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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이방인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곳이라서 그런지 기는 공기 중에 엄청나게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기 하나만큼은 그 어떤 곳보다 풍부하군. 이런 곳에서 심법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내공고수가 되겠어.’
끝없이 내릴 것 같아 보이던 함박눈이 그쳤다.
반나절 정도를 건곤신공을 운용하던 아놀드는 내력을 다스린 후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그리고 동굴의 구석으로 가서는 바지를 내렸다. 그동안 참았던 소변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차는 다 좋은데 오줌 누는 게 귀찮아. 여긴 너무 추우니까 말이야.”
바지를 추스른 아놀드는 물건들을 다시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얼음동굴 밖으로 나왔다.
엄청나게 내린 함박눈은 아직 다져지지 않아서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무공의 고수인 아놀드에게는 전혀 지장을 줄 수 없었다. 그는 가볍게 허공으로 도약해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듯 날아갔다. 건곤신공 상에 있는 이기신풍 신법을 펼친 것이다.
수련이 높아서인지 눈 위를 한 번씩 내딛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마치 무공의 고수가 펼치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신법을 보는 듯했다.
한참을 앞으로 달려 나가자 전방을 거대한 것이 가로 막고 있었다. 얼음과 눈의 언덕인지 산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대략 70m 정도의 높이였다. 자세히 보니 눈과 얼음 속에는 바위가 뒤섞여 있었다.
타탁, 휘리리릭.
쉽게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언덕의 벽면을 발로 차면서 도약해 정상에 내려섰다.
“아하하하, 드디어 마케리안 대륙인가?”
전방의 약 1km에는 비록 눈에 뒤덮여 있었지만 침엽수림이 보였다. 그것으로 보아 분명 땅이 있는 대륙이었다.
힘겨웠지만 아이스랜드를 벗어나 이렇게 마케리안 대륙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놀드가 대륙에 나타남으로 인해 거친 풍운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쿠르르르.
짐마차가 바퀴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도치 상단의 짐마차와 말을 탄 용병들이 대거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작은 소동으로 인하여 준 일행과 오도치 상단의 분위기는 냉랭해져 있었다.
오도치 상단은 마차 1대와 짐마차 15대, 용병 70명과 상단의 일꾼 70명, 이번 상행의 책임자인 크리슨과 그의 경호를 맡고 있는 유닉스를 포함해 142명이나 되었다.
전방에 보이는 언덕 양쪽은 숲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3일 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온통 평지였기에 글리아나가 가장 좋아했다.
준은 일행들에게 나직하게 말하였다.
“모두들 조심해. 숲속에는 100명 정도가 숨어 있어.”
“예? 그…그게 정말입니까?”
눈이 커진 패트릭이 되묻자 준이 좀 더 자세한 대답을 해주었다.
“약탈자들 같아. 오도치 상단을 노리고 있어.”
준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도치 상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준 님,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단 조금 지켜보다가 결정하자고. 속도를 좀 더 늦추자.”
안 그래도 오도치 상단과 20m 정도 떨어져 따라가고 있었는데, 거리를 좀 더 두었다.
“공격하라!”
슈슈슈슝!
“와아아아!”
오도치 상단이 언덕에 다다르자 숲의 양쪽에 숨어 있던 자들 중에서 50명 정도가 화살을 쏘았다.
“으악!”
“커억!”
기습적인 화살공격을 당한 용병들과 상단의 일꾼들이 쓰러졌다.
이때 칼을 쥔 자들이 먼저 앞으로 튀어 나왔다.
통행세를 받으려고 앞을 가로 막는 게 보통인데, 이들은 바로 공격해왔다.
“막아라!”
채채챙, 파팍!
말을 탄 용병들은 즉시 그들을 막기 위해 나섰고, 상단의 일꾼들도 각자 무기를 손에 들고 공격해오는 자들과 싸웠다.
슈슈슝!
