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엘윈마을(5)
해가 밝았다.
어제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어제 체스와 시비 아닌 시비가 붙었던 일행들은 이미 술집 앞에 나와 있었다.
"곧 9신데?"
한 명이 술집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았다.
약속시간은 분명히 9시.
시계의 분침은 12를 향해 영차영차 힘을 내는 중이었다.
"거봐. 디오스.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러냐? 할 일도 많은데. 넌 가끔 그 지나친 장난끼가 문제라니깐."
"뭐 우리야 나쁘지 않지. 내기에서 이기면 돈이 생기고 또 우리 일은 우리 일대로 하고~"
나머지 일행들이 시시덕거리며 체스에게 그러한 제안을 했던 디오스에게 한 마디씩 툭툭 던졌다.
"훗. 안 올 것 같지? 걱정마. 그 녀석 반드시 올 거야~"
디오스는 반드시 체스가 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흥미였다.
그는 제법 두꺼운 나무 테이블을 무슨 썩은 나무 부셔버리듯 반으로 갈라버리는 체스에게서 흥미를 느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디오스는 체스의 눈에서 반드시 이 기회를 잡고야 말겠다는 절실함, 절박함을 보았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과거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 녀석.
다른 누구보다 기회가 있다면 잡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디오스의 표정에는 확신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디오스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지 못했다.
무슨 자신감이래?
이제 9시도 1분 여밖에 남지 않았는데.
초침이 점점 올라간다.
15... 14... 13... 12... 11...
"저기 봐~ 오고 있잖냐~ 내 말이 맞지? 10 G씩 내놔."
"와이씨..."
그들은 체스가 올 지 안 올 지 내기를 한 듯했다.
내기의 승자는 저 쪽에서 체스가 걸어오고 있으니 당연히 디오스.
"쳇. 에라이~"
나머지 일행들은 투덜거리며 지갑에서 10 G씩 꺼내 디오스에게 넘겼다.
댕~ 댕~ 댕~ 댕~ 댕~ 댕~ 댕~ 댕~ 댕~
정확히 9번의 종소리.
9시가 되었다.
체스는 정확하게 9시에 맞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지금껏 자다 일어난 듯 그의 얼굴은 눈이며 얼굴이며 온통 퉁퉁 부어 있었다.
"도망간 줄 알았더니 그래도 꽤나 강단은 있는 녀석이구만."
겔리온이 검집을 툭툭 건드리며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실은 체스는 어제 술을 마신 이후의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자신이 테이블을 부셨다는 것과 숫자 9.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해봐도 9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머리만 그저 아플 뿐.
아마 헨리가 와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면 아직까지 따뜻한 침대 속이었겠지.
"그래도 도망은 또 칠 줄 몰라서."
체스는 그들과 마주 선 채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투로 뻔뻔하게 말을 내뱉었다.
"뭐~ 좋은 자세야~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와 할 만하지~ 하하하."
체스의 대답이 심히 마음에 드는 듯 디오스가 웃어제꼈다.
"그래서 너희는 누구지?"
이제야 통성명을 서로 하는 그들.
어제는 만취상태였으니 뭐...
"뭐 같이 하게 될 지도 모르니 소개 정도는 가볍게 해둬야겠지? 우린 실버 등급 마수 사냥꾼이다. 이름은 함께 하게 되면 알려주지."
자기소개를 하며 목에 걸린 협회 등록증을 꺼내 보이는 한 명.
그 등록증에는 그걸 들고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의 얼굴이 떡하니 그려져 있었다.
'헉... 실버... 니기미... 똥 밟았네. 술이 문제네...'
체스의 얼굴이 일순 낯빛을 잃어갔다.
실버라...
체스가 감히 함께 할 수조차 없는 등급의 마수 사냥꾼들이다.
나쁜 예감은 왜 이리도 잘 들어맞는지...
하지만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적어도 당당하기라도 할 테다.
"난 아이언 등급 체스다."
당당하게 터져나온 체스의 말.
"??? 아이언? 아이언? 너 지금 아이언이라고 했냐?"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큰 웃음이 터져나왔다.
뚝-
갑자기 웃음을 멈춘 겔리온이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일행들을 쳐다 보았다.
특히 디오스를 향해서 말이다.
시간 낭비 중에서도 이런 시간 낭비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참나... 꼭 해야해?"
디오스는 말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해야 한다는 신호다.
길리언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패였지만 뭐 어쩌겠는가?
슬슬 준비를 해야지.
****
한편 그들의 등급을 알고 나서 그제야 체스의 눈에 마주 선 일행들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등급을 들은 탓일까.
괜스레 자신이 뭔가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등급을 알고 나서 보니 더더욱 말이다.
4명 모두 체스보다 몸집은 작았지만 뭐랄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마수 사냥꾼의 느낌이다.
심지어 약간 더러운 계통의 일까지도 전담하는 뭐 그런 느낌 있잖은가.
'아이씨...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체스의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하나 또르륵 맺혀 떨어진다.
하지만 온 이상 약한 척은 할 수 없지.
그래도 나름 경력 5년의 마수 사냥꾼인데.
체스는 그들에게 긴장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땀을 툭툭 닦아내더니 침착한 표정으로 오히려 당당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난 누구랑 붙으면 되냐?!!!"
체스의 말 한 마디에 주위를 둘러싼 채 그들을 보고 있던 구경꾼들로부터 함성이 확 터져 나왔다.
당당한 말투!
그래! 저게 체스지!
엘윈 마을의 자랑!
마수 사냥꾼 체스!
마을 사람들이 저렇게 환호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 최고의 직업은 단연 마수 사냥꾼이다.
뭐 혹자들은 관리나 귀족이 최고라고도 하지만 다 개소리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실력만 있다면 단기간에 큰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바로 마수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유래없이 마수 사냥꾼이라는 직업이 활성화된 상황.
그 원인은 이상하리만큼 늘어난 마수들 때문이었다.
마수를 잡아 돌아오는 보상에 눈이 먼 많은 사람들이 마수 사냥꾼이라는 직업에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그 덕에 마수 사냥꾼들은 현재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수 사냥꾼들은 아이언부터 다이아까지 6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온 대륙에 몇 되지도 않는 다이아급 마수 사냥꾼들은 산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대륙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대륙의 제일 미녀라는 로레인 공주 조차 그들에 비하면 유명세로 따지면 한 수 아래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사람들을 흥분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연일 화제거리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긴 다이아급 한 명이 지방의 작은 성 하나 정도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다이아 급이라...
한때 체스의 꿈이기도 했던 다이아 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