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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프리맨
두두두두.
지평선 끝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면서 기병들이 모습을 보였다.
선두에는 회색 로브를 입은 준이 보이고, 그의 옆과 뒤에는 가죽갑옷을 입은 영지기병들이 뒤따랐다.
이들은 왕성으로 가기 위해서 베일레 자작령을 벗어나 6일째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3일 정도만 더 가면 왕성이 있는 수도 까브(Cave)에 도착할 것이다.
지금 달리고 있는 주위에는 잡초와 말라죽은 나무들만이 듬성듬성 있을 뿐 농사를 짓기도 어려운 지역이었다.
“호든,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니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프리맨 님!”
호든이 한 팔을 치켜들자 그의 수신호를 본 기병들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말을 천천히 멈추었다.
화르륵.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자 흰 연기가 조금 피어올랐다.
기병들은 불 위에 냄비를 올려 스프를 끓이기 시작했으며, 말을 한쪽에 말뚝을 박아 고삐를 묶어두었다. 또한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이렇게 기병들은 야영준비를 모두 끝내고 10명씩 조를 이루어 모여 있었다.
준은 한쪽에 담요를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천왕대심공을 운용했다.
기병대장인 호든이 준에게 다가와 말하려고 했지만 준의 수련을 방해할 수 없었기에 잠시 지켜보았다.
“호든, 무슨 일이지?”
“프리맨 님, 저녁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져올까요?”
“그래주면 고맙겠네.”
빵과 스프, 과일 3가지가 전부인 식사였지만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준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천왕대심공을 운용했다.
기병들은 한쪽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준을 힐끔거렸다. 이들의 눈에는 준의 명상법 자세가 특이하게 보였던 것이다.
매일 똑같은 자세로 수련을 했기에 기병들도 한 번씩 자세를 취해 보았지만 몇 초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자세였고, 조금만 해도 허리가 아팠다.
그렇기에 준이 더 대단하게 보였다.
천왕대심공을 매일 운용했기에 기감이 발달했고, 미세한 기운도 잘 감지했다.
“으응? 이게 뭐지?”
준은 천왕대심공을 운용하다가 어둠 속을 소리 없이 은밀하게 날아오는 존재를 감지했다.
모두 6마리였다.
그것들은 손바닥 정도 크기의 대형 나방들로, 어둑어둑하다는 뜻을 가진 글룸 윙(Gloom wing)이었다.
글룸 윙은 날개에 붙은 인분(鱗粉)을 흩뿌리며 주위를 날아다녔다.
인분에는 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들이마신 것들은 모두 피해를 입는다. 게다가 독나방의 일종이라 당연히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램프를 들고 바라보면 순식간에 공격당한다.
특수한 공격법은 없지만 그들의 몸은 유독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어 죽이더라도 유익한 것은 무엇 하나 기대할 수 없다. 또 날개 모양은 보는 자를 최면에 빠지게 한다.
준은 손가락을 모으더니 튕겼다.
투웅.
눈에 보이지 않는 내력이 튕겨져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퍼억!
글룸윙은 날개를 파닥이며 준이 날린 지공을 피하려고 했지만 너무나 빠른 공격에 피하지 못하고 격중되었다. 그리고 날개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그대로 추락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퍼퍼퍽!
어느새 준은 연속으로 내력을 손가락으로 튕겨 글룸윙을 모두 추락시켰다.
파닥파닥.
밤이라서 조용한 가운데, 글룸윙이 모두 추락해 날갯짓을 하는 소리를 기병들이 듣고는 뛰어가 확인했다.
“허억, 그…글룸윙입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대장님.”
“아직 살아 있으니 모두 죽여라, 어서!”
호든 대장의 명령에 기병들은 가지고 있던 검을 꺼내 내려쳤다.
퍼억, 퍽퍽!
은밀하게 밤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독가루를 날려 그것을 흡입한 것들이 쓰러지면 잡아먹는 게 특기인 글룸윙들이, 이번에는 먼저 날개에 구멍이 뚫리면서 부상을 입어 제대로 날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병들에게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6마리의 글룸윙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을 확인한 호든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에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프리맨 님. 부상을 입은 글룸윙 6마리를 전부 죽였습니다.”
“수고했다. 몬스터가 접근하고 있으니 기병들에게 무장을 지시하고 잠시 대기하도록.”
“예? 몬스터가 말입니까?”
“저 소리가 들리지 않아?”
호든 대장은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리맨 님, 제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음… 그럼 몇 분만 기다려봐, 들릴 테니 말이야.”
약간 황당한 상황에 놓인 호든 대장은 그대로 서서 기다려 보았다.
아워어어어!
약간 괴상한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제야 호든 대장은 약간 놀랐다.
“이…이 소리는?”
“이제야 들리나?”
“예, 제 생각으로는 놀(Gnoll)인 것 같습니다.”
“놀?”
“예, 그렇습니다. 늑대와 비슷한 머리를 가진 몬스터로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입니다. 힘은 고블린보다 세지만 트롤 정도는 못 됩니다.”
“음… 그런가? 곧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그럼 저는 대원들에게 무장지시를 내려놓겠습니다.”
“보우를 가져다줬으면 좋겠는데, 있나?”
“예,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럼.”
호든 대장은 즉시 대원들에게 뛰어갔다.
기병대원들이 모두 무장을 갖추고 대기하자 저편에서 놀 6마리가 나타났다.
호든 대장이 설명해준 놀이라는 몬스터의 머리는 늑대보다는 하이에나의 그것에 가까웠다.
