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3 / 0284 ----------------------------------------------
제8권 혼돈의 히민반가르
“말도 안 돼!”
입술을 깨문 부타비크는 뱀파이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이매직을 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츠으읏!
부타비크의 두 눈동자가 순간 회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평범한 뱀파이어 일족이 아니었다. 황족인 벤트루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위력적이었다.
“크크크, 걸렸구나.”
그는 아이매직 수법이 통하자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쉬이잇!
그런 뒤 순식간에 준의 곁으로 다가오면서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그를 난도질하려는데 느닷없이 배에 엄청난 고통이 전해져 왔다.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기에 폐부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그렇게 비명을 크게 내지르면서 8~9미터 정도를 날아가 떨어졌다.
부타비크는 뒤로 날아가면서 순간적으로 준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준이 한쪽 손바닥을 활짝 편 채 내뻗고 있었다. 준의 손이 위치한 곳은 정확하게 자신의 배가 있던 곳과 일치했다.
그는 그제야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울컥!
부타비크가 바닥에 엎어진 상태에서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입에서 피를 한 움큼 내뿜었다.
“끄으으, 네 녀석은 처음부터 아이매직에 당한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그런 허접한 수법에 당할 것 같았나? 아직 몸도 제대로 풀지 못했으니 어서 일어나!”
도발로 똘똘 뭉친 그 말에 부타비크는 준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있는 힘을 짜내 힘겹게 일어났지만 충격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비틀거렸다.
‘결국… 피의 안구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인가?’
피의 안구는 부타비크처럼 뱀파이어 일족의 황족인 벤트루족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것을 펼치게 되면 상대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혹되어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일단 그 세계에 빠지기만 하면 자신의 의지로 죽이거나 완전히 조종할 수 있게 되는 아주 무서운 능력이었다.
참고로 뱀파이어 일족의 황제는 벤트루족에서만 임명되었다. 이것은 뱀파이어 일족의 불문율이기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벤트루족은 다른 일족의 종족보다 월등하게 강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라면 그 누구도 황제의 권능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뱀파이어 황제만 쓸 수 있다는 사안은 상대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살인 기술이다.
부타비크는 비록 황족이지만 황제는 아니었기에 사안을 펼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수법은 피의 안구였다.
그러나 자신감에 차 있는 준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후후후, 피의 안구 수법이 있을 텐데, 쓰지 않을 건가?”
“으음,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하지만 말이야, 넌 그것을 쓰더라도 날 어쩌지 못한다.”
“…….”
‘이럴 수가! 이 녀석, 이미 그 능력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인가!’
준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날 죽일 건가?”
“아니, 넌 마지막 남은 뱀파이어야. 그것도 황족이란 말이지.”
“그럼 날 살려줄 텐가? 요구 조건이 있을 텐데?”
“간단해. 내가 죽을 때까지 수하로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부타비크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은 뱀파이어라 조건만 맞는다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주인이 될 상대방은 인간족이라 수명이 길어봐야 백 년이 고작이었다.
‘으음, 길어봐야 백 년이고,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짧은 기간만 수하로 있으면 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자유야.’
“뱀파이어 황족으로써 약간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네 요구대로 하겠다.”
“후후후,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나에게 피의 맹세 의식을 해라.”
“으음, 피의 맹세 의식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난 약속은 지킨다.”
“부타비크, 너를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일처리를 확실하게 하자는 거다.”
“…….”
준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자존심이 강한 뱀파이어 황족으로서 거부할 수 없었다.
마나를 추종하는 마법사들은 자신의 영혼을 걸고 하는 맹세 의식을 하면 절대로 배신할 수 없었다. 만약 배신을 하게 되면 영혼이 소멸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뱀파이어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피의 맹세 의식만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하기 힘든 의식이었다.
그것을 준이 요구한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부타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너에 한해서다.”
“좋아, 그렇게 하지.”
부타비크는 피의맹세 의식에 사용되는 주술과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참 이어졌다.
기이한 빛을 머금은 연기가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더니 공중의 한곳에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육망성을 형성하더니 빛에 휩싸였다.
스윽.
손톱으로 피부를 갈라 흘러나온 피가 한 모금 정도가 되자 갈라졌던 피부가 원상태로 아물었다. 그러자 공중에 둥둥 떠 있는 피가 스르르 이동하더니 육망성에 스며들었다.
우우웅!
공명음이 육망성에서 흘러 나왔다.
“이제 여기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육망성 위에 한 방울의 피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부타비크가 피의 맹세 의식의 다음 단계를 외쳤다.
“나 뱀파이어 일족의 벤트루족 부타비크는 프리맨이 죽을 때까지 수하가 될 것을 신성한 피에 맹세합니다. 만약 이를 어겨 배신을 한다면 소멸되어도 좋습니다.”
츠츠츠츠!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육망성에서 순간 기이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부타비크의 심장과 준의 심장에 각각 빛이 스며들자 육망성이 사라져버렸다. 임무를 다했기에 스르르 흩어져 소멸된 것이다.
