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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권 혼돈의 히민반가르
스윽.
준은 고개를 숙여 왼쪽 가슴을 확인해보았다. 그곳에는 새끼손가락 정도 크기의 불꽃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바나리르, 이제 권능의 증표가 새겨진 거야?”
“그렇다, 소유자여. 이제부터 소유자는 이곳에서 불의 기운을 다스리는 방법을 익힐 것이고, 그 힘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지?”
“불의 기운을 다스리는 방법을 익히고 그 힘의 일부를 흡수해야 하니 십 년 정도는 있어야 할 거야.”
“뭐? 십 년이라고?”
“소유자여,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이 공간의 십 년은 네 세상에서는 십 일에 불과하니 말이야.”
“아, 그런 거야? 다행이군.”
그때부터 준은 바나리르의 공간에 머물면서 불의 기운을 다스리는 방법을 익히고 그 힘의 일부를 흡수했다.
너무나 강력한 불의 기운이라 인간의 육체로 한꺼번에 많은 양을 흡수할 수 없었다. 몸이 안전하게 버틸 수 있는 양만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바나리르의 도움을 받으면서 준은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뚝딱, 땅땅!
망치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마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에서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돌덩이를 수십 명의 인간 노예들이 밀어 이동시키고 있었다.
채찍을 든 오크전사들이 인간 노예들을 감독하면서 공사를 강행하고 있었다.
돌이 가득 실린 짐수레를 뒤에서 밀던 인간 노예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눈썹을 꿈틀거리던 오크전사가 채찍을 세게 휘둘렀다.
짜아악!
“아아악!”
등을 찢어놓을 듯 후려치는 채찍이 주는 고통에 인간 노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크전사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계속 채찍을 내리쳤다. 그로 인해 살이 찢어져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인간 노예는 너무 지쳐서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통에 비명만 연신 질러댔다.
“취익, 요령 피우지 마라. 어서 일어나!”
그에게 몇 대만 더 때리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크전사는 잠시 채찍질을 멈추었다.
그제야 옆에 있던 인간 노예들이 부축해 그를 일으켰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짐수레를 밀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채찍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무너진 성벽과 집들로 가득한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라비아 왕국의 수도인 에르헤임이었다.
왕궁과 고위 귀족들의 저택도 성한 게 하나도 없었다.
오크전사에 의해 결국 멸망한 드라비아 왕국은 오크 왕국령이 되어버렸다.
리브빌 국왕를 비롯해 바르빌 공작, 중앙 귀족들은 이웃 왕국인 페드린 왕국에 망명해 몸을 의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오크의 노예가 되어 이렇게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말이다.
석 달 전에 오크전사들과 드라비아 왕국의 병사들 간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이곳 수도 에르헤임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져 도시로서의 기능이 힘들게 되었다.
그것을 오크왕 쿠퍼의 명령으로 재건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왕 쿠퍼는 우디 숲에서 이곳 에르헤임으로 왕궁을 옮기려고 추진 중이었다.
오크 왕국의 북부 국경인 우디 숲 너머에는 오크왕 쿠퍼의 아들 질리가 이끄는 오크부대 200개, 즉 200만 마리의 오크전사들과 아놀드 대공이 이끄는 모르칸 제국군 300만 명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버크 왕국의 국경을 넘어 진군하던 90만 명의 모르칸 제국군 제2군단장인 브랑 백작은 진군을 멈추고 우디 숲에서 튀어나온 오크부대를 공격했다.
아놀드 대공의 제국군과 싸우던 오크부대는 측면에서 공격해오는 제국군 제2군단 때문에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곧 전열을 정비해 잘 방어했다.
그 이후 오크와 제국군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충돌했고, 현재는 소모전으로 변한 상태였다.
오크왕 쿠퍼는 오크전사들이 뒤로 밀린다고 느낄 때마다 마법약물로 탄생시킨 괴물들을 전투에 투입했다. 그로 인한 제국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아놀드 대공도 그럴 때면 앞으로 나서서 신기에 가까운 검술로 괴물을 손쉽게 처리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오크와 제국군 중 어느 쪽이 우세하다 말할 수 없었다.
벌써 두 달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제국군은 우디 숲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제국의 황제는 진노했다.
이내 아놀드 대공에게 전면전도 불사하라는 황명이 내려왔다.
이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에 아놀드 대공은 제국군을 서둘러서 정비했다.
곧 대대적인 총공격이 있을 예정이었다.
마스터, 아니 이제는 본명을 되찾은 아드니스 리안 폰 가르든 국왕은 결국 켈로 왕국을 멸망시키고 리안 왕국을 건국했다.
켈로 왕국군과 치열하게 싸우느라 암흑기사들의 피해가 많아서 현재는 금지된 마법과 마법의 약물을 이용해 암흑기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이 사업에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던 대제자 비에드가 갑자기 실종되었다.
마일드 대상단을 운영 중인 그가 갑자기 실종될 이유는 없었다.
