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허리케인-70화 (7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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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이방인

저벅저벅.

아놀드가 푸르스름한 눈빛을 내뿜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를 움켜쥐고 접근하자 롤링스는 공포에 질려 다리를 떨고 있었다. 데니스도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입안이 말랐다.

“누…누구냐, 넌?”

“흐흐, 그건 알 필요 없어. 너희들은 곧 죽을 테니 말이야.”

“이…이놈!”

데니스는 롱소드를 휘두르면서 아놀드에게 접근했지만 그는 도법인 건곤탈백도를 시전해 목을 베어버렸다.

슈가가각.

데구르르.

데니스의 목이 떨어져 눈밭을 구르다가 나무에 부딪히면서 멈추었다. 자신이 죽은 것도 미처 못 느꼈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푸화확!

잘린 목에서 분수 같은 피가 내뿜어지면서 몸이 스르르 쓰러졌다.

“으으, 살려주시오.”

아놀드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면서 거절하고는 도를 휘둘러 롤링스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잘라버렸기에 롤링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해버렸다.

아놀드는 우선 롤링스의 품속을 뒤져 정사각형의 금속상자를 찾아내었다. 잠시 그것을 살펴보다가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소지품을 뒤져 나온 것들도 전부 가졌다.

데니스의 품속에서는 마법통신구를 획득했고, 골드화가 가득 들어 있는 돈주머니도 발견해 가졌다. 죽은 레인저들에게서도 무기와 골드화가 나왔기에 그것들도 전부 가졌다. 크로스 보우(석궁)와 보우도 몇 개나 되었기에 아주 요긴할 것 같았다.

18명을 죽였기에 그들의 소지품도 제법 되었다. 죽은 자들이 입고 있던 털 코트나 털옷도 전부 벗겨서 가졌다.

“흐흐. 제법 쓸 만한 것도 많고, 일단 돈이 되는군.”

구지혈마 룡은 마인은 아니었지만 손속이 잔인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마인에 가까운 자라 할 수 있었다. 워낙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인 전력이 있었기에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을 전부 죽이고 소지품까지 전부 가로챈 것이다.

“흐흐, 백작이라는 자가 마을을 노리고 있으니 두 곳이 서로 싸우는 걸 보면서 이득만 취하면 되겠어. 좋아, 아주 좋아.”

아놀드가 그곳에서 사라지고 얼마 후에 웬디 마을에서 보낸 추격자들이 죽은 레인저와 롤링스를 발견하였다.

아놀드는 몸을 은신한 후 웬디 마을에서 나온 추격자들 중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는 자들을 소리 없이 제거했다. 특히 석궁의 퀘럴로 목을 맞추었기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자들을 은밀하게 끌고 가서 가지고 있는 소지품과 무기, 털옷까지 몽땅 벗겨 시신을 한쪽에 방치해버리고 사라졌다.

뾰로로롱.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다.

귀가 밝은 준은 그 새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일어났다.

“벌써 아침이야? 헌트, 일어났나?”

“일어났습니다.”

“오늘 아침 식사 준비는 하그리에게 맡기겠다.”

“예, 그렇게 지시해놓겠습니다.”

“좋아, 난 잠시 게르 밖으로 나가보겠다.”

헌트는 준의 종이 된 9명의 용병들 중에서 대표가 된 자였다.

준은 아공간을 열어 그 속에서 식재료와 각종 식기를 꺼내 놓고는 게르 밖으로 나가보았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공기가 무척 상쾌했다. 그 상쾌한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신 후 다시 내뿜었다.

“아, 정말 상쾌해. 오염이라고는 없는 곳이니 당연한 거지만 말이야. 플라이!”

부우웅.

하늘로 날아오른 준은 높은 공중에서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경사진 언덕도 있었고, 그 너머에는 숲도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보였다.

스르르 땅으로 내려온 준은 게르로 들어갔다.