이로써 피의 맹세 의식은 모두 끝이 났다.
준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신의 선물을 복용했기에 수명이 만 년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타비크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알았다면 절대로 피의 맹세 의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타비크, 내가 부를 때까지 쉬고 있어라.”
“예, 주인님.”
스스스스!
갑자기 공간이 벌어지면서 황금관이 튀어나와 바닥에 세워졌다.
뱀파이어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잘 때 관에 들어가는데, 부타비크는 뱀파이어 황족이기에 황금관을 가지고 있었다.
덜컹!
부타비크의 손짓에 관 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뚜껑이 저절로 닫혔다.
부우웅!
황금관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벌어진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공간도 스르르 다시 닫히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는 준이 언제든 부르면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이로써 준은 강하고 능력 있는 수하를 거두게 되었다.
“후후후, 현자 크라이오튼의 비밀의 장소에는 보물이 가득해서 좋아.”
준이 말하는 보물이란 꼭 황금이나 보석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도시대의 위력적인 무구나 조금 전과 같이 뱀파이어 부타비크라는 수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언데드 스켈레톤과 데스나이트까지 이미 수하로 얻은 그였다.
“자, 이제 지하 9층을 향해 가보자. 이번에는 또 어떤 것이 나를 기쁘게 해줄까?”
그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뒤 통로를 천천히 걸어가더니 곧 사라졌다.
스스슷!
준이 있었던 통로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블러드 게이트가 나타났다.
-보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어떻게 연약한 인간족이 지하 8층까지 통과할 수 있었지? 더구나 전투력이 뛰어난 뱀파이어를 물리치고 그를 수하로 얻어버리기까지 했어.
이제 남은 관문은 9층과 10층뿐이었다. 하지만 9층에는 엄청난 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블러드 게이트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사라져버렸다.
저벅저벅.
준은 비밀의 장소의 지하 9층으로 내려왔다. 통로는 겨우 30미터에 불과했다.
그렇게 짧은 통로를 벗어나자 거대한 지하 공동이 나왔다.
그가 발을 내딛자 천장에 설치된 수십 개의 마법등에 불이 들어와 칠흑 같던 동공을 환히 밝혔다.
이제까지 보아온 지하 공동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천장의 높이가 100여 미터가 넘었으며, 넓이도 50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지하 공동인데 이렇게까지 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우우우웅!
그때였다.
갑자기 지하 공동에 공명음이 터져 나왔다.
“뭔가 나올 것 같군.”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에 그는 즉시 스켈레톤을 전부 소환했다.
200마리의 스켈레톤은 전부 투핸드 소드를 들고 있었으며, 밀집 전투 대형으로 전개했다. 이들의 앞에는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롱소드를, 왼팔에는 원형 방패를 착용한 용아병이 서 있었다.
츠츠츠츠!
갑자기 공간이 쩌억 벌어지더니 스파크를 사방으로 토해냈다.
처척!
그리고 그 속에서 3미터나 되는 거인이 튀어나왔다.
“으음, 저건 오우거와 비슷하게 생겼네?”
준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장이 3미터에 온몸이 근육질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우거는 피부는 온통 초록색인데 이 거인은 인간의 피부색과 똑같았다. 얼굴은 고릴라와 비슷했고, 머리에는 황금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마 부분과 양쪽으로 휘어진 뿔이 돋아나 있었다.
손에 무기를 들고 있어야 정상인데 이 오우거는 무기가 전혀 없었다.
번쩍!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온통 붉게 물든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섬뜩하게 느껴졌다.
살기가 일렁이는 눈빛은 마치 먹이를 사냥하려는 맹수의 것과 같았다.
촤라라락!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녀석의 몸에 황금색 마법갑옷이 착용되었다. 갑옷에는 물리력에 대응하기 위한 대방어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어느새 손에도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쇠사슬과 둥근 금속구로 이어진 황금색 철퇴였다.
신장이 3미터나 되기에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도 엄청날 것으로 보였다. 때문에 한 방 맞으면 작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츠츠츠츠!
황금투구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이마에 돋아나 있는 뿔에서 스멀스멀 기이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지하 공동에 부챗살처럼 빠르게 퍼지던 연기는 순간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으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저것이 수하들을 소환했구나.”
준의 말 그대로였다.
실드 마법이 가슴에 새겨진 신장 3미터의 오우거가 500마리나 소환되어 전투대형을 이루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전부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며,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손에는 도끼와 창을 결합시킨 무기인 할버드(Halbard)를 쥐고 있었다. 찌르기와 베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이들 오우거만으로도 넓은 지하 공동이 꽉 찰 정도였다.
“스켈레톤들아, 저 오우거를 박살내버려라. 가랏!”
준의 명령을 받은 스켈레톤들은 대장인 용아병의 공격 신호를 받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주보고 있는 황금투구를 쓴 오우거도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앞으로 내렸다. 그러자 오우거도 일제히 앞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