가르든 국왕은 즉시 암흑마법을 이용해 대제자 비에드의 위치를 추적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대제자 비에드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소멸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대륙의 가장 끝에 있다고 해도 마스터는 암흑마법의 추적술을 펼치면 위치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죽거나 소멸되면 반응하지 않는다.
마스터는 대제자 비에드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세 사람이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가운데에서 걸어가는 자는 마법의 스테프를 오른손에 쥐고 녹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그의 양쪽에 있는 자들은 경갑옷에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기에 이들의 발소리는 유난히 컸다.
그렇게 제법 긴 거리를 걸어간 그들은 곧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검은색 갑옷을 입은 암흑기사 10명이 문의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대전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문 앞으로 다가온 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하를 뵈러 왔다. 문을 열어라.”
“예, 알겠습니다.”
이미 이들이 올 것임을 전달받았기에 제지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어주었다.
그그그긍!
소음과 함께 거대한 대전의 문이 열렸다.
뚜벅뚜벅.
세 사람은 넓은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전의 천장에는 거대한 샹드리에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바닥은 번들거리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상단에 놓인 황금 의자에는 가르든 국왕이 앉아 있었다.
그 밑에는 무장한 친위대원들이 횡대로 서 있었는데, 모두 100명이었다.
가르든 국왕이 셋을 내려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어서들 오너라.”
“폐하, 저희들을 찾으셨습니까?”
“그렇다, 제자들아.”
“폐하,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아주 큰일이 일어났다. 너희 대사형인 비에드가 누군가에게 죽은 것 같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들은 대사형인 비에드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암흑마법을 수련했으며, 검술 실력도 뛰어나 소드 마스터라고 하더라도 이기기는 어려웠다. 그런 대사형 비에드가 누군가에게 죽었다고 하니 당연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내 암흑마법 추적술에도 반응이 없으니 죽은 것이 분명하구나. 너희들이 나서서 비에드의 시신이라도 찾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이번 일의 책임자를 스톡으로 임명한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레드 데빌과 칼리는 옆에서 도와라.”
“예, 폐하!”
“마일드 대상단의 연락으로는 바렌 왕국의 엘도라도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구나.”
“폐하, 엘도라도 영지라면 프리맨 후작령이 아니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칼리가 그동안 정보길드에 의뢰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예전에 저희 일을 방해한 자가 바로 프리맨 후작이었습니다.”
“뭐라? 그게 정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제야 비로소 알아낸 정보이옵니다.”
가르든 국왕은 놀라 눈이 커졌다.
그는 한 손으로 턱밑을 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제서 비에드가 갑자기 죽은 이유를 알겠구나.”
“폐하, 비에드 대사형을 죽일 만한 인물은 대륙에는 거의 없사옵니다. 정황상으로 보기에 대사형을 죽일 정도의 실력자로 의심 가는 인물이 바로 프리맨 후작이온데, 그자의 영지가 바로 엘도라도 후작령이옵니다.”
“으음, 놈을 반드시 처리하거라.”
“예, 폐하. 저희 사형제가 나선 이상 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좋아, 오늘 당장 떠나거라.”
“예, 폐하!”
스톡과 레드 데빌, 칼리는 가르든 국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던 가르든 국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흐흐흐, 나의 제자 세 명이 나선 이상 네놈이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푸드득!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산새 한마리가 무언가에 놀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갈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말을 타고 저편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연신 뒤를 쳐다보면서 말을 몰아 달렸다.
금발에 제법 예쁘게 생겼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또한 온통 땀과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갈색 로브에도 흙먼지가 묻어 더러웠다.
두두두두!
저쪽에서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면서 말을 탄 무리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이들은 모두 가죽 갑옷을 입고 무기를 휴대한 기병들로, 60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갑옷에는 새가 날개를 활짝 펴 날면서 입에 칼을 물고 있는 문장이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서는 로베르타 자작령에 소속되어 있는 영지 기병들이 분명했다.
로베르타 자작령은 로타스 왕국의 북부 지방에 속해 있는 영지다.
이들이 달려가고 있는 곳은 해발 1천 미터가 안 되는 레츠 산이었다.
추격 중인 기병들 중에서 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시간차로 화살을 쏘았다.
시시싯!
화살은 파공음을 내면서 도망치던 여자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녀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회피 동작으로 달렸기에 화살이 모두 빗나갔다.
이번에는 도망치던 여자가 재빨리 가지고 있던 활에 화살을 두 발이나 걸고 쏘았다.
시시시싯!
제대로 겨누지도 않고 쏜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화살은 파공음을 내면서 날아가 뒤에서 추격 중이던 두 명의 기병을 맞혔다.
“크아아악!”
“케에엑!”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그들의 목 한가운데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기병들의 대장이 흠칫 놀라면서 크게 외쳤다.
“이, 이런. 모두 손방패를 착용하라!”
처처척!
기병들은 평소 훈련이 잘되어 있었기에 대장의 명령에 재빨리 원형 손방패를 꺼내 한쪽 팔에 착용했다.
지름이 2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원형 손방패였지만 날아오는 화살을 막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도망치던 여자가 두 발의 화살을 다시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