글리아나가 먼저 일어나 세수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있었으며, 패트릭과 세브리노도 세수 중이었다. 그제야 자신은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걸 알고는 칸막이가 되어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는 다시 나왔다.

9명의 종들도 준의 영향을 받아서 깨끗하게 매일 씻었다.

노페르슈롱에게 가보았더니 먹이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준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식탁에 요리가 차려지는 걸 보고는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9명의 종들은 준 덕분에 풍성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좋아했다. 용병들은 이렇게 잘 먹기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쩝쩝쩝, 와사삭.

하그리의 요리 솜씨는 아주 훌륭했기에 모두들 맛있게 잘 먹었다.

향기로운 차를 한잔씩 마시면서 준이 말하였다.

“식사도 맛있게 잘했으니 곧 이동할 것이다. 모두들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예.”

잠시 후 그들은 모두 게르 밖으로 나왔다.

촤르르륵.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게르가 순식간에 접어지면서 줄어들자 회수하고 쇠말뚝도 모두 수거해 마법주머니 속에 넣었다.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나자 준은 노페르슈롱에 올라탔다.

글리아나는 준이 지난밤 선물로 주었던 손거울, 일명 공주거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미모에 푹 빠져 있었다. 눈빛까지 몽롱한 것을 보니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후훗, 글리아나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급할 것 없는 이동이기에 2시간 정도를 걷다가 15분 정도 쉰 다음에 다시 이동하는 식으로 했다.

마케리안 대륙은 아침과 저녁, 이렇게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게 보통이며 농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힘든 세상이었다. 귀족들은 고급에 각종 요리로 배불리 먹지만 그들도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었다. 다만 중간에 간식을 먹기는 했다.

그것이 마케리안 대륙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활이었다.

그런데 준은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처음에는 일행들도 적응이 안 되었지만 잘 먹는 것이니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9명의 종들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지만 준을 따라 점심이라는 것을 챙겨 먹으니 훨씬 좋았다.

오늘은 준이 직접 점심을 준비했는데 볶음밥과 누룽지탕이었다. 각종 채소와 고기를 넣고 만든 것이기에 맛은 좋았다.

즐거운 점심 식사가 모두 끝나자 설거지는 종들이 했다. 밀가루를 조금 사용하여 설거지를 하도록 했는데, 천연 세제이기 때문에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다.

향긋한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저편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응? 뭐지?’

츠츠츠.

내력을 일으켜 그곳을 주시하자 무장한 기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음… 기병들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두두두두.

기병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150기의 말들이 저편에서 무리를 이루면서 달려왔다. 무언가 바쁜 일이 있는 것인지 매우 빠른 속도를 내고 있었다.

길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준 일행이 있었기에 기병들은 그냥 그곳을 지나쳐버렸다.

멀어지는 기병들을 바라보던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욱하던 흙먼지도 조금 있으니 흩어졌다.

준의 곁으로 패트릭이 다가와 말하였다.

“준 님, 기병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글쎄, 무슨 바쁜 일이 있으니 저렇게 빨리 달리는 거겠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그건 그렇습니다만.”

“자, 우리도 이제 차를 다 마셨으니 가보자고.”

이들은 천천히 다시 길로 접어들어 브란스 남작령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준을 제외한 이들은 늘 보던 풍경이라 그리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였지만 준은 유람 나온 사람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면서 이동했다.

어릴 때는 아파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하였다. 도심의 공기도 탁했다. 그나마 영월에서 요양할 때 스승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면서 영월의 산천을 내려다보곤 한 게 전부였다. 이 낯선 세상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바쁘게 생활하면서 삶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있었다.

두두두두.

이번에도 말발굽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걸 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준이 돌아보자 일행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제법 거리가 멀어서 자세하게 보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준의 두 눈에는 똑똑하게 보였다.

가죽갑옷을 입고 손에는 원형 손방패를 든 용병단이었다. 어림짐작으로도 300여 명은 되어 보였다.

