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허리케인-34화 (34/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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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도시 올가

새벽의 회색 땅거미가 조금씩 산 뒤로 사라져 가는 아침.

모닥불도 이제는 불씨만 남아 있었지만 장작을 몇 개 집어넣자 얼마 후 불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5명의 기병들이 서둘러서 스프를 끓였다.

준은 그들에게 고기 한 덩어리를 내밀었다.

“이것을 잘게 잘라서 스프에 넣어라. 그럼 더 구수하고 맛있을 거다.”

“예, 기사님.”

얼마 후 스프가 다 끓자 이들은 빵을 스프에 찍어 먹었다.

준의 마법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많은 과일이 있었기에 그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고, 기병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자, 다시 출발하자.”

“출발이다, 출발!”

얼마 후 야산을 넘어가자 평야가 나타났고, 누렇게 익은 황금빛 밀밭이 펼쳐졌다. 그리고 저 멀리 집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보였다.

“준 님, 이제 영주성이 있는 플로렌스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정말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예, 두 번 다시 하기 힘든 여정이었어요.”

다가닥 다가닥.

이제는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었기에 급하게 말을 몰지 않고 천천히 나아갔다.

길 양쪽으로 황금빛 밀밭이 끝없이 펼쳐졌기에 준의 마음도 왠지 모르게 풍요로웠다.

‘황금빛 밀밭이 너무 아름다워.’

“준 님, 밀밭이 아름답지 않아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글리아나는 어때요?”

“음,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워요.”

기병들도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전진하면 할수록 점점 집들이 많아졌다.

지평선 끝에는 해발 800m는 될 것 같은 산의 모습이 보였으며, 산의 경사면에는 온통 집들로 가득했다. 산의 정상 부근에는 아름답고 거대한 성도 보였다.

‘음, 저 성이 영주성인 모양이구나.’

준은 무공을 익힌 고수이기에 시력이 좋아서 볼 수 있었지만 기병들이나 아리안느의 눈에는 아직 잘 보이지 않았다. 글리아나는 엘프라 준처럼 볼 수 있었다.

1km 정도를 더 전진하자 그때서야 아리안느가 얼굴이 환해져서 소리쳤다.

“준 님, 드디어 플로렌스가 보여요. 저 산 위에는 영주성이 있는데… 보이나요?”

“예, 잘 보입니다.”

“이제야 도착했어요.”

“그렇군요. 멀긴 멀었습니다.”

“예, 그래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게 다 준 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아…아닙니다.”

플로렌스에 가까워질수록 아리안느의 마음도 기쁨으로 넘쳤다.

아케비안 공작의 영주성이 있는 플로렌스는 60만 명이 조금 넘게 거주하는 거대한 도시였다.

하루에 플로렌스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유동인구만 해도 3만 명이나 되었다. 평민이 약 35만 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노예들로 약 12만 명, 상인이 3만 명 정도 되었다. 그밖에 공작의 사병이 약 10만 명이고, 귀족은 400명 정도 되었다.

플로렌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 밖에는 유민들이나 농노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100만 명이 넘을 거라 짐작만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대로 된 인구조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플로렌스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플로렌스의 남문.

거대한 성문 앞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수십 명이나 서 있었다. 그들은 성문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자들을 검문하는 병사들이었다. 성루에도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준 일행이 플로레스의 남문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자 성벽 안의 감시탑 위에 있던 병사가 이를 발견하고는 밑에 있는 병사들에게 알렸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성문 안에서 가죽갑옷을 입은 100명의 기병들과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왔다.

기병들의 한쪽 팔에는 원형 손방패가 끼워져 있었으며, 말 옆구리에는 길이가 짧은 창이 두 개나 꽂혀 있었다.

한쪽 가슴에는 문양이 있었는데, 오각형 안에 나뭇잎이 세로로 그려져 있고 그 위를 칼과 도끼가 교차하는 특이한 문장이었다. 바로 아케비안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플로렌스에 거주하는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흉장으로 부착해서 사용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달려와 준 일행을 포위했다.

기사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기병들이냐?”

“저희들은 윈스톤 성의 기병들입니다.”

그제야 기사는 기병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그런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렇게 몰려온 것이냐?”

“저, 그것이…….”

“카리슨 경, 나를 알아보겠어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자 기사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리안느가 후드를 벗어 얼굴을 보여주자 그의 눈이 커졌다.

“허억, 아…아리안느 소공녀님이 아니십니까?”

“맞아요, 카리슨 경.”

“소공녀님,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윈스톤 성의 기병들은 날 보호해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에요.”

“아… 그런데 옆에 있는 분들은 누구십니까?”