하긴 이 세상에는 하이에나라는 동물이 없으니 어쩌면 늑대의 머리와 비슷하다는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금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도 준의 머릿속에 놀이라는 몬스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정보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마법이나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지능도 낮다. 또한 공격할 때는 인간과 비슷한 무기를 사용한다. 특징으로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므로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이들의 손에는 전투용 도끼를 들고 있었다.
“쏴라!”
호든 대장의 명령에 준비하고 있던 기병들 중 보우를 가지고 있던 기병 16명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시시시싯.
화살이 어두운 밤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놀은 달려오다가 부챗살이 펼쳐지듯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화살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3마리가 그 화살에 맞았다.
꾸워워웍!
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괴로워했지만 그 정도로 죽지는 않았다.
나머지 3마리는 도약하면서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전투용 도끼를 던졌다.
휘리리릭.
기병들은 가지고 있던 방패를 들어 전투용 도끼를 막았다.
터텅!
퍼억!
“크아아악!”
2개의 전투용 도끼는 방패에 가로막혀 튕겨졌지만 1개는 기병의 머리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 기병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머리에서 붉은 피를 흘리면서 고꾸라졌다.
화살을 맞은 놀들도 화가 치밀었는지 화살을 잡아 뽑으면서 거칠게 달려왔다.
“쏴라!”
호든 대장의 공격명령에 다시 화살을 일제히 쏘았다.
그러나 놀은 상체를 좌우로 흔들면서 잘도 화살공격을 피하면서 접근했다.
이것으로 보아 공격해오는 놀들은 제법 전투경험이 풍부한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큰 피해가 예상되었다.
쉬이이잇.
갑자기 뒤쪽에서 빠르게 튀어나온 준은 롱소드를 휘두르면서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놀을 지나쳤다.
기병들의 머리에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바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준의 검술이 얼마나 빨랐던지 이제야 놀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됨과 동시에 허리가 두 동강나버렸다.
푸화화확!
분수 같은 피가 내뿜어지면서 놀은 처참하게 쓰러졌다.
슈가가각!
파팟!
준의 번개의 검술이 나머지 5마리의 놀에게 펼쳐지자 기병들의 눈이 커졌다.
가볍게 혼자서 놀 6마리 모두를 몇 초 만에 전부 베어버린 것이다.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
“프리맨 님, 저…정말 대단하십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났지만 모두들 환호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대인 준을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호든 기병대장이 준의 곁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프리맨 님, 피해는 기병 한 명으로, 놀이 던진 전투용 도끼에 맞아 즉사했습니다.”
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죽은 기병의 소지품은 동료들이 잘 챙기고 땅에 묻어주도록. 죽은 놀 6마리도 그대로 두면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들이 접근할지 모르니 즉시 땅에 묻고 흙으로 잘 덮어야 할 거야.”
“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병들이 호든 대장을 포함해 49명이나 되었기에 금방 처리한 후 모닥불이 있는 곳에 모여 앉았다.
준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피곤한지 기병들은 누워 잠을 청했지만, 3명은 망을 보는 임무를 맡았기에 깨어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서둘러 식사를 마친 이들은 다시 말에 올라 수도인 까브를 향해 달렸다.
수도가 가까워지면서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3일 후에 드디어 수도 까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호든 기병대장이 준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프리맨 님, 저기 보이는 곳이 수도 까브입니다.”
“음… 대단히 크군.”
“까브는 처음이시죠?”
“그래. 까브에 대해서 좀 아는 게 있나?”
“예, 저는 3번 정도 와보았기에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호든 기병대장의 설명은 이러했다.
수도 까브는 평지이지만 중심에는 언덕이 있고, 그곳에 왕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국왕의 왕성 주변에는 약간 작은 규모의 왕족들의 저택이 있다. 그곳에서 조금 벗어나면 성벽이 있으며, 이곳이 내성중의 내성이었다. 그 다음이 공작, 후작, 백작급의 고위 귀족들이 살고 있으며, 흔히 내성이라 부른다.
내성의 바깥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하위 귀족들의 주거지역이 있으며, 다음이 그들보다 신분이 낮은 기사들의 주거지역으로 나뉜다.
그렇게 점점 원을 그리듯이 중심에서 멀어지면 드디어 평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 나온다.
크게 평민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나뉘며, 온갖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을 약간 벗어나면 외성이 나오며, 외성 주변에는 병사들의 주둔지역이 있다.
수도 까브의 외성 밖에는 신분이 낮은 농노들이나 유민, 빈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이렇게 외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30만 명이 약간 넘으며, 외성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8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수도 까브는 매우 넓은 곳이기에 지금 준과 기병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벽 안이 외성이고, 성 밖이 신분이 낮은 자들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내성까지 가려면 몇 킬로미터는 더 가야 하기에 지평선 끝 너머에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자, 그만 가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출발!”
두두두두.
준이 앞장서서 힘차게 달려 나가자 기병들이 뒤따랐다.
넓은 대로의 양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집들이 있었으며, 대로는 비록 흙으로 되어 있었지만 고르게 잘 닦여 있는 편이었다.
외성벽의 성문 앞으로 다가가자 신분이 낮은 자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외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검문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준과 같이 귀족이거나 상단의 행렬은 바로 경비대가 보고 통과시킨다.
매일 하는 일이라 경비대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안면이 있었기에 바로 통과였지만 간혹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족이거나 상단 같은 경우에는 비록 형식적이지만 간단하게 살펴보고 통과시켰다.
여기는 국왕이 살고 있는 수도 까브였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귀족이라고 해도 검문 없이 통과할 수는 없었다.
준과 기병들이 성문 앞으로 말을 몰아 다가가자 경비대원이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