가까운 거리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더욱 피할 수 없었다. 용병들과 상단의 일꾼들이 제법 쓰러졌다. 그러나 곧 처음의 무방비 상태와는 다르게 몸을 은폐하였기에 화살을 맞지 않았다.
습격자들은 어쩔 수 없이 보우를 내려놓고 칼을 꺼내들고 튀어 나와 공격했다. 두 무리가 서로 충돌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준 일행의 곁으로도 6명의 습격자들이 몰려왔다.
준은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파리를 쫓듯 휘저었다.
“아아악!”
그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입에서 피를 분수같이 내뿜으면서 튕겨 날아가 떨어졌다.
습격자들 중 두 명이 더 접근해오자 이번에는 패트릭이 롱소드를 꺼내들고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사선으로 베어버렸다.
“끄으으!”
“크아악!”
털썩.
패트릭은 롱소드를 휘둘러 두 명을 간단하게 베어버리고는 말머리를 돌려 되돌아왔다.
15대의 짐마차 중 중간 부분에 집중적으로 습격자들이 몰렸다. 그들은 혼란한 틈을 타 식량과 물건을 실은 3대의 짐마차를 이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일부는 그 것을 호위하면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용병들과 상단의 일꾼들은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지 습격자들과 싸우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습격자들이 조금 더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목표로 삼은 것을 획득한 이상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후퇴를 알리는 피리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숲속으로 도망쳐버렸다.
흥분한 용병들이 뒤쫓으려고 하자 대장인 큐브릭이 외쳤다.
“위험하다. 더 이상 놈들을 추격하지 마라.”
숲속으로 약간 들어갔던 용병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되돌아왔다.
잠시 후 싸운 곳을 정리해보니 죽은 습격자들이 27명이나 되었으며, 이쪽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오도치 상단의 일꾼 27명이 죽었고, 부상을 입은 자가 14명이나 되었다. 용병들도 23명이 죽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서둘러라, 서둘러!”
서둘러 정리한 이들은 그곳을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짐마차를 몰았다. 그런데 용병과 상단의 일꾼들 중 현장에 남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법 큰 상처를 입어 스스로는 움직이는 못하는 자들로, 16명이나 되었다.
오도치 상단과 제법 거리를 두고 있었던 준 일행이 말을 몰아 천천히 다가왔다.
용병과 상단의 일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 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자들만 짐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심한 상처를 입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자는 버리고 떠난 것이군.”
준의 혼잣말을 들은 패트릭이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상단이 상행을 하다가 이런 경우를 만나면 두고 떠나는 게 암묵적으로 서로 지키고 있는 규칙입니다.”
“그렇다고 부상당한 사람을 두고 떠난다는 게 말이 되나?”
“움직일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받아들이는 것이고요.”
준이 중상을 입은 자들을 살펴보았더니 16명 중에서 7명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쇼크를 받아 정신을 잃었거나 되살리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그러나 나머지 9명은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치료마법을 펼치면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스윽.
준은 염력을 이용해서 살릴 수 있는 9명을 한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치료 마법을 영창하였다.
“마나의 자비로움이여, 이들을 치료해주소서. 리스토레이션(restoration)!”
츠츠츠츠.
중상을 입은 9명의 몸에서 기이한 빛이 내뿜어졌다.
깊게 입었던 검상이 스르르 아물기 시작했고, 몸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회복되었다. 가장 보편적인 치료마법인 힐보다 훨씬 강력한 치료마법이었다.
조금 특이하지만 어쨌든 심장부근에 마나고리가 9개나 있는 준의 마법실력이라 8서클까지의 마법은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직접 치료마법을 시전한 것이기에 9명의 상처가 동시에 치료된 것이다.
세브리노는 5서클 마스터 마법사라 이것이 어떤 마법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놀라워했다.
‘저런 것을 간단하게 시전할 정도라… 도대체 준 님의 마법실력은 얼마일까?’
엘프인 글리아나도 마법실력은 7서클 정도였지만 9명을 동시에 치료하기엔 벅찼다. 그런 것을 준이 가볍게 시전하자 속으로 무척 놀랐다.