“여기 이분은 켈리온 자작의 기사 준 경이고, 이쪽은 준 경의 견습기사인 글리아나예요.”

“그렇습니까?”

“이번에 나를 많이 도와줬어요.”

“신분이 확인되었으니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들은 성문을 통과한 후 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길 양쪽에 있는 건물을 보았다.

성안이라서 그런지 건물들은 대체로 3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길바닥에도 돌로 만든 보도블록이 잘 깔려 있었다. 건물의 벽면이나 테라스는 각종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길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곳에는 평민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말을 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이번에는 폭이 좁은 실개천이 흘러가는 곳도 나왔으며, 작은 구름다리도 있었다.

‘크흠, 인분 냄새가 지독한 걸 보니 위생관념이 아예 없는가 보구나.’

사람들이 길에다 그냥 내다 버리는 인분으로 인해 냄새가 지독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위생관념이 없었다.

그런 곳을 지나자 영주성이 자리 잡고 있는 산의 초입이 나왔으며, 산을 둘러싼 성벽이 있었다. 제2차 방어 성벽인 모양이었다.

그 성벽 안쪽 경사면에서 화려한 귀족들의 주거지가 나왔다.

역시 이곳의 성문 앞과 성루도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카리슨이라는 기사가 먼저 보낸 전령으로 인해서 검문 없이 바로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그들은 산의 정상을 향해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영주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 경사도 있었지만 길이 잘 닦인 곳이라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귀족들의 집은 저택에 가까울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지나온 평민들의 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길가의 곳곳에는 무장한 병사들과 기병들이 수백 명씩 배치되어 대기하는 곳도 보였다. 산으로 올라올 때 그런 곳을 무려 20여 곳이나 보았다.

산의 정상에 가까워지자 귀족들의 저택은 더 이상 없었지만 직사각형의 3층 건물과 넓은 운동장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은 기사들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종의 훈련소 겸 부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곳도 무려 세 곳이나 되었다.

그곳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영주성의 내성이 보였다.

황궁을 보는 듯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성벽도 20m는 되는 것 같고, 돌을 깎아서 쌓아올려 무척 튼튼해 보였다.

이 세계로 건너온 후 이렇게 크고 화려한 성은 처음이라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와! 영주성이 엄청나게 크고 화려하군요.”

“그래요?”

“예, 왕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호호호, 어쨌든 내가 살던 곳인데 그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느끼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알아요. 준 님의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어요?”

앞에 도착해서 보니 영주성은 사방이 깎아지는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성벽 위는 스피어를 든 무장한 병사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또한 성문이 내려오지 않으면 건너가지 못하도록 거리가 15m는 되었다.

그그그긍.

굉음과 함께 쇠사슬로 이어진 거대한 성문이 스르르 내려왔다.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광장이 나왔다. 병사 천 명이 도열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으음… 대단해, 정말!’

그때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집사가 다가왔다.

“무사하셨군요, 소공녀님.”

“아! 셀카 집사, 오랜만이에요.”

“소공녀님,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공작각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래요? 너무 보고 싶었는데. 알겠어요.”

말에서 내린 아리안느가 뒤돌아 준을 쳐다보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리안느는 셀카 집사를 따라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병들은 기사 카리슨을 따라 사라졌고, 준과 글리아나는 하녀를 따라갔다.

손님이 오면 잠시 대기하는 곳인 것 같았는데 화려한 홀이었다. 벽면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각종 조각품들도 잘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수십 명의 손님이 일시에 들어와도 될 정도로 넓었으며, 소파와 테이블도 고급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녀가 차와 쿠키, 과일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갔다.

넓은 홀에 준과 글리아나만 있었기에 썰렁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한편, 조용히 아케비안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간 아리안느는 아버지가 서류에 사인하고 있는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한참 서류에 사인을 하던 공작은 그제야 누가 온 것을 알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리안느, 왔느냐?”

“예, 아빠.”

“고생이 무척 심했겠구나.”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음, 너를 켈리온 성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아니에요, 아빠. 내가 당연히 가야 했어요.”

“일단 거기에 좀 앉아라.”

“예, 아빠.”

아케비안 공작은 집무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아리안느도 오른쪽 소파에 앉았다.

아케비안 공작은 안쓰러운지 아리안느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말하였다.

“미안하구나, 아리안느야.”

“이렇게 잘 다녀왔으니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래, 알았다. 그 물건을 가져왔니?”

“여기 있어요.”

아리안느가 마법주머니 속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내어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공작이 보석함을 열었다.

붉은빛이 속에서 흘러나와 공작의 얼굴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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