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허리케인-36화 (36/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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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도시 올가

“그러다 2년 전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아리안느 소공녀님을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탁으로 결국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으음, 자연스럽게 말하는 걸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군.’

“음, 고생이 많았구려. 옆에 있는 아름다운 분은 엘프시오?”

“그렇습니다. 이곳으로 오다가 드로이안 산맥에서 같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이라 여행이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소?”

“인간의 사회를 경험해보고 싶다 해서 따라오게 된 것이라 제가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소.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오?”

“저희는 마케리안 대륙의 남부 왕국인 이곳 오이란트 왕국을 우선 여행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른 왕국도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마케리안 대륙의 중부와 서부, 동부, 북부 등 대륙 전체를 여행해보고 싶습니다.”

“으음, 정말 부럽구려. 아리안느에게 듣기로는 켈리온 자작이 기사에 임명했다고 하던데, 맞소?”

“예. 그게 이동하는 데 좋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주셨습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 오이란트 왕국을 둘러볼 때 필요한 통행증을 하나 써드릴 테니 그걸 가지고 다니시오.”

“아, 감사합니다.”

아케비안 공작이 증명하는 통행증이라면 오이란트 왕국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공작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집무책상으로 걸어가더니 서랍 속에서 양피지를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마케리안 대륙어로 통행증을 작성하고 공작의 사인과 문장을 찍었다.

책상위에 놓여 있는 상자 하나를 들고 소파로 돌아온 공작은 통행증과 함께 상자를 내밀었다.

“이 통행증이라면 오이란트 왕국의 모든 곳을 갈 수 있을 것이고, 기사 신분패와 이 통행증이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마케리안 대륙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오.”

“정말 고맙습니다, 공작각하.”

“그리고 이 상자 속에는 5만 골드가 들어 있으니 앞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각하.”

“아니오. 아리안느의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최소한의 성의니 받아주시오.”

“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는 싶지만 검토해야 할 서류가 밀렸으니 실례하겠소.”

‘으음, 공작이 날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서둘러 보상하고 떠나보내려고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준은 아케비안 공작이 준 통행증과 5만 골드가 들어 있는 상자를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저희들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리안느 소공녀님을 뵙지 못하고 떠나야 할 것 같으니 잘 말씀해주십시오, 공작각하.”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잘 말해줄 테니. 아리안느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소.”

“아닙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아니,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아케비안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이 말하였다.

“공작각하,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준은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 앞에는 셀카 집사가 서 있었다.

“이곳을 나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소.”

“그런 일이라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준은 아리안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기에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게 어쩌면 더 좋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셀카 집사를 따라가자 얼마 후 광장이 나왔다.

준과 글리아나가 타고 갈 노페르슈롱 두 마리와 5명의 기병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 기병들이 플로렌스의 번화가로 잘 안내해줄 것입니다.”

“고맙소.”

“안녕히 가십시오.”

“글리아나, 이젠 떠나자.”

“아리안느를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약간 섭섭하네.”

“섭섭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떠나자.”

준과 글리아나가 노페르슈롱에 올라타자 기병들이 앞장서서 출발하였다.

길을 따라 한참 이동하자 플로렌스의 번화가로 접어들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하세요.”

“예, 기사님. 그럼.”

기병들이 영주성으로 돌아가자, 준과 글리아나는 천천히 말을 몰아 번화가로 들어갔다.

한편, 아리안느는 오빠 렉스의 치료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겨 준과 글리아나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셀카 집사에게 물어, 그들이 영주성을 나가 번화가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떠나보내서는 안 되는데…….’

아리안느도 아버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공작가의 소공녀가 낮은 신분의 사람과 어울린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해로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작이 사례비를 주고 급하게 떠나보냈던 거였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준은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닌가?

몇 번의 목숨을 구원 받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왕족인 동시에 공작가의 소공녀이기에 제약이 많다.

아리안느는 아픈 가슴을 달래며 자신의 마음을 접기로 했다.

‘잘 가요, 내 사랑…….’

플로렌스의 번화가는 상점과 여관이 모여 있는 곳으로, 서문과 가까이 있었다.

공작의 성이 있는 도시이다 보니 다른 도시의 3배나 되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도 60만이 넘게 살고 있다고 하니 이런 낙후된 세상치고는 아주 큰 도시라 할 수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준과 글리아나는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글리아나는 엄청난 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드를 눌러 쓰는 것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길 양쪽에는 상점들과 여관이 보였다.

준이 그중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글리아나, 저기 흰 건물이 좋겠어.”

“어차피 나는 상관없으니 좋을 대로 해.”

두 사람이 그곳으로 다가가자 출입문 옆에 서 있던 소년이 다가와 말고삐를 잡아주었다.

“하룻밤 묵으실 건가요?”

“그래. 내일 아침 떠날 것이니 말에게 맛있는 삶은 콩과 풀을 먹이고 목욕도 시켜다오.”

