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허리케인-71화 (7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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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이방인

글리아나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에 당황한 준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글리아나의 양손이 그의 뺨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당황한 준은 피하려고 하였지만 양손으로 얼굴을 잡고 있었기에 피할 수 없었다.

쪼옥.

글리아나가 과감하게 준의 입술에 키스해버렸다. 일순간 준은 사고가 멈추어졌다. 경국지색이라 말해도 될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글리아나였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씩 마음이 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글리아나가 먼저 키스해버리자 멍한 표정이 된 것이다.

사실 글리아나도 준의 마음처럼 아니라고 하면서도 조금씩 애정이 발전하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다. 게르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술도 마시니 용기가 생겼기에 이렇게 먼저 키스하게 된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키스가 끝나고 둘의 입술을 그렇게 떨어졌다. 둘은 순간 어색해졌다.

“크흠흠, 왜 이리 덥지?”

“…….”

이히힝, 푸르르!

쿠르르르!

말울음 소리와 마차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어색한 순간이 끝났다.

“누가 온 모양인데?”

“그런 것 같아.”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게르 밖으로 나가보았다.

길 맞은편의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짐마차 9대와 고급마차 2대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말을 탄 사람들이 30명 정도 되었는데, 무장한 것과 가죽갑옷에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는 걸로 보아서는 의뢰를 맡은 용병들로 보였다.

소규모의 상단으로 모두 60여 명 정도 되었다.

그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서둘러서 천막을 치고 야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도시가 아닌 야외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야영지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자칫하면 도적으로 오해받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이 제법 거세었기에 그들은 야영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준은 게르 밖에 서서 길 건너편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글리아나가 어느새 다가와 준 옆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여 준의 어깨에 기대었다. 준도 한손으로는 글리아나의 허리를 감았다.

“준, 저들은 비가 내리는데 야영 준비를 하는 거야?”

“그래, 브란스 남작령까지 가는 상단인가 봐.”

“상단치고는 규모가 작은 것 같아.”

“그런 것 같아. 60명 정도 되는데 절반이 용병들이야.”

“규모가 저렇게 작으면 마적들에게 습격당할 텐데.”

“나름대로 방법이 있겠지. 마적들도 저렇게 작은 상단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통행세 같은 것을 받고 보내주지 않을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능숙한 솜씨로 마차를 한곳에 모으고는 천막을 쳤는데 모두 세 개였다. 천막이 바람에 날리면 안 되었기에 끝에는 말뚝을 박아 잘 고정시켰다.

고급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가 먼저 내리더니 천막 앞에 섰고, 그 뒤로 귀족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남자가 내렸다. 그의 뒤로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내렸고, 하녀 복장을 한 여자 3명이 마차에서 내려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처음에 마차에서 내렸던 기사가 마지막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준을 쏘아보았다.

“기분 나쁜 눈빛인데?”

“검술에 상당한 실력자인 것 같아 보였어.”

“글리아나가 보기에 어느 정도 경지일 것 같아?”

“글쎄. 소드익스퍼트 중급에서 상급 정도 되는 것 같던데?”

“그럼 검술실력이 글리아나와 비슷하다는 거 아냐?”

“나와 비슷하거나 어쩌면 나보다도 더 높을 수도 있어.”

“그 정도였어?”

“그래도 준에게는 한참이나 아래잖아?”

“그…그건 그래. 그만 게르 안으로 들어가자.”

“어, 알았어.”

준과 글리아나는 게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휘이이이.

쏴아아아.

폭우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준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안전막 만으로도 비바람을 막을 수 있었고, 게르를 만든 가죽에도 방수처리가 되어 있었기에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칠 것 같지 않았던 비바람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쳐 있었다.

준은 게르 밖으로 나와 지난밤 길 건너편에 야영을 한 자들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가만, 이럴게 아니라 저들에게서 짐마차 한 대만 구입해서 이동하면 그만큼 종들이 편하겠지?”

잘되었다 생각한 준은 그들에게 접근했다.

여기저기에 나누어 모여 있던 용병들 중에서 준을 먼저 발견한 자가 앞을 가로 막으면서 말하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 난 기사 준이라고 한다. 너희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기사님이셨군요. 물어보십시오.”

“너희들은 용병들이고, 저들은 상단의 사람들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덴바 용병대이고, 저들은 에린 상단입니다.”

“혹시 브란스 남작령까지 가는 상행이냐?”

“그…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상단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말해줄 수 있나?”

“예, 그럼 잠시만 여기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갔던 용병이 다시 나오면서 말하였다.

“기사님, 천막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고맙다.”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 보았던 6명의 남녀가 있었다.

고급 옷을 입은 20대 초반의 남자와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하녀 3명과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였다.

20대 초반의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처음 뵙겠습니다. 기사, 준이라고 합니다.”

“나는 브란스 남작의 둘째 아들인 제이드 폰 브란스라고 하오.”

“그렇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짐마차를 한 대 구입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짐마차를요?”

“예. 이곳까지 오던 중에 마적들과 싸우다가 제법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와중에 말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짐마차라도 한 대 구입해서 타고 가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음… 9대의 짐마차에 각종 물건이 많이 실려 있어서 곤란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짐까지 구입한다면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후후, 짐마차를 한 대 팔면서 아예 그 짐까지 팔겠다?’