“길가로 피하는 게 좋겠다. 어서!”

준의 외침에 이들은 즉시 말을 움직여 길가로 피하였다. 9명의 종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이들이 준 일행의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들이 전부 지나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흙먼지 때문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서 참았다.

세브리노가 다가와 말하였다.

“준 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맙시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흙먼지가 흩어지자 준 일행은 다시 출발하였다.

한참 이동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뒤쪽에서 약 200여 명의 말을 탄 무리들이 빠르게 달려와 이들을 지나쳐 갔다. 뭔지는 모르지만 큰일이 생긴 건 분명한 모양이었다. 일행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상관없는 일인데 굳이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글리아나가 준 곁으로 다가왔다.

“준, 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야.”

“적당한 곳에 야영해야겠어.”

비가 곧 쏟아지려고 했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야영하게 되었다.

사방이 온통 평지에 곳곳에는 풀밭이었기에 야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길에서 약 30m 정도 떨어진 땅에 야영지를 선택하고는 마법주머니 속에서 게르를 꺼내었다.

일행들은 서둘러 게르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준은 들어가지 않고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폭우가 내릴 것 같은데? 안전막을 설치해두는 게 좋겠군.”

준은 게르의 지붕에 뾰족하게 튀어 나와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마나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우우우웅.

대기가 일렁거리면서 기이한 광선이 쏘아졌고, 5m 정도 떠오른 그것은 분수처럼 퍼지면서 게르 전체를 감쌌다. 마치 거대한 투명한 비눗방울이 게르를 둘러싼 것 같았다. 물과 바람을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막이었는데, 폭풍우에 대비해서 게르에 설치해두었던 것이다.

결계와 실드 마법을 일부 응용해서 창조한 마법으로, 실생활에 아주 유용할 것 같아서 설치해둔 것인데 이번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게르 안의 천장에는 랜턴이 설치되어 있어서 환했지만 밖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게르 지붕의 밖으로 나온 도리 끝 부분에 랜턴 아티팩트를 걸어두었다.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비바람이 부는 이런 날씨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랜턴의 불빛을 보고 와서 자신의 게르 속에서 쉬었다 가라는 의미였다.

후두둑.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명한 안전막에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주르륵 흘러내릴 뿐 안으로 스며들지는 못하였다.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고향이 생각나니 술 한잔하면서 잊어버리는 게 최고야.”

준은 게르 안으로 들어와서는 식재료를 꺼내었다. 하그리가 옆에서 거들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특별식으로 샤브샤브를 준비했다.

각종 채소와 버섯은 얇게 썰고 가장 중요한 소고기도 얇게 썰어 접시에 담았다. 밀가루 반죽도 준비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두 개의 식탁에 각각 화염계 마법이 새겨져 있는 아티팩트를 놓고 그 위에 육수가 들어 있는 냄비를 올렸다.

육수가 끓어오르자 준이 샤브샤브를 먹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생소한 요리와 방법이었지만 준을 따라서 그들도 먹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소고기를 적셔 먹으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듯했다. 각종 채소와 버섯도 곁들이니 훨씬 더 맛있었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자 이번에는 밀가루를 반죽해놓은 것을 약간씩 뜯어서 넣었다. 일종의 수제비였다. 샤브샤브 국물에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니 그것도 별미였다.

글리아나는 엘프라 육식을 잘 안 하지만 준의 영향을 받아서 날이 갈수록 아무 것이나 잘 먹었다. 오늘의 별미인 샤브샤브도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종이 된 자들의 식탁에 술 한 통을 주고 준도 술 한 통을 나누어 마셨다.

쏴아아아.

게르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게르 안은 무척 화기애애했다.

글리아나의 눈빛이 조금 이상해졌다. 평소 준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패트릭과 세브리노는 눈치 채고 있었지만 정작 준은 모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결국 글리아나와 준만 남아서 계속 술자리를 가졌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벌써 세 통이나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마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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