“예, 잘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출입문 옆을 지나는 준의 시야에 ‘켈리의 집’이라 쓰인 간판이 들어 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실내가 제법 소란스러웠다.

주위를 스윽 둘러보니, 10여 개의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바 안에서 술잔을 닦고 있는 주인을 본 준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하룻밤 묵어야 하는데 깨끗한 방 있소?”

“두 분이십니까?”

“그렇소. 방 두 개가 필요하오.”

“마침 1인실 방이 두 개 비어 있습니다.”

“짐은 없소. 우선 식사부터 하고 방으로 가고 싶소만?”

“예, 저기 빈 테이블에 앉아 계시면 바로 식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참! 식사는 어떤 것이 나오는 거요?”

“삶은 고기 한 접시와 빵, 스프, 삶은 채소와 과일 한 개가 나옵니다.”

“그럼 고기는 모두 나에게 주시오. 저 숙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술부터 주시오.”

“예. 손님, 전부해서 6실버 85실링입니다.”

“여기. 잔돈은 가져요.”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7실버를 꺼내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손님.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준과 글리아나가 빈 테이블에 앉자마자 술 한 통과 안주가 놓였다.

세 가지 과일과 이 집 특유의 향신료를 뿌려서 훈제해 저민 소고기 포였다.

쪼르르.

준은 참나무로 만든 술잔에 2,000cc의 술이 들어 있는 술통의 마개를 열고 술을 부었다.

“피로도 풀 겸 글리아나도 한잔해.”

“그러지.”

글리아나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일시에 실내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술을 마시면서 떠들던 술꾼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쩝, 이럴 것이라 짐작해 후드를 쓰게 했는데…….’

글리아나는 일반적인 미녀가 아니라 미의 여신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도의 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술꾼들의 눈이 일시에 몽롱하게 풀려버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글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고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크으, 쓰지만 향긋해.”

“그렇군. 맛이 제법 좋은데?”

쩝쩝.

소고기 포는 짭짜름한 게 맛있었고, 과일도 신선한 것이기에 달콤하고 좋았다.

글리아나는 소고기 포는 쳐다보지도 않고 과일만 집어먹었다.

술을 석 잔 정도 마시자 서빙을 하는 이가 식사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글리아나의 것에는 빵과 스프, 삶은 채소와 과일 한 개가 있었지만, 준의 접시에는 삶은 고기가 두 개 있었다.

“내 것과는 다르네?”

“원래는 고기가 나오는데 너는 안 먹으니 나에게 전부 준거야. 먹자.”

“그랬군.”

쩝쩝쩝.

준과 글리아나는 약간 늦은 저녁 식사를 아주 맛있게 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20대 청년과 50대 노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실내를 살펴보다가 눈을 번뜩였다.

노인이 청년의 옆구리를 살짝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청년이 바 안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하룻밤 묵을 방과 식사를 주문하였다.

그들도 한쪽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문을 열고 5명의 용병들이 들어왔다.

그들 중 4명은 가죽갑옷을 입고, 허리에 롱소드나 바스타드소드를 메고 있었다. 등에 전투용 도끼를 메고 있는 거구도 있었다. 1명은 흰 로브를 입고 있는 걸 보니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실내가 너무 조용한 점이 의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자신들도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전투용 도끼를 메고 있는 거구는 입이 쩌억 벌어지면서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머릿속이 멍해졌기 때문이다.

“저런 아름다운 숙녀가 있었다니!”

“눈부시게 아름다워!”

“어디에서 저런 미녀가!”

각각 감탄하여 내뱉었기에 서로 말이 달랐지만 그 뜻은 하나였다. 이제야 술꾼들이 조용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도 조용히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을 했다. 왠지 분위기가 떠들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준과 글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안내하는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술꾼들의 고개가 글리아나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단연 이들의 화젯거리는 글리아나였다.

“우와! 나는 태어나서 저런 미녀는 처음 봐!”

“나도 그래!”

“우, 저건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니야!”

“뭐? 그럼 저건 뭐야?”

“미의 여신이야, 여신!”

“맞아, 미의 여신이야!”

술꾼들은 목이 마른지 너도 나도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준과 글리아나는 소년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두 개의 방이 나란히 있었다.

각각의 1인실 방은 침대가 놓여 있고, 작은 탁자 위에는 유등이 놓여 있는 게 전부일 정도로 단조로웠다. 하지만 벽이 흰색으로 깨끗했으며, 청소가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그런대로 깨끗하게 보이긴 했다.

“손님, 씻을 곳과 용변 보는 곳은 복도의 끝에 있으며, 내일 아침 식사는 1층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알았다.”

준이 소년에게 팁으로 1실버를 내밀자, 눈이 커진 소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손님.”

소년이 사라지고 서로 인사를 마친 둘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잠자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준은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아공간의 생성을 오늘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아공간을 생성시키는 마법수식을 떠올리고 주문부터 중얼거렸다. 그 다음으로 의지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세심한 작업이기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 이제 거의 다 되었어.”

준은 마지막으로 마나를 더 불어넣으면서 의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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