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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프리맨
며칠 후.
준은 베일레 자작의 영주성에 머물면서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지만 마르시아와 쿠퍼의 공격을 받으면서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겉에 입고 있던 로브도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소지품은 허리에 묶어놓았던 검은색 천으로 된 주머니였다.
마법사 리버스의 말로는 마법주머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열어볼 수는 없었다.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방법을 몰랐기에 그냥 힘으로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이 마법주머니는 마법사의 자물쇠(Wizard lock)기능이 걸려 있어서 4서클 마스터인 마법사 리버스도 열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하녀들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고는 자신이 입었던 옷과 로브, 구두, 마법주머니까지 전부 따로 보관했다.
준의 손가락에는 두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수정반지와 사파이어 반지였다.
처음에는 하녀가 준이 잠에 빠져 있는 사이에 몰래 그것을 빼려고 했다가 강력한 전기에 감전되어 기절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하녀들 사이에 그 소문이 퍼졌다.
하녀들은 겁을 먹고 두 번 다시 준의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려고 하지 않았다.
하녀들은 두 개의 반지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준이 깨어난 후 반지를 빼려고 했지만 어찌된 것인지 빠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끼고 있었던 반지라서 그런지 전기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준은 룸에만 있기가 갑갑해서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의 한쪽에는 영지병들이 12명이나 모여 있었는데, 각자 자신들의 검을 가지고 휘두르면서 한창 검술연습 중이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준은 생각했다.
‘왜 저렇게 어설퍼 보이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보기에 영지병들의 검술실력이 초보수준으로 보였다.
떠오르는 기억이라고는 대륙의 3대 검술 중 하나인 번개의 검술뿐이었지만 말이다.
영지병들이 검술을 연습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왠지 검을 들어 휘두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병기들이 놓여 있는 간이 선반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영지병들도 준을 발견했다.
“…….”
“…….”
영지병들과 준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식했다.
준은 검을 만져보기 위해 먼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좀 만져보아도 되나?”
영지병들 중에서 가장 선임자인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예, 아무거나 만져보십시오.”
“고맙네.”
준은 비록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귀족으로 보인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영주인 베일레 자작이 성에서 머물도록 허락했기에 영지병들은 준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준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너무 강력한 기운이라서 영지병들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베일레 자작에게는 가장 검술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브레이그였다.
현재 소드익스퍼트 초급이지만 중급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도 준보다는 기운이 약하게 느껴졌으니, 영지병들이 준을 어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준은 목검을 오른손에 쥐고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마치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으음… 너무 가벼운데?’
목검의 무게는 1.2kg이었지만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휘리리릭!
한 번 휘돌려 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이번에는 진검인 투 핸드 소드(양손검)를 집었다.
검의 전체 길이가 160cm 정도 되고, 검의 무게도 6.5kg 정도 되었다.
준은 검을 잠시 살펴보고는 휘둘러보았다.
휘리리릭, 파파팟!
마치 장난감 검을 가지고 휘두르는 듯했다.
원래는 양손으로 잡고 휘둘러야 했지만 준은 팔목 힘이 좋아서 그냥 한 손으로 휘둘렀던 것이다.
제법 무거운 검에 속하는데 이것도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쉬운 대로 이것으로 번개의 검술을 천천히 시전해보았다.
세부적인 구분동작으로 아주 느리게 펼쳤다.
영지병들도 그런 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번개의 검술 16식을 아주 천천히 펼쳐 보였는데, 너무나 느리게 펼쳤기에 영지병들이 보기엔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준은 신중하게 끝까지 펼쳤다.
‘음… 호기심에 한번 펼쳐 보았는데, 기분이 좋아졌어.’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게 펼쳤더니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를 3번, 이번에는 영지병들이 펼치는 검술 속도 정도로 펼쳐 보였다.
그제야 영지병들도 휴식을 취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5번 정도 번개의 검술을 펼치고서야 양손검에 적응이 되었다. 6번째 번개의 검술을 펼쳤을 때는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쉬쉬쉭, 파팟.
바람 소리가 일어날 정도로 빠르게 검술을 펼치자 영지병들의 눈이 커졌다.
‘검이 엄청나게 빨라.’
준이 처음에 천천히 펼친 검술은 번개의 검술이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대륙의 3대 검술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제대로 익힌 자들은 드물었다.
그만큼 검술은 익히면 익힐수록 어려웠다.
그런 번개의 검술을 준은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검날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펼쳤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16식을 모두 펼친 후 다시 시작된 검술은 조금 전 것보다 배는 빨랐다.
번개의 검술을 펼치면 펼칠수록 빨라졌다. 이젠 눈으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렇게 준은 3번 정도 더 펼친 후 멈추었다.
영지병들은 멍한 표정이었다.
번개의 검술을 이토록 빨리 펼치는 것은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우우우웅.
갑자기 준이 쥐고 있는 투 핸드 소드에서 공명음이 일어나더니 검날에서 녹색 빛이 1m 정도 튀어나왔다.
“으아… 오러 블레이드야.”
“저…정말 오러 블레이드야, 오러 블레이드.”
소드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가 검날의 끝에서 튀어 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던 영지병들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정작 준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펼친 상태에서 번개의 검술을 펼쳤다.
너무나 환상적은 모습에 영지병들은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휘리리릭.
번개의 검술을 마친 준은 투 핸드 소드를 다시 간이 선반에 놓아두고는 뒤돌아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영지병들은 멍한 표정이었다.
얼마 후, 이 소문은 영주성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주인 베일레 자작과 기사 브레이그도 이 소문을 듣고 놀라워했다.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는 베일레 자작이 준을 초대했다.