‘케르킨 부족장님의 마법실력에 버금가는 것 같아. 위대하신 분을 제외한다면 가장 마법실력이 강한분이 케르킨 부족장님이신데, 준은 인간족 중에서는 가장 뛰어날 거야.’
치료가 된 9명은 조금 힘들어 보였지만 일어나 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저희들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어서 살린 것이니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
“아…아닙니다. 치료해주시지 않았다면 저희들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10년간 주인님의 종이 되어 뫼시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아…아닙니다. 은혜를 모른다면 몬스터나 다를 바 없습니다. 뫼시게 해주십시오.”
준이 잠시 고민에 빠지자 세브리노가 다가와 나직하게 말하였다.
“준 님, 저들을 종으로 삼으십시오.”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종으로 삼으라니?”
“원래 목숨을 구원 받으면 10년간 그의 종이 되는 게 오랜 불문율입니다.”
‘그런 게 있었나? 이거, 어쩔 수 없군.’
잠시 고민하던 준은 이윽고 말하였다.
“그럼 10년간 너희들의 주인이 되겠다.”
그제야 9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감사합니다, 주인님.”
모두들 고개를 숙여 준에게 인사했다.
9명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용병들로, 오도치 상단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는 것을 용병길드에서 보고 모여든 자들이었다.
준은 당분간 이들을 지켜보아야 했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류와 돈을 포함해 소지품을 전부 압수했다. 이들이 가진 것은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이 전부였다.
“이제 너희들은 앞으로 10년간 나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니 필요한 것은 내가 그때그때 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의 소지품 일체를 수거한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너희들이 나의 곁을 떠나게 될 때 소지품을 돌려주겠다.”
“예, 알겠습니다.”
준은 마법의 손을 이용하여 주변에 흩어져서 쓰러져 있는 자들을 한곳으로 끌어 모았다.
죽은 자들은 습격자들과 용병, 상단의 일꾼들까지 다양했다. 이들을 그냥 방치하고 떠난다면 분명 짐승들에게 뜯어 먹힐 것이다. 그것보다는 시신을 잘 화장해주고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았기에 모은 것이었다.
무기와 소지품은 전부 수거하고 시신은 마법의 불길로 태웠다. 워낙 강력한 불길이라서 그런지 순식간에 타버리고 뼈만 남았는데, 그것마저도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사라져버렸다.
부상을 치료받고 회복된 자들이라고는 하나 걸어서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되면 몸이 다시 약해질 것을 염려한 준은, 천천히 1km 정도를 이동해 언덕을 완전히 벗어나 평지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오도치 상단은 보이지 않았으며, 길에는 마차의 바퀴자국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준과 그 일행은 브란스 남작령까지 초행길이었지만 9명의 용병들은 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오도치 상단의 뒤를 따라 이동한 것은 초행길이고 길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한 선택이기에 이제는 그들을 따라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급할 것도 없었기에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촤라라락.
금속음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게르가 설치되었다.
9명의 용병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멀리서 보았지만 이렇게 직접 설치되는 과정은 처음 보았다.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 게르 속으로 준이 말을 끌고 들어가자 그 일행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9명의 용병들은 5명만 들어가도 가득 찰 정도로 작은 게르 속으로 말까지 이끌고 들어가는 걸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뒤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9명의 용병들은 깜짝 놀랐다.
공간확장마법이 걸려 있어서 안은 무척 넓었기에 그제야 이해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당분간 무리하면 안 되니 카펫에 앉아 쉬어라.”
“예, 주인님.”
“앞으로는 날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고 준이나 기사라고 불러라. 참고로, 난 기사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준 님.”
9명의 용병들은 카펫이 깔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 편안하게 앉았다. 양털로 짠 두꺼운 카펫이었다.
제대로 씻지를 못한 9명의 용병들에게선 지독한 냄새가 풍겨 왔지만 아직은 무리하게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