었다.
"야. 반 발자국 밀렸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