평소 혼자서 식사를 했는데, 영주인 베일레 자작이 초대한 저녁식사를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참석하게 되었다.
저녁식사 장소인 대연회장에는 이례적으로 마법사 리버스, 기사 브레이그를 포함해 9명의 기사들 전부가 자리했다.
그들도 오늘 오전에 있었던 준의 사건에 관해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베일레 자작은 준을 쳐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프리맨, 혹시 오전에 정원에서 검술을 펼쳤나?”
“예, 영지병들이 검술연습을 하는 걸 보고 저도 한번 해보았습니다.”
“으음… 그럼 영지병들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었군.”
“예? 그게 무슨…….”
“자네 혹시 오러 블레이드를 펼칠 수 있는가?”
“오러 블레이드라고요? 그게 뭡니까?”
“흐음… 알면서 그러는 건가, 진정 몰라서 그러는 건가?”
“모릅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설명해주겠네. 자네가 오전에 펼쳤던 검술 중 검 끝에서 녹색 빛이 뻗어 나온 적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으음… 정말이었군. 그게 바로 오러 블레이드네. 소드마스터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지.”
“그게 오러 블레이드라고요? 으음…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아니네. 자네의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그런데 저… 소드마스터가 무엇입니까?”
“으음… 자네는 기억을 잃어 모를 수도 있겠군. 검술의 단계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주겠네. 크게는 소드 유저와 소드익스퍼트, 소드마스터가 있네. 소드 유저와 소드익스퍼트에는 각각 초급, 중급, 상급이 있으며, 소드마스터는 더 이상 나뉘지 않는다네. 자세한 설명은 나보다는 아무래도 기사인 브레이그가 해주는 게 좋겠군.”
베일레 자작의 말에 기사 브레이그가 대답했다.
“그럼 제가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검술의 입문단계인 소드 유저 초급이 있습니다. 검의 기초수련과 검의 이론을 배우는 단계이며, 보통 2년 정도 걸립니다. 다음으로 소드 유저 중급이 있는데, 검술을 수련한 지 2년부터 5년까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기사 브레이그의 설명에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설명으로는 소드 유저 상급은 10년, 소드익스퍼트 초급은 검에 마나를 주입할 수 있으며, 검날에 은은하게 빛이 보인다고 했다. 유지 시간은 약 2분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소드 유저와는 확연하게 다른 경지였다.
소드익스퍼트 중급은 10분 정도 유지할 수 있으며, 상급은 25분이 넘어갔다.
그 다음 경지가 소드마스터인데, 오러 블레이드가 검날의 끝에 쏟아 오른다고 했다.
오러 블레이드로 자르지 못하는 게 없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같은 오러 블레이드는 자르지 못했다.
검술을 익힌 사람마다 오러 블레이드의 색깔이 약간씩 다르다고 전해지는데, 어떤 자는 붉은색으로, 또 어떤 자는 녹색으로 형성되는 게 주류이며, 간혹 파란색이나 분홍색, 보라색으로도 펼쳐진다고 알려졌다.
각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한 명 정도 있으며, 없는 곳도 있다.
제국에는 3명 정도가 있다고 알려졌는데, 마케리안 대륙에는 소드마스터가 전부 15명이 넘지 않았다.
그만큼 어려운 경지가 바로 소드마스터였으며, 확실하게 검증되면 최소의 작위가 백작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준이 오러 블레이드를 펼쳤다는 영지병의 말에 이들이 놀란 것이다.
“자네, 오러 블레이드를 한번 펼쳐 보여줄 수 있겠나?”
“지금 말입니까?”
“그렇다네.”
“알겠습니다. 누가 검 좀 빌려주십시오.”
준의 말에 기사 브레이그가 자신의 롱소드를 검집에서 뽑아서 빌려주었다.
준은 롱소드를 손에 쥐고는 내력을 검에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공명음이 터져 나오더니 이윽고 검날 끝에서 녹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1m나 튀어나왔다.
너무나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에 모두들 눈이 커졌다.
검날에 불어넣었던 내공을 중지하자 녹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사라졌다.
“으음… 영지병들의 말이 사실이었군. 자네가 펼쳤던 검술이 번개의 검술이었지?”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대륙의 3대 검술 중 다른 검술도 펼칠 수 있나?”
“다른 검술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검술인지 볼 수 있을까요?”
그제야 베일레 자작은 준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기사 브레이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사 브레이그는 준에게서 자신의 롱소드를 다시 건네받은 뒤 한쪽으로 걸어가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네이크 검술을 천천히 펼쳐 보이고, 이번에는 대지의 검술을 펼쳤다.
한 번씩 펼친 검술을 보고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를 기억해낸 것이다.
“음… 완전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두 개의 검술 중 일부의 초식들은 기억납니다.”
준은 기사 브레이그에게서 다시 롱소드를 건네받은 뒤 스네이크 검술과 대지의 검술을 각각 천천히 펼쳐 보이다가 제대로 펼쳤다.
쉬쉬쉬쉭, 파팟.
검술이 얼마나 빠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준은 스네이크 검술과 대지의 검술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의 검술 초식이 조금씩 떠올랐다.
점점 검술을 펼칠수록 초식이 하나씩 기억나고 있었다.
베일레 자작은 젊었을 때에는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한 달에 한두 번 두 시간 정도 검술을 수련하기 때문에 실력이 줄었다.
그래도 마나를 다룰 수 있었기에 소드익스퍼트 초급의 실력은 되었다.
베일레 자작과 마법사 리버스, 기사 브레이그와 나머지 8명의 기사들까지도 모두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