“그럼 식량이 실려 있는 짐마차를 한 대 구입하겠습니다.”

“밀 50포대가 실려 있으니 25골드는 받아야겠소.”

‘밀 50포대라도 해봐야 겨우 8골드이고, 짐마차에는 두 마리의 말이 끌기에 5골드 정도면 되니까 13골드 정도인데, 두 배나 비싸게 부르는군.’

잠시 생각하던 준은 이윽고 대답했다.

“좋습니다. 25골드에 구입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소.”

준은 그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하고는 천막을 나왔다.

두 배나 비싼 가격으로 넘겼기에 제이드는 기분이 좋았다.

준은 25골드를 지불하고 짐마차 한 대를 구입해서 게르로 돌아왔다.

이미 게르 밖에는 일행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패트릭이 짐마차와 준을 번갈아 보면서 말하였다.

“준 님, 이 짐마차를 저들에게서 구입한 것입니까?”

“응, 9명의 종들이 타고 갈 짐마차야.”

“얼마나 주고 구입했습니까?”

“25골드나 주고 샀어.”

“짐마차에 실린 밀은 몇 포대나 됩니까?”

“50포대라고 하더군.”

“그럼 12~13골드 정도면 충분하게 구입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주고 구입한 것 같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밀도 그렇고 짐마차도 한 대 있으면 브란스 남작령까지 갈 때 편할 것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것이면 충분해. 그까짓 25골드는 아무것도 아냐. 내가 만든 아티팩트 하나만 팔아도 그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어.”

“음… 알겠습니다.”

“저들이 보는 곳에서 아공간을 열 수는 없으니까 일단 게르 안으로 들어가자.”

“예, 그게 좋겠습니다.”

준은 짐마차를 이끌고 게르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공간을 열어서 밀 50포대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브란스 남작령까지 타고 갈 짐마차이니 일단 두 마리의 말을 깨끗하게 목욕시킨 후에 먹이를 충분하게 먹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준의 명대로 두 마리의 말을 짐마차에서 분리하여 한쪽으로 끌고 갔다.

즐겁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서둘러 떠날 준비를 끝냈다.

준은 목욕을 하고 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9명의 종들은 짐마차를 끌 두 마리의 말들을 먼저 목욕시킨 후 준의 말과 일행의 말들을 전부 목욕시켰다.

모든 정리가 끝나자 준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9명의 종들은 짐마차에 타자 걷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게 되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짐마차를 끌던 두 마리의 말들도 밀 50자루를 옮기고 9명을 태우고 이동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힘이 적게 들게 되었고, 또한 질 좋은 먹이를 많이 먹어서 좋아했다.

선두에는 준과 그 일행들이 움직였고, 그들의 뒤로는 짐마차 한 대가 뒤따랐다.

말은 상관없지만 비가 많이 온 뒤라 땅이 질어 잘못하면 웅덩이에 짐마차의 바퀴가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급할 것이 없어 말을 천천히 몰았기에 그만큼 안전해졌다.

질퍽거렸던 땅은 정오가 가까워지자 뜨거운 낮의 열기로 인해 빠르게 말랐다.

콰두두두.

브란스 남작의 둘째 아들인 제이드가 운영하는 에린 상단의 마차와 짐마차가 준 일행의 옆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급할 것이 없었던 이들은 멀어지는 에린 상단을 보면서 천천히 이동하였다.

9명의 종들은 짐마차에 타고 이동하자 훨씬 편하였다. 비록 천천히 걸어간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걷다보면 발이 아프게 마련인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록 얼마 겪어보지 못하였지만 이들이 나름대로 준을 파악해서 내린 결론은, 정이 많고 아래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펴 도움을 주고 모든 일을 아주 여유롭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주인을 정말 잘 택했어.’

‘다시는 이런 주인을 만날 수 없을 거야.’

준 일행은 2시간 정도를 이동하고 멈추었다.

말에게 휴식시간을 주면서 과일을 두 개씩 먹였다. 말들도 주인을 잘 만나서 잘 먹고 휴식을 취하면서 이동하게 되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동하고 쉬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고, 야영 준비를 해야 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고 내일 아침 떠날 것이다.”

길에서 조금 벗어난 풀밭에 자리를 잡고는 게르를 꺼내어 놓았다.

촤르르르.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이동식 천막집인 게르가 순식간에 펼쳐지자 모두들 무척 신기해했다.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한 게르였다.

준과 그 일행은 게르 안으로 들어가 저녁을 준비했다. 오늘은 준이 하기로 했다.

갈비찜이었다.

아공간 속에 부위별로 소고기가 충분하게 들어 있었기에 재료 걱정은 없었다.

보통 고기를 삶거나 구워먹는 게 요리법의 전부였다. 이들은 한 번도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갈비찜이라는 걸 먹어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정말 맛있다!”

“이…이런 맛이!”

밥과 갈비찜으로 모두들 맛있게 먹은 후 과일로 마무리했다.

준은 글리아나와 패트릭, 세브리노와 한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오늘로써 6일째 밤을 보내게 되었군. 내일 오후에는 브란스 남작령에 도착할 것이다. 그곳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필요한 것들을 충분하게 구입한 후 목적지로 가면 될 것 같은데, 패트릭은 어떻게 생각하나?”

패트릭이 바라보자 세브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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